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상담을 하다 역전이를 크게 경험을 했더랬다.
내담자가 아닌 내담자의 보호자에게.
물론 대상관계에서 이야기하듯 역전이는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치료자가 알아차리고 치료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 나도 100프로 동의하는 바.
하지만 이번엔 '알아차림'까지는 되었으나, 투사적 동일시를 알아차렸음에도 결국은 끌려가 상대가 유도하는 방향으로 반응을 해버리게 되었다.
단순 투사적동일시라면 뭐 돌아보고 수정하면 그만이나
이번 투사적 동일시는 좀 심각(?) 했더랬다.
내담자의 보호자에게 상담 과정에서 화가 치솟았다.
보호자의 태도가 매우 적반하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계속 치료자 탓을 하는 것, 무엇보다 내담자를 돕고픈 나의 의도와 전문성을 완전 짓밟는 느낌이 들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당시에도 즉각적으로 신체적 각성을 느꼈고, 역전이가 올라옴을 알고는 있었다.
아 지금 점점 게이지가 차오른다. 빡치려고 한다. 진정하자. 내담자의 보호자다. 내담자를 위해 진정하자. 우리의 협력이 내담자를 진정으로 도울 수 있다.
마음으로 계속 가다듬었지만 30분간 계속되는 치료자 탓과 치료자의 의도를 묵살하는 태도에 점점 빡이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러셨군요. 그렇게 느껴지셨군요. 유감이네요. 어머님. 하면서 모든 의견을 수용하고 공감하며 나의 입장도 잘 설명을 했으나
내가 수용하면 할수록 더더 과해지는 상담사 탓에 갑자기 머리에 삔트가 어긋난 느낌.
진짜 말 그대로 그.라.데.이.션 분노를 느꼈다.
상담사로서 하지 말았어야할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원하는게 뭔지 질문을 했다.
삐딱한 마음으로.
보호자는 원하는 바를 명확히 말하지도 않는다.
그저 상담사의 견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내 탓을 해댄다.
그래서 원하는 바가 뭔지도 말을 안하면서 어쩌라고 하는 맘이 올라왔다.
참다참다 나 역시 삐딱한 태도로 이야기를 했다.
자세한 내용은 쓰지 않겠다.
내담자의 프라이버시가 담겨 있으므로.
결국은 보호자의 평소 대인관계 패턴에 휩쓸려 그의 주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나 역시 보여버렸다.
한편으로는 당신이 그러니 주변인들과 사이가 안좋지 라는 생각까지 들면서.
그렇게 나 역시 분노를 표출했고,
그럼에도 그마저도 분노를 자제했다.
평소같은 폭발성 분노는 아니었고
한켠의 이성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상담이 끝났다.
다행인건 내담자가 밉지는 않았다.
내담자를 여전히 애정했고, 내담자를 여전히 돕고 싶었다.
그렇게 보호자와의 상담이 끝났고,
상담이 끝난 후 가만히 맘을 들여다봤다.
명백한 역전이였다.
그리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상담사가 역전이에 끌려갔다.
멈추어야 함을 머리는 알고 있었지만,
보호자의 태도가 나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고
이성보다는 감정이 이를 이겨먹고 발끈 해버렸다.
그리곤 바로 내담자의 보호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나의 태도에 대해 정중히 사과를 했다.
아무리 내가 기분이 나빴어도 상담사로서 잘못된 태도였다. 죄송하다. 그리고 내담자를 위해 좋은 협력자가 되고 싶다며 무례한 태도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를 했다.
당시에는 바로 풀지 않으셨지만
이후 마음이 풀리셨는지 다시 편히 연락을 주고 받게 되었다.
그리고 2주가 지나 이 보호자와 다시 한번 다른 문제로 트러블이 생겼다.
상담을 하며 한번도 내담자나 보호자와 트러블이 있었던 적이 없었는데, 참 이상하지.
이 보호자와는 계속해서 트러블이 생긴다.
나의 어떠한 부분이 이 보호자의 무언가를 건드리고
이 보호자의 어떠한 부분이 나의 무언가를 건드린다.
서로의 민감함을 건드리는 케미스트리가 있다.
좋은 의미가 아닌 부정적인 케미스트리.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가 끌어들이는 에너지가 있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나는 세상 선하고 좋은 유능한 상담사로서 작용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세상 무능하고 나쁘고 이기적인 상담사로서 작용한다.(물론 그 보호자의 생각이라 내가 명확히 알진 못한다.)
그리고 내 역전이를 끌어내는 무언가가 그 보호자에게 있고,
그 보호자의 역전이를 끌어내는 무언가가 내게는 있었다.
다시 한번 부딪히는 상황이 생기며 나는 또 점점 분노가 끌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래도 다행인건 상담 중이 아니라 연락을 주고 받는 상황이었기에 급히 수퍼바이저에게 연락을 취했다.
선생님. 제가 역전이로 상담에 지장이 생기고 효과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급히 상담이 필요합니다.
상담사의 윤리와 관련된 상황이기에 급히 상담사에게 실례인걸 알면서도 롸잇 나우에 급하게 상담을 받아야 한다고 요청을 드렸다.
다행이 수퍼바이저선생님께서 30분 후 바로 비대면 상담을 진행해주셨고 내담자에 대한 투사적 동일시를 바로 다룰 수 있었다.
나는 타인을 돕는 것에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돕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내게 양가적인 모습이 있는데, 타인에게 세상 순하고 선한 사람이면서도 다 퍼주려고 하는 헌신적인 사람이면서도 나의 특정한 무언가가 건드려지면 세상 날카롭고 공격적인 면모로 변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나는 나의 양가성에 종종 혼란을 느끼곤 했다.
나의 기억에 나는 찌질하고 소심한 모습을 보이는 나와, 또 한편으로는 활발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가진 나 혹은 착하고 헌신하는 나와, 또 다른 한편에는 이기적이고 공격적인 나의 모습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
물론 사람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라 그 양가성에 혼란을 경험하곤 했다.
무엇이 나인지, 나를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타인에 대한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을 할 때에 나는 타인에 대해 과도하게 돕고 싶어하고, 퍼주고 싶어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껏 생각해보면 나는 타인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타인이 요구하지 않아도 나서서 타인에게 손길을 내밀곤 했다.
예를 들면 아이의 친구 부모님이 맞벌이라 방학동안 아이를 봐줄 곳이 없어 내가 방학 내내 아이 친구를 돌보기도 했다. 그들이 내게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혼자 있을 아이가 걱정이 됐고 걱정할 부모의 마음도 너무나 이해가 됐기 때문에.
그뿐이랴, 시키지도 않은 도움을 여기저기 주고 다녔는데 그것을 다른 말로 오지랖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그랬다. 어찌보면 착하고 선한 사람,
어찌보면 희생적이고 헌신하는 사람,
또 어찌보면 오지라퍼에 참견적인 사람,
또 어찌보면 책임감이 넘치다 못해 타인에 대한 책임도 대신하려는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주변엔 의존인들이 넘쳐났다.
내게 기대하고 의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아마도 결혼 역시 그리 하게 되었지 싶다.
책임지고 싶은 나와, 묻히고 싶은 남편의 원트가 서로를 끌어들인것 같았다.
그러다보니 어릴 때부터 리더의 역할을 자연스레 떠맡았다.
내가 나서서 맡은 반장, 부반장 뿐만 아니라
나서지 않아도 주변의 추천으로 매년 리더의 자리를 맡았다.
심지어 비행을 하던 학창시절 조차도 나는 반장 역할을 했으니 말 다했지.
성인이 되어서도 회사에 입사를 했을 때 신입생 교육에서 수십명의 신입생들의 투표로 장을 맡게 되었고,
상담을 할 때도 자원봉사에서 장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책임을 맡는 입장에 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책임은 가만히 있는 날 다른 사람들이 그냥 추천하고, 권하진 않았을 것이다.
나의 헌신과 희생, 타인을 향한 손길에 타인은 내게 이상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기대를 심어주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우리 엄마처럼..
나는 엄마에게 자주 말했다.
엄마, 왜 아들도 가만히 있는데 엄마가 나서서 할머니를 모시려해?
엄마, 다른 며느리도 안하는데 왜 엄마가 나서서 가족을 다 챙겨?
엄마, 내가 도와달라하지도 않았는데 왜 나서서 도와?
엄마, 아빠의 무능력함과 무책임함에는 엄마의 책임도 커.
엄마는 타인에게 헌신하고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생활력이 강했고, 늘 솔선수범했다.
내가 보기엔 왜 사서 고생하나 싶은 것들 투성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사람들은 기대를 했다.
엄마 역시 회사에서 장의 역할을 맡았다.
본인이 원해서가 아닌, 사람들의 추천으로.
아빠는 엄마를 믿고 사업들을 벌렸다고 한다(그리곤 여러 번 말아먹었다).
엄마의 시댁식구들은 엄마에게 이상한 기대감이 있다. 명절이나 집안 행사들.
그리고 나 또한 엄마에 대한 기대가 있다.
무리한 부동산 투자나, 이사 등에 안되면 엄마가 돕겠지라는.
그렇다고 엄마가 부자도 아닌데, 엄마도 한번을 쉬어보지 못하고 고된 일만 한 사람인데.
그리고 그 기대는 사람들이 괜히 갖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그것을 끌어들이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엄마는 사람들에게 헌신하고 솔선수범 함으로서 이상한 기대심을 심어줬다.
그녀의 이미지는 강인하고 책임감있고 신뢰감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나는 똑 닮아버렸다.
글이 길어져서 다음에 이어서 쓰겠음.
다시한번 말하지만 이는 나의 역전이, 투사적 동일시에 대한 이해이다.
오랜만에 브런치에 돌아왔는데
처음부터 싸움 글이라니 !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