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 대하여 (사진:국보 306-3호 <삼국유사>인 파른본
위 사진 출처: 구글
지금으로부터 약 740(1281)년 전, 고려. 나라의 국존(國尊-큰 스승)으로 받들어지던 노스님 일연은 인각사(현대 대구 군위군)에서 새 책의 집필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막 일흔이 되던 때였다. 또한 <삼국사기>와 더불어 한국 고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책인 <삼국유사>(이하 <유사>)를 탄생한 순간이었다.
책이 처음 써지던 충렬왕 2년, 원나라의 지배는 절정에 달했다. 왕이 원의 공주와 결혼해 ‘부마국’ 체제가 굳어졌고 사회 전반에 묵직한 종속의 기운이 드리웠다. 왕조의 자존이 흔들리고 한반도 고유의 기억과 신앙은 점차 변두리로 밀려났다. 이러한 때에 권력의 절정에 있던 스님이 노령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책의 집필에 매달린 이유가 무엇일까. 한국사 연구의 총본산인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연이 ‘우리 역사와 관련한 신이사(神異史)를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편집하여 민족적 자주의식을 고취하고자 한 것’이라고 보았다. ‘민족적 자주의식의 고취’라는 해석이 꽤나 상투적인 문구로 들리긴 하지만 일연의 책이 백년 전 완성된 <삼국사기>와 달리 신이한 이야기들과 민간 전승 풍속,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무튼 이 책은 5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집필, 편집되어 세상에 나왔다. 일연은 기이(紀異-신이함을 기록하다)편 서문에 이렇게 썼다.
대체로 옛날 성인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써 가르침을 베푸는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았다. (중략부분-중국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신이한 힘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례 열거)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한 데서 나왔다고 해서 무엇이 괴이하겠는가?
‘서문’의 취지는 이렇다. 옛날의 위대한 이들이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가르치는데 있어 신이한 힘이 늘 작용했지만 대놓고 괴력난신, 즉 괴이한 힘과 어지러운 신들은 언급하지 않다. 그런데 나 일연은 이제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겠다. 그것은 괴이한 일이 아니다.… 라는 주장이다.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논어>에서 빌린 것인데, 평소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논어>에 분명하게 써 있다. 이 말은 유교의 합리적, 현실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말로 매우 유명하다. 반면 일연은 그런 세계관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 소위 ‘신비주의적 관점’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이 그 어떤 역사서와도 다른 <유사>만의 매력 포인트다.
일연이 <유사>를 집필했던 군위군은 21년 ‘삼국유사면’을 만들고 삼국유사 테마공원과 일연로드 건설 등 문화사업에 착수했다.(사진출처 구글)
<삼국유사>는 총 5권 9편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기이(紀異) 편은 삼국 시조와 왕, 귀신과 기이한 사건을 기록한 핵심 편으로 1편과 2으로 구성되었다. 나머지 편들, 즉 ‘흥법’, ‘감통’, ‘탑상’, ‘효선’, ‘의해’, ‘피은’편은 불교 전래, 효행, 제례, 인물 전기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설화 뿐 아니라 당시의 생활사, 풍속사 연구에도 아주 중요하다.
이렇게 공들여 쓰여진 <삼국유사>는 고려말까지 사찰에서의 필사를 통해 유통되었던 듯하다. 이미 금속활자를 사용할 줄 알았던 고려시대였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간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터.(안타깝게도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며 <삼국유사>는 여전히 필사되거나 종종 목판에 새겨져 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교가 힘을 잃은 시대, 유교와는 화합하기 어려운 <삼국유사>의 가치는 점점 소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문서에 관심을 가진 선비들은 <삼국유사>를 외면하지 않았다. 1510년, 경주에 부임한 이계복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평소 활달한 성품에 고문서를 좋아했던 이계복은 당시 경주에 남아 있던 <삼국유사>의 판본을 보고 호기심을 가졌다. 비록 원문도 아니고 전문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이 책의 재간행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조금 길지만, 그가 쓴 재간행서의 발문은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우리 동방의 삼국에 관련해서는 『본사(本史)-<삼국사기>』와 『유사(遺事)』의 두 책이 있으나, 다른 곳에서 간행된 것이 없고 단지 경주부(慶州府)에만 남아 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 지나 글자가 닳아 없어져 한 줄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겨우 네댓 글자였다. 내가 생각해보니,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 여러 역사를 두루 보아 천하 정치의 잘잘못과 흥함과 망함 그리고 여러 기이한 발자취를 널리 알고자 하는데, 하물며 이 나라에 살면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다시 간행하려고 널리 완전한 본을 구했으나 몇 년이 지나도록 얻을 수 없었다. 그동안 세상에 드물게 유포되어서 사람들이 쉽게 구해 볼 수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간행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영원히 없어져서 우리나라의 지나간 일을 후학들이 마침내 아는 것이 없게 될까 한탄스럽다.
그런데 이계복의 정성에 하늘이 감응했는지 성주목사로 있던 권주라는 사람이 소실되었던 부분을 구해와 이계복에게 넘겼다. 이제 <유사>는 모자이크처럼 꿰 맞춰져게 되었다. 이리하여 현재 전하는 가장 완전한 <삼국유사>인 ‘임신본’이 탄생했다. 이 외에도 <삼국유사>를 부분 소장하고 있던 절이나 개인의 판본이 여러 개 있다. 각 본마다 오탈자가 있고 때로는 가필(안 보이는 부분에 후대 사람들이 채워 넣은 것) 등이 있지만 큰 이야기 내용은 대체로 일치한다.
<삼국유사> 목판본의 모습. 옛 간행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사진 출처:구글)
<삼국유사>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도 흘러 들어갔다. 최초의 유출은 임진왜란 때라고 추정된다. 그중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그 유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한 대 가문인 도쿠가와 가(家)의 <삼국유사>이다. 이 가문은 현재까지 도쿠가와 미술관과 고문서 아카이브인 호사문고를 소유하고 있다. 이들의 소장 고문서는 귀중품이 많기로 유명하지만 외부에 공개를 극히 꺼려 극소수의 사람들만 열람하고 있다. 몇몇 학자들이 이 문고의 소장품 목록에서 <삼국유사>라는 명칭을 분명히 보았다고 하여, <삼국유사>가 예전 소장품으로 존재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도쿠가와 가문은 귀중서의 공개를 꺼려 <삼국유사>의 존재가 공식 확인되거나 전시된 적은 없다. 그후 1916년 일본의 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인사동의 한 고서점에서 <삼국유사> 임신본 계열을 우연히 발견, 구입한다. 구입경위에 대해 말이 많지만, 이 판본은 연구가치가 있는 훌륭한 판본으로 인정되어 지금은 덴리(天理) 대학에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세월이 흘러 1927년, 당대 최고의 셀럽이고 지식인 스타였던 최남선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자신이 직접 <삼국유사>판본들을 일본에서 보았다고 하며 <계명>에 <유사>에 대한 장문의 글을 올렸다. 이것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 왔다. 1919년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의 파고가 거세지던 당시 우리나라의 귀한 문서가 일본에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분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유사>가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학에서 학술적인 용도로 이마니시 판본을 사용, 출판했을 뿐. 식민치하에서 국학(國學)의 한계는 분명했다. 식민지에서 식민지배국의 학자가 우연히 고서점을 거닐다 희대의 귀중본을 획득한다는 이야기는 어딘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듯한 기시감이 든다.
2016년, <삼국유사>는 오랜만에 뉴스 지면에 등장했다. 인사동의 한 경매장에 오래된 판본의 <삼국유사> 기이편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경매장이 들썩거리는 큰 이슈였다. 판매자는 문화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김모씨라고만 알려져 있었다. 최초가는 3억 5천. 순식간에 15억까지 올라가 고문서 사상 최고값 경신이 시간문제로 보였으나 돌연 경매가 중단되었다. 경매장에 나온 <삼국유사>가 도난품이라는 제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찰이 수사에 나선 결과, 경매장에 나온 <유사>는 1999년 대전 모 교수가 소장했던 도난품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매매자 김모씨는 15년간 자택 천정을 뚫고 <유사>를 보관했다가 어이없게도 공소시효 계산을 잘못해서 경매품으로 내놓게 되었다. 김모씨는 실형 4년을 선고받았고 <유사>는 기증을 받아 국가에 귀속되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이 또 벌어진 것이다.
한창 <유사>를 공부할 당시, 같은 세미나 팀원들은 술만 마시면 당장 <유사>를 얻으러 가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도쿠가와 가문에 쳐들어가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교토에 있는 일본 황실의 전용 도서관을 뒤져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선배는 술만 취하면 삽과 곡괭이를 들고 경주에 가자고 주정을 부렸다. 고대 시가와 이야기를 연구한답시고 늘 같은 자료만 돌려보고 있느니 차라리 경주에 있는 무덤들을 다 파헤쳐서 뭐라도 찾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혹시 아냐. <삼국유사> 원본이나 <삼대목>, <화랑세기>, 그딴 게 나올지. 선배는 그렇게 말했는데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야말로 한국사를 다시 쓰는 일이 벌어질 터이다.
존재만으로도 이미 전설이 된 <삼국유사>. 지금도 <유사>는 온갖 상상력을 불러온다. 북한 함경도나 평안도의 깊은 산골,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폐허의 암자에 벽지 대신 그 책이 발라져 있지는 않을지. 어느 종갓집의 벽장에 쌓인 책 중에 파본(破本)이라도 숨겨져 있지는 않을지. 도쿠가와 가문이 혹시 원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거기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야기가 붙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책장에 꽂힌 <삼국유사>를 보면 이 책이 지금까지 살아 남은 것이 신이함이고 기적인 것 같다. 현대에 와서 말끔하게 출판된 책이지만 그 속에는 천 년의 시간을 너머 온 이야기들이 아웅다웅 끝나지 않는 수다를 떠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 다시, <유사>를 읽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