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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STORY 11
에밀레종과 인신공양

1915년 8월 경주 읍성 밖의 종을 경주 관아터로 옮김(구글)

by 타이미르




기억나세요 아주 오래 전에

자그맣고 이름 모를 아기 둘이

맑은 여름날 어디론가 사라져서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해가 지고 별이 총총 떴다지요

숲 속의 불쌍한 아기들은

누워서 세상을 떠났답니다.

아기들이 죽자

새빨간 로빈새가

머리 위에 딸기 잎새를 덮어줬지요.

-토니 모리슨 <재즈> 중


놀랍게도 나는 언제 어디서 에밀레종 이야기를 처음 들었는지 기억하고 있다. 7살 무렵, 당시 살았던 송정동 집에서였다. 지금은 흔치 않은 옛날 단독 주택에서 우리 5남매는 모두 한 방을 썼고 밤마다 각자 지어낸 이야기를 풀어내곤 했다. 잠들기 전까지 어두운 방안을 흘러가던 수 많은 이야기 중 가장 인기있는 이야기는 단연 공포괴담들이었다. 대부분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에 살을 붙여 만든 엉성한 이야기였지만 반복 재생 불가의 즉흥 라이브라는 강점이 있었다. 집 앞 큰 길가에 있던 화양극장에 드라큐라 간판이 걸리면 한동안 드라큐라 이야기가 흥했고 마당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에 갈라치면 요코하마에서 온 빨간 손 파란 손 이야기가 생각나 옷도 못 추스르고 뛰쳐 나왔다. 에밀레종 이야기는 어린이용 신문에 실려 있었는데, 신문을 열심히 읽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던 한 살 위의 오빠(연년생이라 피 터지게 싸웠던) 입에서 구현되었다.


내가 진짜 무서운 얘기 하나 해 주께. 옛날에 어떤 사람이 큰 종을 만들었는데 종 소리가 안 나서 걱정하다가 스님한테 물어 봤더니 아기를 종 만드는데 집어 너면 소리가 난다 그래. 그래서 어떤 아기를 데려가다 종 만드는 데 너 버렸어. 그랬더니 종 소리가 아주 크게 나는데 잘 들어보니까 ‘에밀레’, ‘에밀레’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냐면, 아기가 자기를 버린 엄마를 미워해서 날 죽인게 에미다, 에미다. 이렇게 말하는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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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정도 수준으로 연행되지performed 않았나 싶다. 아무튼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에밀레’라는 부분을 길게 늘여 원한 맺힌 혼령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부분이었다. 내가 무서워하자 오빠는 시도때도 없이 에밀레~에밀레~하며 나를 쫓아다녔다. 그런데 이번 10월 아펙 회의에서 22여년만에 에밀레 종을 타종한다는 기사를 보자 어린 시절 공포의 추억이 다시 떠올랐다. 인터넷에서 에밀레종의 녹음본을 찾아 들어본다. 한밤에 불을 끄고 누워 무겁고 깊은 종소리를 들으면 무섭다기보다는 서글퍼진다. 이 이야기는 왜 무서웠을까. 왜 슬플까. 거대하고 오래된 신종이 내는 파동이 희끄무레한 벽 위를 떠돌다 밤공기를 가득 채운다.


*

에밀레 종의 정식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神鍾)이다. 이 종은 지금 경주국립박물관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보 중의 국보로 명성이 자자하다. 3미터가 넘는 종의 크기와 1,254년이란 나이, 종신(鐘身)에 새겨진 뛰어난 부조들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도 종소리 자체가 가히 무쌍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NHK가 세계 종들을 비교했는데 1등함) 종신에는 당시 종 제작의 계기를 알 수 있는 신라 35대 경덕왕의 말도 새겨져 있다.


다운로드 (1).jfif 통일 신라기를 대표하는 문양인 비천(하늘을 나는 선인) 무늬


“무릇 지극한 도(道)는 형상의 바깥까지 포함하므로 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 없고,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 진동해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신종은)속은 텅 비었으나 널리 울려 퍼져서 그 메아리가 다함이 없으며, 무거워서 굴리기 어려우나 그 몸체는 구겨지지 않는다. 그런 까닭으로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그 안에 있다. ……일찍 이 어머니를 여의어서 해마다 그리운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거듭 아버지를 떠나보내어 대궐에 나아갈수록 슬픔은 더해졌다......


예스런 말투라 얼른 내용이 들어오진 않으나 대략 정리해보면 불법을 널리 퍼드려 중생을 구제하고 세상을 떠난 부모를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신종은 중생구제라는 거룩한 불심과 효라는 숭고함의 상징이었다. 그래서인지 '에밀레 종'이라는 이름에 비판적 시선을 던지는 이들도 많다. '에밀레'종이라는 명칭이 정사(正史)의 기록 어디에도 없다는 점, 일제 강점기 친일 작품이었던 함세덕의 희곡 <에밀레종>에서 본격 등장했다는 점을 들어 에밀레 설화가 종을 모독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일리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설화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이고 그것은 정식 역사와는 다른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니, 나는 조금 다른 면에서 에밀레 종 이야기의 의미를 짚어보고 싶다. 일단 '인신공양'라는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되는 미개하고 야만적인 풍습'이라고 보기보다는 이 요소를 통해 당대 사회를 약간이라도 이해해 보고 그것이 현대 사회에선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따져보고 싶다. 또한 설화라는 것은 민중의 공감대가 없다면 성립하기 어려운 것인데, 일제에서 독립한 후에도,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도 이 설화가 계속 발굴/채록되는 것을 보면 나름의 생명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원래 구전 설화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비공식적인 이야기, 비밀스럽고 하기 어려운 이야기, 잔혹하고 추악한 면을 들춰내는 이야기들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채록된 이야기를 다시 살펴보면 이렇다. (<한국구비문학대계> 중심으로 정리)


신라 시대 경덕왕 때 아버지 성덕왕의 업적을 기리는 큰 종을 만들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종을 만들고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떤 스님이 “아이의 혼이 들어가야 종이 완성된다”는 신탁을 전하자 이에 한 가난한 여인이 자기 아이를 종 주물솥에 넣었고,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종의 소리에 섞여 “에밀레~(어미야)”처럼 들린다고 한다.


이 이야기엔 여러 버전이 있지만 ‘신라 경덕왕 때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는 큰 종을 만들다가 여러 번 주조에 실패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생명이 필요하다는 계시를 받았다.’ 까지가 가장 흔한 도입부이다. 그리고 뒷 이야기는 중 하나가 위에서 본 것처럼 스님들이 시주를 나가자 ‘가난한’ 여인이 딸을 바쳤다는 버전이다. 또 다른 버전은 종을 주조하는 장인이 고민스러워하자 여동생이 성스러운 사업의 완성을 위해 자신의 딸을 바쳤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 버전은 가난한 여인이 "시주할 것이 없으니 아이라도 데려가라'는 농담을 했는데 그 말이 씨가 되어 (공양미 삼백석 약속을 믿은 심청이처럼) 어쩔 수 없이 딸을 바쳤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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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의 중심은 무엇보다도 '종'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는 왕들이 무엇인가를 기리고 싶을 때 절을 많이 짓는다. 이렇게 큰 종을 만드는 일은 매우 드문 경우다. 서양에서는 지배층이 민중교화를 위해 건축물을 많이 지었는데, 이런 시각적 공간적 상징은 단번에 민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청각적 요소인 소리는 (마치 구전되는 이야기처럼) 더 교묘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상하게 하고 감정을 담당하는 뇌의 변연계를 직접 자극하여 즉각적인 몰입과 반응을 불러온다(고 한다. 위키백과) 게다가 소리는 시각처럼 쉽게 외면할 수 없고 공간보다는 시간적 요소이다. 종신에 새겨진 문장에서 말하듯 종소리는 형체의 한계를 뛰어넘고 단순한 큰 소리가 아닌 메아리로 중생의 마음에 새겨진다. 어릴 때 부르던 노래를 평생 기억하는 것처럼. 이런 신물(神物)이 옛이야기를 벗어나 현재까지도 존재함은 물론 그 소리가 현대의 기술로도 복원하기 어렵다고 하니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기 충분하다. 그것이 에밀레 설화의 핵심이라 생각된다.


일제 타종.jpg 일제당점기 경주읍성 남문밖에 있던 종을 옛 관아터로 옮긴 후 타종하는 모습. (1915)


그런데 종이 왜 그리도 특별해졌을까. 만약 정사의 기록만을 중시하고 설화를 완전히 무시했다면 종이 그토록 특별하게 여겨질까. 종의 역사적 가치나 소리의 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 종이 가지는 '갬성'은 뚝 떨어졌을 것 같다. 특별한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특별한 것이 더 필요했다. 바로 희생과 헌신이다. 가장 귀한 것, 일회적인 것, 대체불가능한 것.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내주어야 하고 큰 힘을 얻어야 한다면 큰 것을 주어야 한다. 간단한 원리다. 그러기에 신적인 힘을 얻기 위한 희생제의는 고대사회에서 보편적이었다. 아즈텍이나 마야에서처럼 대규모의 희생제의는 아니었을지라도 중국이나 가야국, 부여, 신라, 일본에서도 순장이라는 형태의 희생제의가 있었다. 죽은 이들이 어떻게든 재생할 것을 강하게 믿었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신에게 확실한 충성심을 보여주며 내세에도 현세와 같이 생활하기 위해서였다.


초기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해외와의 교역이 부족했고 다소 고립된 위치에 있었다. 신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가야국 역시 그러했는데, 여기서 순장풍습이 성행했다. 신라의 순장은 6세기초에 와서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인신공양에는 순장 외 다른 형태도 있었다. 2017년, 옛 경주를 둘러싼 월성 성벽 밑에서 가지런하게 성벽을 따라 누운 시신 20구가 발견되었고, 이는 모두 인신공양의 흔적으로 여겨졌다. 후에도 월성에선 인간 제물들이 계속 발견되었다. 한 번은 50대의 부부, 또 한 번은 키 135센티밖에 되지 않는 20대의 여성이었다. 모두 성벽이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제물로 바쳐진 인신공양의 희생자들이었다. 시신들은 하늘을 향해 똑바로 누워 있고 몇몇 시신에서는 당시 귀한 보물로 여겼던 유리구슬과 팔찌, 신성함의 상징인 곡옥 귀걸이가 함께 출토되었다. 발굴 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장기명 연구원은 이들의 영양상태가 매우 나빴던 것으로 추정했다. 즉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다는 말. 그렇다면 귀중품들은 희생물에 대한 마지막 보상이었을까 아니면 그 역시 성벽이 무너지지 말라고 신에게 보내는 제물이었을까. 아마 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면...마지막까지 너무 잔인한 것인지. 아무튼, 인신공양이라는 요소는 이처럼 우리 사회와 상관없는 미개문명의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점,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인식의 장이 열리는 것 같다.


그런데 아무리 천 몇 년전 피지배계층의 인권이 가축이나 다름없던 시절이라고 해도, 또 먹을 것이 부족해 흉년에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던 시절이라고 해도 인신공양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을까. 인신공양의 대명사로 불리는 아즈텍의 경우 희생물로 선택된 사람들은 대부분 전쟁포로였고 태양의 신에게 바치는 특별한 축제에서는 귀족들이 제물을 자청하기도 했다. 신라에서의 인신공양도 단순한 신앙 행위를 넘어 사회적 위계와 권력 구조를 반영한 의식으로 볼 수밖에 없다. 희생의 주체가 주로 하층민으로 한정되었다는 점은, 신의 가호를 얻기 위한 대가로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생명을 통제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러한 제의는 종교적 명분 아래 사회 질서의 정당화를 수행하며, 동시에 피지배층의 생명을 제물로 삼음으로써 지배 이념을 과시하고 신성화하는 기능을 가졌다. 흔히 불교는 평등과 자비로움의 종교로 그려지지만, 이 설화에서는 아이를 희생양으로 삼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준다. 일부 버전에서는 이런 희생을 지극한 불심의 발현이라고 언급하기도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주지 스님이 아이로 환생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돌려 말해도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를 씻기는 어렵다. 설화는 더 나아가 인간 생명력의 중심인 어머니라는 존재가 딸을 포기하는 비극적 상황으로 치닫는다. 어머니가 어떻게 자식을 버리냐하는 비난보다는 '오죽했으면...'하는 마음이 나는 먼저 든다. 한편으로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발원이, 다른 한편으로는 가진 것 없는 백성의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신이함이기에 에밀레종 설화는 무섭고도 슬프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요즘은 어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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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성덕대왕 신종이 경주박물관 이전 모습. 뒤따르는 시민들이 너무 많아 즉석에서 흰 천을 길게 늘여 사람들이 잡고 따라오게 했다고 한다. 종의 영험함 여전히 위력적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25년 10월 현재, 경주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국제 정치지도자들의 모임을 맞아 분주하다. 종도 다시 한 번 대중에게 노출되며 신이한 소리를 들려 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유수의 지도자들은 종소리를 듣기 전 이 종의 위대함과 과학적 제작 방식에 대한 설명을 들을 것이고 한국 문화의 우수성에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야 어떻든) 찬탄의 눈빛과 박수를 보낼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종의 설화는...이라며 이야기를 한다면 근거가 부족한 낭설로 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린 미친 자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펙에서는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하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살짝 그 엄숙하고 진지한 자리를 긁어보고 싶어진다. 바라건데 종소리가 경덕왕의 말처럼 중생을 구제해 주길. 특히 나처럼 먹고 사는 데 허덕이는 평범한 사람들, 평범함 보다 훨씬 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먼저 구제해 주시길. 천년 수도 경주를 지킨 월성을 너머 도깨비들과 인간 영혼들이 어울려 놀았다는 황천 언덕까지 크고 깊게 울려 퍼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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