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에 읽는 <삼국유사>, '도화녀와 비형랑'
지난 가을부터 <삼국유사>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가끔 서점에 가 보면 <오십에 읽는 논어>나 <사십에 읽는 주역> 같은 책들이 나와 있는데, <삼국유사>도 50대인 지금 다시 읽으면 예전과는 많이 다를 것 같았다.
<삼국유사>같은 고전 설화를 읽는 것은 블록 쌓기 놀이와 비슷하다. 처음 책을 펼치면 어수선한 기록의 파편들이 상자에서 쏟아진 블록처럼 마구 튀어나온다. 어떤 조각은 신비로운 신화의 빛깔을 띠고 있고, 어떤 조각은 투박하지만 묵직한 역사의 질감을 품고 있다. 독자는 이 파편들을 하나하나 집어 들어 자신이 아는 지식과 논리 상상력을 총 동원해 연결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덧 이야기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고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광대한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경주라는 무대가 없다면, <삼국유사> 블록 쌓기는 반쪽으로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설화가 압도적으로 많고 경주는 신라의 심장이다. 이야기속 지명이 실재하고 유물과 유적이 넘쳐나 구르는 돌덩어리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경주가 아닌가. 50대에 읽는 <삼국유사>처럼 50대에 마주한 경주도 분명 이전과는 다를 것 같았다. 결국 배낭속에 <삼국유사>를 넣고 경주로 향했다. 겨울의 차고 맑은 공기가 머리를 깨우는 1월 말, 십여 년만의 경주행이었다.
*
평일 비수기, 경주 시내는 한산하고 고즈넉했다. 남산을 다녀온 후 저녁을 먹고 숙소 앞 카페에서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의 ‘도화녀와 비형랑’을 펼쳤다. 지난 몇 개월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이 이야기는 고난도 블록게임에 속한다. 이야기의 층이 다양하고 두터워 잘못하면 엉뚱한 곳에 블록을 쌓게 된다. 무너뜨리고 또 쌓기를 반복했지만 마음에 드는 모양새가 나오질 않았다. 이번엔 더 신중하게, 경주 현지의 기를 모아 천천히 쌓아 본다. 이야기의 첫 부분은 주인공의 부모로부터 출발한다.
주인공 비형의 아버지는 신라의 25대 진지왕이다. 어머니는 도화녀라는 이름의 여자로 왕궁에서 조금 떨어진 사량부라는 곳에 살았는데, 당대 최고의 미녀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평민이었다. (원문에 도화녀가 서녀(庶女)라는 단어를 평민으로 해석해 본다.) 왕이 도화녀가 절세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궁으로 불러 ‘상관(相關)’하려 했으나 도화녀는 거부했다. 이미 남편이 있고 정조를 버릴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화녀는 ‘제왕의 위엄으로도 나의 정조를 빼앗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죽인다고 협박해도 소용없었다. 왕이 마지막으로 ‘남편이 없다면 되겠냐’고 묻자 도화녀는 ‘된다’고 했다. 왕은 도화녀를 그냥 돌려 보냈다.
진지왕은 도화녀를 만났던 그해 폐위되어 죽었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정치를 문란하게 하고 음란함에 빠져 재위 4년만에 폐위당했다고”라고 써 있다. 그리고 3년 후 도화녀의 남편도 죽었다. 남편이 죽고 열흘 만에 왕은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도화녀의 방에 들어왔다. 그은 “네가 옛날에 승낙하였지. 지금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고 물었다. 도화녀는 가볍게 허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물었다. 부모는 ‘임금의 말씀인데 어찌 거역하겠냐’며 딸을 방에 들어가게 했다. 이에 태어난 아이(아들)이 바로 비형랑이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첫 파트이다. 진지왕과 도화녀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옛부터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가 성적으로 결합하는 이야기는 적지 않다. 그런데 이 이야기처럼 여성이 크게 부각되는 이야기는 드물다. 이야기의 제목이 ‘진지왕과 비형랑’이 아니라 ‘도화녀와 비형랑’이라는 것만 봐도 도녀화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도화’는 복숭아꽃인데, 연분홍의 예쁜 꽃잎 덕에 예부터 여성의 미모를 상징했다. 그리고 무속에서 복숭아 나무는 귀신을 쫓는 신물이다. 무속 신앙은 우리 사회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마스터 키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고대의 기록물에선 특히 그렇다. 그래서 도화녀가 이름난 무속 집단의 무당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거기에 좀 더 뇌피셜을 보태면, 남편이 있다는 것이 이미 몸주(무당의 몸에 빙의하는 주인, 신격)를 모시고 있었다는 뜻으로 읽기히도 한다. 일부 여무당들은 몸주를 모시고 있을 때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꺼린다. 몸주가 떠나거나 바뀌는 일도 심심찮게 있다. 본문을 보면 왕이 도화녀에게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고 물었던 것이 묘한 느낌으로 남았다. 운명처럼 왕이 죽고 몸주는 떠나고, 왕은 혼령이 되어 찾아온다. 그리고 도화녀와 그 부모에게까지 허락을 받은 후에야 도화녀와 결합한다. 보통 작은 무당은 몸에 신이 내리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지만, 도화녀가 이름처럼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는 큰 무당이라면 왕의 혼령도 눈치를 봐야 한다. 즉 이야기의 앞부분에선 도화녀가 주인공이고 그이의 신이하고 큰 힘이 이야기 전체에 깔려 있다.
이제 비형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태생부터 산 자와 죽은 자, 왕과 평민이라는 경계에 서 있었다. 설화에서 경계에 선 이들은 이쪽과 저쪽의 능력을 모두 갖춘 뛰어난 인물이 되곤 한다. 비형은 어릴 때 궁에서 자라지 못하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며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소문을 달고 다녔을 것이다. 진지왕의 뒤를 이은 진평왕도 비형의 특이함을 듣고 관심을 가졌다. 사실 진평왕은 진지왕의 동생이라 왕위를 이을 적통은 아니었고 오히려 형의 폐위에 덕을 본 쪽이다. 그런 진평왕에게 비형은 조카이자 왕위 계승권이 있는 위험한 존재이며 반인(伴人) 반귀신이라 하니 그냥 놔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삼국유사>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가 15살이 되어 집사의 벼슬을 주었지만 (비형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았다. 왕이 용사 50인을 시켜 지키도록 했으나 매번 월성을 날아 넘어가 서쪽 황천 언덕 위에서 귀신들을 데리고 놀았다. 용사들이 숲 속에 엎드려 엿보니 귀신들이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지자 비형도 비로소 돌아왔다.
진평왕이 비형에게 벼슬을 준 것은 그를 감시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관대하게 대하여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나는 전자라고 생각했다. 용맹한 군인을 50명이나 붙여 비형을 지키라 한 것이 영 수상했다. 아무튼 진평왕은 군인들의 보고를 받기까진 비형의 능력을 잘 알지 못했던 것같다. 군인들의 보고를 듣고도 비형을 불러 팩트 체크를 했으니까. 귀신을 데리고 노는 어린 조카라니. 안 그래도 전대 왕의 자식인대 신성함까지 갖추었다는 소문이 나면 어떻게 될까. 불안했을 것이다.
이쯤부터 ‘귀신’이라는 것들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 영적인 존재를 완전히 인정하는 입장에 선다면 귀신은 말 그대로 귀신이고 합리적으로 재해석하면 폐위된 왕과 뛰어난 무당을 중심으로 한 토속적인 신앙공동체를 가정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당연히) 후자를 지지하는데, 그렇다면 이 무속 공동체는 결속력이 높고 서민들이 다수 포함되었으며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졌을 것이다. 진평왕도 신비한 힘을 빌고자 했지만 방향은 완전히 달랐다. 외래 종교인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통치에 활용했다. 진평왕은 자신이 석가모니의 혈통이라 자부했으며 재위 기간 내내 성골(순수한 왕족의 피를 받은 이들)의 혈통을 강조했다.
비형이 남다른 점은 그 두 세계를 넘나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낮에는 동쪽의 궁궐에서, 밤에는 서천의 벌판에서 지냈는데, 전통적 방위에서 보면 서쪽은 죽음의 세계이고 동쪽은 삶의 세계이다. 비형은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존재로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무(巫)의 본질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이어지고, 진평왕은 계속 비형을 시험한다. 비형에게 귀신들을 데리고 서쪽 벌판의 도랑에 큰 다리를 놓으라 명령한 것이다. 비형은 어렵지 않게 돌을 다듬어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다리 이름은 귀교(鬼橋)라 했다. 그 능력에 감탄한 왕은 귀신들 중 조정 일을 도울만한 자를 추천하라 한다. 비형은 길달이라는 자를 뽑아 왕실의 일을 돌보게 했다. 길달은 뛰어난 재주로 각간(지금의 국무총리급 고위직) 임종의 양자가 되었고 양아버지의 명령으로 늘 놀던 서천 옆에 있는 흥륜사에 문을 세웠다. 허나 길달은 웬일인지 여우로 변해 도망치고, 비형은 귀신들을 시켜 그를 잡아 죽였다. 왜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갔는지, 비형이 왜 그를 죽이기까지 했는지 <삼국유사>는 말하지 않는다. 아마 길달이 원래 자신이 소속된 집단을 버리고 불교와 주류 집단에 너무 깊이 들어간 것이 아닌지, 혼자 추측해 볼 뿐이다. 흥륜사의 문은 나중에까지 ‘길달문’이라고 불렸는데, 후에 경주에서 널리 퍼진 무속 신앙에는 문을 지키는 도깨비에 관한 것도 있다.
이제 이야기는 막바지를 향해 간다. 길달을 죽인 후부터 모든 귀신들이 비형을 두려워하여, 신라 사람들은 재앙이 생기면 다음과 같은 글을 써 귀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성제(聖帝)의 혼이 낳은 아들
비형랑이 머무는 곳이로다
날고 뛰는 여러 귀신의 무리들아
이곳에 머물지 마라.
일연은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툭하고 노래 하나를 던져 놓았지만, 길달 사건 이후 비형이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음이 노래 속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백성들은 비형의 능력에 의지해 재앙을 물리치고 불안을 다스리고자 했다. 비형은 왕이 되는 대신 백성들의 신격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삼국유사>는 비형에 대해 더 말하지 않는다. 비형은 <삼국유사>의 모든 기록에서 사라졌다. 진평왕은 무려 53년이라는 긴 재위기간 동안 많은 업적을 쌓은 명군으로 <삼국사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부인을 셋이나 두었지만 끝내 아들은 얻지 못했다. 왕위는 성스러운 뼈(성골)를 가진 딸 덕만(선덕여왕)에게 돌아갔다.
*
<삼국유사>에서 사라진 비형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고려사>에 다시 나타났다. 고려중엽,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던 이의민이 비형을 신으로 받들어 극진히 모셨기 때문이다. 이의민은 경주 출신이다. 아버지는 소금장수, 어머니는 절의 노비였다. 키가 8척(약 190cm)에 이르고 힘이 장사였던 이의민은 동네에서 깡패 짓을 하며 사고를 치자다 관리에게 붙잡혔다. 의민의 뛰어난 체격과 격투술을 눈여겨 본 관리가 그를 추천하여, 의민은 개경으로 가 중앙군 수비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신의 난이 터졌을 때 의민은 고려 의종의 척추를 맨손으로 꺽어 죽이고 권력자 정중부의 눈에 들었다. 그런 이의민이 후에 최고 권좌에 오르기까지, 가장 의지한 것이 경주 인근에 널리 퍼져 있던 두두리 신앙이었다. 경주사람들은 비형이 두두리라는 신으로 변신했다고 믿었다. 백성들과 가까이 어울리고 귀신들을 부리면서 무엇이든 잘 만드는 친근한 비형의 본성이 신격화 된 것이다. 이의민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비형(두두리)의 화상을 벽에 걸어 놓고 제사 지내며 길흉화복을 점쳤다. 하지만 어느날 두두리는 피눈물을 흘리며 이의민의 집을 떠난다. 의민이 충심을 다해 당신을 모셨는데 왜 떠나느냐고 묻자, 두두리는 ‘네 운이 다해 떠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의민은 다른 권력자인 최충헌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의 수급은 저자거리에 내 걸렸고 자식들과 일가친척도 모조리 살해 당했다. 한때 경주를 재건하여 새 왕조를 새우겠다는 그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다.
비형은 계속 살아남았다. 그는 대장장이신, 혹은 목신(木神)으로 변신하면서 경주 지역 특유의 무신(巫神)으로 민중의 세계에서 살았다. 조선의 지리풍속지인 <동국여지승람>에 ’동경(경주) 사람들은 두두리를 너무나 좋아하여 아직까지 숭상한다‘는 한탄 섞인 기록이 보인다. 철저한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무속 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억눌렀지만 민중들에게 소용없었나 보다. 현재까지도 두두리, 도깨비는 인간들 가까이에서 살며 춤추고 노래하는 유쾌한 존재가 되었다. 때로는 가슴에 칼을 꽂은 채 운명의 신부를 찾는 멋진 남자로 재탄생하기도 하지만.
드라마 <도깨비>의 김신도 일종의 반인반귀이다. 귀신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고 문을 만들어 이동하며 금괴를 만들기도 한다. (사진 출처: 구글)
*
평일 낮인데도 경주 박물관은 차와 사람들로 가득했다. 단체 관광객과 가족단위 여행객도 많았다. APEC의 여파인 것 같다. 2월 말까지 신라 금관 전시가 계속되어 그쪽에 사람들이 몰려 시끌벅적하다. 비형의 그림자는 금관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경주의 상징인 흥륜사의 수막새가 있는 2층 전시관이다. 길달이 누문(樓門)을 만든 바로 그 흥륜사이다. 비형 무리가 워낙 무언가를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으니 이 수막새도 혹시 그들, ‘귀신’들의 솜씨가 아닌지.
흥륜사지에서 나온 수막새. 흥륜사는 ‘도화녀와 비형랑’외에도 다수의 이야기가 관련되어 <삼국유사>에 자주 언급된다.
월성터는 박물관 바로 옆에 있었다. 궁성과 담은 사라졌지만 월성 앞 해자(垓字)를 복원해 옛 모습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월성터에서 안압지, 첨성대, 대릉원으로 이어지는 옛 왕경의 중심축을 걸어 비형이 놀았던 서천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월성에서 서천까지는 맑은 천이 이어지고 합쳐 형산강으로 흘러간다. 비형의 아버지 진지왕의 능은 서천에서 가까운 서악동 고분군에 있다. 진평왕의 무덤은 반대편인 동쪽 낭산 부근에 있다. 경주의 핫플 황리단길이나 전통적인 관광지인 보문단지도 모두 동쪽에 있다. 비형의 혼이 서린 서천 벌판은 이런 중심지와는 사뭇 다르다. 왕릉들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벌판은 소박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곳엔 아직도 옛 귀교(鬼橋)의 터가 남아 있고 바람은 여전히 비형과 귀신의 이야기를 속삭인다. 배낭 속 <삼국유사>가 고향을 찾은 것처럼 들썩인다. 서천 물결이 황금처럼 반짝이고 햇살이 눈부시다. 오늘밤 이곳에선 복숭아 꽃이 만발하고 달빛 아래 춤추는 무리들이 몰래 모여들 것이다. 비형이 한 손을 높이 들고 춤을 추며 귀교는 다시 도랑을 잇는다. 경주에서 동과 서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