프롤로그

일기 하나.

by 김구일

소라야, 정말이지 나는 너를 사랑했어. 말했잖아. 사랑은 삶을 뒤섞는 거라고. 네가 나로, 내가 너로 불리는 그 순간부터 사랑이 시작되는 거야. 서로 엉겨 녹아내리던 순간을 기억해. 나의 등 뒤에 매달려 얼굴을 파묻던 너를, 온전한 너의 숨결을, 숨결에 실린 고통을.

우린 서로의 얼굴에 찌든 고단함을 알아봤잖아. 봉천동의 후미진 골목에서 나는 라이터를 숨겼고, 너는 선뜻 불을 빌려줬지. 지린내가 진동하는 시멘트벽에 기대어 선 네가 아직도 눈에 선해. 부패한 음식 찌꺼기가 눌어붙은 쓰레기봉투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네가.

그때 넌 모든 걸 들켰어. 네가 얼마나 나약한 사람인지, 너의 삶이 버려진 음식물만큼이나 비참하고 악취를 풍긴다는 걸. 그래서 선택한 거야. 쉬지 않고 무얼 마시고, 분노했다가, 체념했다가, 슬퍼했다가, 무기력하게 쓰러지는 너를 보는 것이 재밌었거든.

나는 놀라지도, 동정하지도, 연민하지도 않았어. 잠시간 너의 어깨를 토닥이는 것만으로도, 너에게 의미가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구원은 절망에서 시작되는 거잖아. 너는 누구보다 불행에 젖은 사람이었고, 너의 불행이 마르기 시작한 건 나를 만나고부터였잖아.

볕도 들지 않던 지하 방에서, 가난에 찌든 허물을 벗고, 손은 배꼽 위로, 흐릿해진 눈동자는 천장으로, 나를 좋아하는 너를, 둘 뿐인 공간을, 무한한 궤도에 올라 지구를 맴도는 위성처럼, 광활한 우주에 버려진 채 서로를 의지하며 견뎠던 날을 잊지는 말아줘.

너의 구멍을 타고 흐르던 맥주가 타액이길 바랐고, 힘껏 움켜쥔 잔이 육체이길 바랐고, 입술에 맺힌 방울이 영혼이길 바랐어. 너는 나를, 나와 함께한 시간을, 몸을 뒤섞던 순간을 미치도록 각인하고 싶어 했지. 그럴 때면 나는, 고이 간직해왔던 도화지를 꺼내. 팔레트에 붉은색 물감을 짜.

너의 가슴께가 힘껏 부풀었다가 제자리를 찾아. 나를 물들여 달라며 애원하지. 너의 달아오른 체온이 내가 쥔 붓을 녹여. 피부에 눌어붙은 털이 너의 몸을 반으로 가르면 그 안에 숨은 우리가 보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발가벗은 사랑이, 구원을 기다리는 너의 영혼이.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