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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빈 Aug 01. 2023

아이의 불편한 친구관계


며칠전 나는 오랜만에 아이의 관계에 대한 불안이 올라오게 되었다.

아이의 사회성과 또래 관계에 있어 아주 자유로워졌다 생각했는데 거의 2년만에 느껴본 불안에 다시금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의 친구들 중 유독 적극적이고 주도적이고 활발한 친구가 있었다. 사실 좋게 말하면 그렇게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통제적이고 주장적이고  영악하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특성이었고 이는 정말 한끗 차이라 생각한다.


이 친구와 노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종종 불편감을 느끼곤 했는데, 아이가 을이 된 양 좀 더 낮은 위치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물놀이 중 팔땡이에게 물을 과도하게 뿌려댄다거나, 종종 팔땡과 놀다 팔땡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무시한다거나, 혹은 멋대로 놀이를 중단하고 온다거나, 친구들 여럿이 있을 때 팔땡을 소외시키는 느낌을 받는다거나 할때 나는 내 아이가 느낄 불편감을 강하게 인식하고서 내 아이에게 몰입되곤 했다.


하지만 아이는 노느라 아무것도 몰랐다. 당장의 사소한 불편감보다 놀이에 몰입되어 놀이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훨씬 커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서 노는 것도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이런 모습을 맞닥뜨리면 나는 불편감이 스물스물 올라오곤 했다. 그리고 혹시나 이것이 나의 투사일까 싶어 나는 쉬이 어떠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아이에게 은근 슬쩍 떠보는 나의 질문이 혹여나 아이에게 어떠한 색안경을 씌우고 가스라이팅을 하게 될까, 아이에게 나의 생각을 주입하게 될까 너무나 조심스러워 한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깊은 고뇌에 빠졌었다.


아이를 믿고 아이가 헤쳐나가고 아이가 나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고 기다려주면 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이를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계속해서 그 아이의 행동들이 건드려지고 불편감이 올라오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나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했다.


처음엔 나의 시야에 갇혀 그 아이가 영악하고 못된 아이처럼 느껴졌다. 팔땡을 무시하고, 소외시키고, 통제하고, 멋대로 하려는 아이.


그리고 그 아이가 마치 절대악이고 내 아이가 절대선인 것처럼 나는 아이에게 적의감을 느꼈던것 같다.

나는 그 아이의 엄마가 너무 괜찮은 사람임을 알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엄마까지도 멀리해야하나 고민이 되고 있었다.


그 엄마는 활발하고 나처럼 교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모임에 늘 빠지지 않고 나왔다. 나 역시도 내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있었지만, 내 새끼가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니 모임에 빠짐없이 나가는 멤버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가 미워보이기 시작하자 이 모임을 나가야 하는 고민까지 되고 있었다. 이 아이만 빠지면 모임의 모든 것이 완벽한 것만 같았고, 그렇다고 이 아이와 떨어뜨리기 위해 모임에 가지 않자니 아이의 다른 관계와 놀이상황을 다 차단해 버리는 듯한 느낌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나와 그 아이, 내 아이와 상황을 곱씹어 봤다. 이것이 정녕 나의 주관적 시선이 개입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그 아이의 특성만을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 맞는지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했다.

그리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나는 깨달았다.

아이와 팔땡의 관계를 지켜보며, 그 관계에서 사소한 어떠한 것들이 나를 계속해서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무시감, 소외감, 지는 듯한 느낌임을.


사실 그 아이의 성격은 그 나이 또래에서 나타날 수 있는 특성이라 생각한다. 좋게보면 주도적, 적극적, 활발함인 것을 나는 내 새끼에게 하는 행동들에 무시감, 소외감을 느껴 통제적, 주장적, 영악함으로 받아들였다.

그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본 것이 아니라 나의 어떠한 부분을 자극하니 그것이 탁하게 변질되어 내 안에 들어왔다.


그 아이가 멋대로 놀이를 중단하자 당황하는 내 새끼를 보며, 계속해서 놀자는 내 아이의 물음에도 여러번 대답하지 않고 무시하는 그 아이의 행동을 보며, 결국 그 아이와 떨어져 혼자 놀던 내 아이를 보며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아이와 융합되어 있구나를 느꼈다.

나는 넌지시 아이에게 물었다. 그 친구의 무엇이 좋은지. 아이는 친하고 좋은 친구라 대답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저 내 아이를 노는게 너무 좋아서 자신이 무시당하는 불편감도 못알아차리는 순수하고 착한 아이라 생각했다.

마치 내 아이는 절대 선, 그 아이는 절대 악인 것 처럼.


그러다 깨달았다.

정작 본인은 아무런 불편감이 없는데 엄마인 내가 마치 아이가 된 듯 그 상황에서 강한 불편감을 느끼고 있음을.

내가 아이가 된 양 아이의 감정을 대신하고 있음을.


아이와 나를 분리하여 독립된 개체로 인식하지 않고 과도한 이입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것을 깨닫자 나는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여지고 그 아이에게 씌워놓은 선글라스를 벗어던지고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팔땡이 조금이라도 정서적으로 상대적 위치가 낮아진다거나, 조금이라도 소외를 받는다거나,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는 상황이 오면 강렬한 불편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는 팔땡의 문제도, 상대 아이의 문제도 아닌 내 문제임에 분명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문제일 때도 있다. 아직 어리기에 사회적 기술이 부족하여)


나는 소외와 무시에 상당히 민감했다.

사실 이번 일을 겪으며 나는 아이의 모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아이의 모임에 왜 나가는 것인가.

아이가 좋아하니까 였다.


사실 내게 있어 상대 아이들의 즐거움보다도 내 아이가 즐거움에 더 초점 맞춰 내 아이가 원하기에 모임에 집착적으로 나가던 부분이 있었다.

이는 확실히 나를 위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엄마들이 나오지 않더라도 친구들을 내가 대신 돌보며 아이에게 놀이상황을 제공하는 것 또한 좋아했고 자주 해 왔다.

때론 엄마들이 나오지 않는 그 상황이 더 편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팔땡이 최대한 긍정적 감정을 많이 느낄 수 있길 바라고, 부정적 감정은 적게 느끼길 바랐다.

팔땡의 긍정적 감정을 위해 나는 과도하리만치 모임과 놀이상황에 집착했고, 아이가 모임에서 부정적 감정을 느낄 때면 과도한 방어태세가 올라오곤 했다.(물론 티는 안냈지만)


내게 있어 모임은 도구에 불과했다.


또한 나는 모임을 만드는 걸 참 좋아한다.

모임을 만들려고 작정한게 아닌데 어쩌다보면 이 사람, 저 사람 연락하여 모임을 크게 부풀리곤 했다.

내게 있어 이는 자원을 의미했고 나도 모르게 민감하게 느끼던 소외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것 같다.


사실 아무도 내게 소외감을 느끼게 행동한 적이 없다. 하지만 별 것도 아닌 일에 섭섭함과 소외감을 느끼곤 했다.


내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약속이 생기면 늘 주변 엄마들에게 너도 갈래 너도 갈래 물으며 챙기는 것이 내게는 중요한 일이었나보다.

나의 애정은 책임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리고 나의 무리 중 그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게 나는 모두를 끌어모으고, 혹여나 모임에서 구석에 조용히 있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챙긴다.

이러한 책임감이 나의 애정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모임이 생겼을때 나를 부르지 않으면 나는 큰 서운함을 경험하곤 했다. 우연히 만나 커피를 마셨을 수도, 아니면 그의 성향이 일대일의 모임을 더 선호하여 부르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임에도 나는 소외감과 섭섭함을 느꼈다.


내게 있어 애정은 책임감이다보니

그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 것이 내게는 엄청나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나를 애정하지 않고, 나를 무시한다는 느낌을 받은 거다.


그들이 느끼고 표현하는 애정은 또 다른 것일 수 있는데, 내가 경험하고 표현하는 애정 방식에 커다란 의미를 두다보니 그러하지 않는 상대에게 강한 적개심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소외감과 무시감의 이슈를 무의식 중에 가지고서 아이와 아이들의 관계에서 소외감과 무시감을 느낄 법한 상황이 오면 마치 내가 그 감정을 느낀양 강렬한 불안과 불편감이 솟구치곤 했다.


정작 내 새끼는 전혀 불편하지 않은데, 내게 있어 큰 의미를 가지는 행동들이다보니 나에게만 도드라져 보여 타인을 영악하고 주장적이고 통제적이라 명명하며 적개심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건 명백히 나의 이슈이고, 나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겪으며 깨달았다.

내가 소외감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또한 내 아이가 소외될까 모임에 집착적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이전까진 그저 핵인싸 오지라퍼 관종 정도로 생각 했다면, 단순 파워E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어떠한 것을 보호하기 위한 나의 생존전략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조금씩 모임에서 멀어져 보려 한다. 물론 그들을 등지거나 차단하겠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아이와 덜 친한 친구들이 있는데도 굳이 나가려 한다거나, 학원을 종종 빠지고서 친구들과 놀게 한다거나, 많은 돈을 써가며 (주로 키카에서 만나서) 모임에 참석하는 등 다소 역기능적이었던 행동을 의식적으로 수정하고 적당히 만나고 적당한 경계를 갖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소외감 역시 적당히 경험하는 것 또한 필요하다.

인간은 절대 외로움이란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형제가 없어 외로울까봐 둘째를 낳아준다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연애를 하고 있어도 외롭고, 형제가 많아도, 주변에 사람이 많아도 외로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지 말고, 이젠 있는 그대로 소외감을 느껴봐야겠다.


또한 소외감을 외부로 부터 채우려 하지말고,

좀 더 남편과 팔땡과의 가족 안에서 채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모임에 나가느라 가족의 해체가 자주 있었는데, 나와 남편 역시도 워낙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원가족 사이에서 자라와서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외부로부터 채우는 소외감이 아니라 가족으로부터 채울 수 있길 바래본다.


이제는 더이상 팔땡과 그 친구와의 관계를 지켜보기가 불편하지 않다.

친구 사이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안맞으면 자연스레 멀어질 것이고,

잘맞으면 계속해서 친구로 지낼 것이다.

아이는 스스로 알아서 잘 해결해 나갈 것이고

도움이 필요하다면 분명 나에게 요청할 것이다.

나는 아이를 믿는다.


결국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시작되고,

모든 해답은 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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