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오늘 유치원 친구 엄마와 커피를 마셨다.
친구 엄마는 얼마전 다 같이 학원을 다니던 아이들이
단체로 학원을 그만두고 다른 학원으로 우루루 옮겨갔다고 한다.
이들은 이미 이전에도 단체로 학원을 옮긴 전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엄마도 학원을 옮겨야 할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엄마들이 학원을 선택하고 옮기는 기준을 들어보니
오롯이 엄마들의 기준에 맞춘 것이었다.
학원에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든다는 엄마가 나타나자
모두 동요되어 그러한 부분을 더욱 부각시켜 바라본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이들 역시 친구 따라 강남간다고
친한 친구가 옮기겠다고 하니 친구따라 우루루 움직인다.
이렇게 한해동안 전전한 학원만 3곳.
그리고 고민을 하는 엄마는
휩쓸려서 학원을 옮기는 것이 맞는지,
다른 엄마가 학원에 불만을 토로한 부분에 대해
불안감이 올라와 그냥 다니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그 엄마들의 피드백도,
다른 아이들의 피드백도 아닌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부분은 내 아이의 피드백이다.
학원도 그렇지만 상담도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비싸고 좋은 상담사가 있다 한들
나한테 안맞으면 그만이다.
그 아이들이나 그 아이의 엄마들에게 맞지 않을지 몰라도
내 아이한테 잘 맞으면 그만인거다.
그 엄마는 다른 엄마들이 지적한 학원의 그 부분이 불안하고,
내 아이가 덜 체계적인 학원에 다녀 뒤쳐질까 불안하다 한다.
아이가 영어를 못해 불안하고
아이가 한글을 완벽히 떼지 못해 불안하고
아이가 로봇만 있으면 친구들과 놀이보다 로봇을 선택해서 불안하고
아이가 뛰어서 다칠까 불안하다 한다.
영어가 필요하다는건 누구 생각인가.
아이가 스스로 뼈저리게 영어가 필요하다 느끼는 순간
스스로 하고 싶어지게 되어 있다.
아이가 한글을 완벽하게 떼지 못했지만
이 정도까지 해온것도 아이의 힘과 노력이었다.
아이가 로봇때문에 친구들과 놀이가 뒷전이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집중력이 남다른 것이다.
아이가 뛰어서 다치는건
원래 인간은 다쳐가며 크는거다.
팔땡이는 온 몸을 다쳐가며 옆돌기를 연습한다.
그러면서 다쳐봐야 어떻게 착지를 제대로 하는지 알게 된다며
그 과정을 당연하게 여긴다.
일반적인 엄마라면 내가 너무 이상주의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그래서 넌 네 가치관대로 실천하고 있냐 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니 애가 동기가 높고 알아서 스스로 잘 하는 애니까 걱정 없는거야
라고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며칠 전, MBTI 워크샵에서
내 아이가 자퇴를 하고 싶다고 한다면을 주제로
토론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마침 같은 주제로 이웃님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러한 극단의 순간에도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저는 내 아이를 믿고 자퇴를 허락하고, 자퇴 이후의 삶을 지지하겠습니다.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덜컥 오케이를 하진 않겠지.
아이와 충분히 대화를 나누어 보고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고심해 볼거다.
그리고 아이의 결정을 충분히 존중하고
자퇴 후 필요한 것들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실제 내 얘기이기도 하다.
나는 중1, 비행에 발을 담그고서
부모님께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공부는 내 인생에 불행이고 공부만 생각하면 죽고 싶다고.
부모님은 충격을 받으셨지만
이내 네 생각이 그러하다면 존중하겠다고 하셨고
나는 그렇게 공부에 손을 놓았었다.
그렇게 중학교 내내 3년간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고
3년동안 쉬며 안정감을 찾은 나는
스스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 와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3년간의 공백이 쉽게 넘어갈리 없었다.
특히 수학같은 경우엔 정말 따라잡기가 힘들었지만
당시 교대를 목표로 공부하던 공부잘하던 친구를
아파트 단지 앞 바위에 붙잡아 놓고 배우기도 하고
아파트 계단에 앉아 친구들에게 마구잡이로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수포자라 할 만큼 수학은 못한다.
하지만 당장의 급한 불을 끌 만큼의 성적은 올렸고
그렇게 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내내 전교1~3등을 했다.
물론 비평준화 시절이었기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머리 좋은 친구들이 오는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 성적을 올리고
선생님들께 인정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조금씩조금씩 자기 확신감, 자기 효능감,
이어서 자존감까지 높아져 갔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 3년의 공백을 모두 채우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의 공백은 대학교, 대학원을 오면서까지도 이어졌고
여전히 그때 배우지 못한 부분이 구멍처럼 남아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학교 공부만이 공부인가.
많은 책을 읽고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며
나는 학교 공부보다 더 중요하고
더 실제에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을 배워가며
다른 이들과는 다른 차별성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허투루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을 법한 3년의 공백이었지만
나는 그 시간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꼭 필요한 3년이었고,
그 시간을 버린게 아니라 재정비하는 시간이었다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팔땡이가 원한다면
팔땡의 자퇴를 충분히 지지할 생각도 있다.
36년 살아보니 삶에 있어 학교 공부가 다가 아니더라.
그건 그냥 시작이었을 뿐이더라.
팔땡이가 학교 공부가 아니더라도
더 큰 세상을 바라보고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자퇴 후의 삶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준비가 되어있다.
지금이라면 자퇴 후 만화를 하겠다고 하겠지.
그럼 나는 만화에 필요한 것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만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할 예정이다.
그 과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아이가 흥미를 잃어 무산된다 하더라도
그 과정이 결코 의미없는 과정일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얼마전 팔땡이가 반친구들이 자신보다 영어를 잘하고
자신보다 수학을 잘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말했다.
"팔땡아, 누가 누구보다 빠르고 잘하는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누구든 자신만의 속도가 있고, 누구든 한두가지씩은 잘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어.
네가 언어적으로 빨라서 4세에 이미 글을 읽을 수 있었지만
7세가 되어서 글을 읽게 된 친구들도 있지?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은 다들 하게 되잖아.
그래서 속도는 중요하지 않아.
누가 너보다 빠르든 잘하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
또 니가 다른 친구보다 빠르고 잘하는 것 역시 중요한게 아니야.
너는 그냥 너의 속도대로 해 나가면 돼.
영어가 하고 싶으면 배울 수도 있고, 학원에 보내줄 수도 있어.
네가 준비가 되고 때가 되었을때, 스스로 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올거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너는 네 속도대로 그때 해도 늦지 않아."
오늘 함께 커피를 마신 엄마는 말했다.
아이가 또래보다 학업적으로 느릴까봐 걱정이라고.
느리면 뭐 어떤가.
억지로 강제로 남의 속도에 맞추며 살아가는거
그게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자신의 페이스를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자신의 속도대로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주체적으로 삶을 꾸려나가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팔땡이는 아직도 영어를 못한다.
유치원에서 파닉스를 배우긴 하지만 그 뿐.
그래도 나는 전혀 초조하지 않다.
서른이 훌쩍 넘어 공부를 시작한 나도,
서른 중반이 넘어 상담에 뛰어든 나도,
인생에 절대 늦은 때란 없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