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의 판단기준은 인간의 관념

by 해질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아름답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이며 왜 인간은 미를 추구하려는 것일까? 무엇이 아름답다는 것일까?

남주인공 할이 추구하는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즉 나의 입장에서도 여주인공 로즈마리는 할이 보는 시각을 통해 우리에게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가끔씩 그 여성의 현실적인 시각적 모습을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여주고 있지만 현실적인 인간은 대부분 너무 뚱뚱한 여자와의 로맨틱한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마음이 좋든 나쁘든 간에 인간의 시각과 인간의 관념이 함께 맞물리는 한 인간의 인식은 그런 사랑을 불가능하도록 만들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역시 시각적인 로봇은 아니기에 인간의 마음을 관념적으로 새롭게 변화시킴으로 해서 기존의 관념을 깨고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 할 수도 있다. 그런 영화가 바로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이다.


할의 바람둥이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스토리는 시작되는데 할의 잘못된 인성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아서 그런지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들만 사귀려고 하는데 할의 그런 특성에 대해서 우리는 미의 관념이 어느 특정한 대상의 모방이 아니라 인간의 동물적인 특성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짝짓기에서 강하고 싸움 잘하는 우성의 동물을 선호하는 것과 같이 인간이 이성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반하고 현혹되어지는 것은 그런 동물적인 특성이 인간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 동물적인 존재이면서 이성적인 존재인 인간은 그런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도 일종의 자기만족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다.


인간에게 있어서 좋고 나쁨은 육체적인 것일까? 정신적인 것일까? 육체가 보고 느끼고 맛을 보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뇌, 즉 정신이다. 그 정신이 우리의 감성을 좌지우지하며 삶의 많은 감성을 느끼게 해 주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하지만 그런 뇌도 우리에게 그런 지식의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며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인식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뚱뚱한 것을 날씬하다고 느끼면 날씬한 것이고 못생긴 것을 잘생긴 것이라고 하면 잘생긴 것이 된다. 아무리 인간이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그것은 자신의 행동이 옳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다. 삶은 이처럼 오직 자신의 주관적 관념에 의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사회의 문화적 환경과 매스컴의 영향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행동과 의식을 좌지 우지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관념이 하루아침에 체면으로 인해 급작스레 변한다는 것은 조금은 비현실적이면서 황당한 느낌마저 없지 않지만 그런 설정으로 인간의 관념에 대한 반성이 있다면 이 영화는 참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할이 체면효과로 인해 미의 관념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로즈마리의 현실적인 모습을 인식하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고정관념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할의 눈에는 그녀의 뚱뚱한 몸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날씬한 몸매에 아름다운 금발머리에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을 보고 할은 그녀와 사랑을 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여러 가지 실제적인 그녀의 생활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할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나로선 너무나 이해가지 않지만 할이 그런 현상에 대해서 단순히 외부적인 요인으로 전환하거나 그러려니 하는 표정은 왠지 너무 어색해 보였다.


왜 인간은 인간의 겉모습만 보고 먼저 판단하는 것일까? 무엇이 속물적이고 무엇이 동물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왜 할은 뚱뚱한 여자를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자로 착각하는 것일까? 차라리 뚱뚱한 것 그 자체를 사랑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정상적인 것이 아닐까? 왜 하필이면 주인공의 눈엔 아름다운 여자로 보이게 만든 것일까?


현실을 현실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은 뭔가 맞지 않는 것 같다. 그것이 단순히 평범한 사람들의 관념을 깨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뚱뚱한 것이 날씨한 것으로 보이고 추한 것이 아름다운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추한 것이 원래 아름다운 것이고 뚱뚱한 것이 원래 날씬한 것인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간은 분명히 좋고 나쁨을 구별할 줄 알고 선악을 판단할 줄 안다. 그것이 살아오면서 인간의 세계에서 학습되었더라도 그것은 인간이 지닌 인간 고유의 틀이 아닐까? 보고 느끼고 인지하는 육체적인 면에 대해서 인간이라면 보편적인 감각틀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인성을 형성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다양한 삶의 양식과 생활 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관념적인 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그 고유의 틀 속에서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해서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은 여러 사물들에 대해서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하며 여러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기 위해서는 이런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인식의 전환을 위해 여러 매체들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중요한 건 인간의 마음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런 영화도 소귀에 경읽기처럼 헛수고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것도 사람의 마음이다. 사랑을 하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아름다워 보이듯이 인간의 관념이 조금만 변하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이 본래 아름답다면 모든 것이 충분히 아름다워질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문화적인 요인으로 인해 아름다움에 대해 개별적이면서 주관적인 차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수많은 시각적인 정보와 인식의 재구성을 통해 알게 모르게 우리의 지각과 인식에 대해 어떤 일정한 틀을 형성해 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에 대해서 이 영화는 우리의 인식들이 단순히 시각적인 정보를 통해 학습의 과정을 통해 관념을 형성해 가는데 그것이 인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있는 그런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외형적인 모습을 중요시하는 것도 내면적인 형태를 중요시하는 것도 중요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일반적인 관념을 깨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뚱뚱한 것은 신체적 혹은 유전적인 요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사랑에 대한 시련이나 스트레스로 인해 자신의 먹는 행동이 뚱뚱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뚱뚱한 사람에게도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있지만 뚱뚱한 사람은 쉽게 날씬한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신체적인 특성을 많이 상실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 것을 인간의 관념으로 뚱뚱한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특성으로 합리화시킨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긍정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인간은 더러운 것과 더럽지 않은 것에 대해 혹은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에 대해 혹은 기쁜 것과 기쁘지 않은 것에 대해 등등 수많은 대비를 통해 어떤 사물에 대해 정의를 내렸고 그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판단기준이 시대의 흐름이나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것도 인간의 관념이나 문화를 통해 형성된 주관적 판단의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하지만 대중들에 의해 인식되는 다수의 관념에 대해서 그것을 일반화시킨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관념의 일치 일뿐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가 인간의 미적 관념에 대해서 특히 인간의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대해 일반적인 통설에 반하는 주인공의 행위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라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다. 우리의 눈이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 특히 대중매체에 의해 인간의 고정된 관념이 형성된 경우 그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을 너무나 높게 잡고 있다는 것과 내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외면적인 아름다움에 치중함으로써 비롯된 인간의 잘못된 인식의 관념에 대해서 그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외부적인 요인(체면술)에 의해 일반적인 추한 것에 대한 반대 관념을 주입함으로써 추한 것이 아름답다는 말이 되는데 솔직히 이 영화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상황의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체에 대한 관념이 변한다고 해서 그 물체의 형태가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주인공은 자신이 보통 일반화된 고정관념으로 그 여자의 형태를 보고 사랑하는 것이기에 주인공은 그 여자가 가지는 뚱뚱한 것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보고 인지하고 느끼는 것이기에 모순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한계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일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관념은 너무나 중요하다. 미의 판단 기준이 우리의 관념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관념을 통해 삶을 판단한다. 하지만 그 관념을 형성하는 것은 우리의 환경이다. 환경을 통해 문화를 형성하고 자신의 관념을 형성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세뇌된 여러 가지 관념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질 줄 알아야겠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이 중요하듯이 개개인의 고유한 특성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라는 그릇된 판단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죄는 미워하더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어떠한 행동에 대해서도 그 어떤 일반적 주관적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인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위대한 것이 인간의 삶이다. 인간의 욕심이 오로지 인간의 삶을 계층화시켜 왔고 그로 인한 불평등을 형성했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갈등이 인간의 삶을 더욱더 초라하게 할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아무도 이렇다 할 말도 하지 않는다. 단순히 그것이 현실 일뿐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고 행동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기에 쉽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인간에게 자신이 왜 살아있는가에 대해서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면 아무도 명확하게 본질적인 답변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틀속에서 그렇게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름다운지 자신의 주관적 관념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관점도 중요하지만 타인이 보는 관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마음속의 인간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잘못된 관념이 인간을 스스로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관념을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양한 대중매체를 접하고 수많은 시각적인 정보들과 삶의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그 조직 내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행위들에 대해 아무런 의심 없이 행동하며 판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어차피 사회적인 동물이면서 이성적인 존재이기에 이렇게 양면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원숭이도 다른 동물들도 이 세상의 모든 자연은 하지만 이런 양면적인 생각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거나 방황하지 않는다. 순순하게 자신의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의식이 있는 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의식을 업데이트하며 새로운 의식을 형성해 간다.


세상의 옳고 그름은 그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일 뿐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살아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고 소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지나쳐 버리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각자가 가지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미의 관념을 새롭게 업데이트해야 할 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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