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변명이나 변론을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나의 잘못일 경우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상대방을 설득시키거나 이해시키기 위해 변론이나 변명을 늘어놓는다.
순전히 자신의 잘못을 전적으로 수긍하는 일이라면 변론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치명적인 죄를 저질렀다면 그 변론이 자칫 화를 자초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의 잘못을 떠나 어떤 일에 대해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반론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정치인이라면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고 국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변론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잘못을 한 정치인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역사적 변론을 침묵과 무죄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는 참모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내린 부패는 정의와 민주주의가 무색할 정도로 권력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형국이었다.
딱 깨 놓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은 김영란 법이 시행된다고 해도 우리 사회 곳곳에 지하 경제에 대해 대체로 묵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경유착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었다. 국가와 기업은 공무원들과 사기업과의 관계처럼 나라의 돈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공직자는 로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과 나랏돈으로 배불러가는 사기업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만큼 해 먹었으면 국가가 지원해 주기 어려운 곳에 기업에서 자발적으로 스폰서를 해달라는 요구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 한해의 예산이 적은 금액도 아니지만 그 돈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다 아는 사람도 없다는 것과 원자력 발전이 위험하다는 것을 일본사회에 고발한 후쿠시마 원전 기술자 오구라 시로의 고백이 묻힌다거나 황장엽 선생님의 망명이 햇빛정책에 의해 빛을 보지 못하고 묻히고 세월호 사고가 나라의 총체적 안전 불감증과 부패 그리고 리더십 부재에 발만 동동 구르다 애꿎은 아이들과 선생님들만 바다에 수장해 버린 비극적인 사고도 속 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도 국정운영에 투명성과 윤리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고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가 알게 모르게 묻어왔던 진실들을 들춰내지 못하고 감추고 올 수밖에 있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런 비극적 사고가 또 발생할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그 시대적 상황이 한국사회와 무척 닮아 있다. 아래의 소크라테스의 예언이 소름 끼치게 와닿는다. 나를 죽인 이들이여! 내 이르노니, 제우스에 맹세코, 내가 죽자마자 여러 분은 나를 죽인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은, 여러분이 나를 죽이면 여러분의 생활방식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이르노니, 결과는 그와 정반대일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이 여러분을 비판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들을 내가 말렸지만, 여러분은 그런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더 젊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더 가혹할 것이며, 여러 분은 더 분개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누가 여러분의 나쁜 생활방식을 비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그런 식으로 비판에서 해방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으며, 가장 아름답고 가장 쉬운 방법은 남들이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내가 법정을 떠나기 전에 내게 유죄판결을 내린 이들에게 해주는 예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