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디김 Oct 06. 2023

20년 만에 만남, 2시간 30분을 가볍게 와준 친구

20살에 가까워 헤어진 친구를 40이 가까워 다시 만났다. 만난 사연 또한 특이한 편에 속한다. 이번 여름휴가에 목포로 여름휴가를 떠난 친구가 '목포의' '어느 숙박시설'에서 '나와 유일하게 연락이 되는 친구'와 '엘리베이터'에서 딱 만난 것이다. 참으로 우연이 이리도 겹칠 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이 정도면 온 우주가 만나길 희망하고 연결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친구는 그 친구에게 내 연락처를 물었고, 그리고 그 후에 바로 나에게 이어졌다.  


우주가 만나게 해 준 친구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매우 친했던 친구였다. 이 친구는 고등학교 때 전학을 갔는데 방학 때 친구를 보기 위해 멀리 이사 간 친구 집에 가서 자고 온 적도 있다. 친구는 이사 간 첫 해 맞이한 내 생일에 파란색 '리복' 운동화를 보내주었는데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파란 운동화'가 잊혀지지 않는다. 그 친구와는 서로 문제인 아버지 얘기를 나누며 공감하며 깊은 사이가 되었다. 우리 둘은 많은 부분 다른 면이 있었지만 '단순한 면'에서는 깊이 통했던 것 같다. 그 단순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뭔가 얘기를 하면 동시에 웃음으로 끝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웃음 포인트가 딱 맞아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둘이 대화를 하지 않고 옆에 있어도 누군가 얘기를 할 때 둘이 속으로 웃고 있다는 확신, 뭐 그런 것이다.


우리는 많은 부분 달랐다. 한 가지 단편적인 예를 들자면, 나는 매일 숙제를 해 가는 편이라면 그 친구는 쿨 하게 안 해가는 편이다. 우리 담임은 학생주임 선생님으로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분이었다. 검을 차고 다니는 무사처럼 항상 '매'를 차고 다니셨는데 참으로 잘 어울렸다. 지금 생각하니 그 매가 없었다면 뭔가 어색했을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는 이 분과 무려 3년을 같이 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나의 담임선생님이셨다.


2학년 때인가 매일 짧은 일기를 쓰는 숙제가 있었다. 매일 아침 일기장을 걷어서 선생님께 제출하는데 어느 날 에는 선생님께서 내 일기를 읽게 하셨다. 일어서서 일기를 읽었고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내가 일기에 적은 내용은 얘기하기도 부끄러운 다소 몽상적인 얘기로 기억된다. 어떤 무술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그런 것을 보고 하늘을 날면서 무술 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나도 무술을 연마하여 날아봐야겠다, 그런 식의 헛소리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학구열 폭발하는 담임선생님께서는 '공부자극 명언'등을 자주 인용하며 긴장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하길 즐기셨다. 이 날 아침은 그 긴장을 다소 풀어보고자 했던 것 같다. 일기를 읽게 한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 그 짤막한 일기들을 건조하게 걷기만 한 줄 알았는데 선생님께서 일일이 읽으신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선생님께 장난 섞인 핀잔을 듣고 웃음으로 아침을 맞았던 그날이 떠오른다. 나를 항상 '뺀찔이'라고 부르며 나의 '부족한 열심'을 독촉했던 그 무서운 담임선생님이 나는 가장 보고 싶다. 선생님 옆구리의 그 매가 애정 가득한 매임을 아는 까닭이다.


공포의 선생님은 매일 '깜지'(요즘에는 어떤 식으로 부르는지 모르겠다.) 검사를 했다. 그것을 완성해 가지 않으면 정말로, 정말로 세게 얻어터졌다. 나는 매일 아침 친구가 숙제를 안 해와서 맞는 것이 걱정이었는데 그 친구는 맞아도 별로 아프지 않은지 정말 쿨하게 안 해왔고, 쿨하게 맞았다. 나는 맞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편으로 숙제든 뭐든 무조건 해갔다. "제발 숙제 좀 해 와라. 아무거라도 대충 써~!" 나만 숙제를 해가고 친구가 안 해 온 것을 확인할 때면 내가 더 조바심을 내었다. 깜지 외의 모든 숙제에 대해서도 일관된 태도를 취하는 겁 없는 나의 친구. 내 노트를 친구의 책상에 들이밀며 잽싸게 베껴내기를 독촉해도 그 친구는 속도를 내는 법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친구는 맷집에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한 것 같다. 맞는 것만 봐도 아픈 나와는 달리 그 친구는 표정에 변화가 거의 없었다.

두려움이란 없었던 이 친구와 이어폰을 양쪽으로 나눠 끼며 야간자율 학습을 하고, 쉬는 시간 안에 매점에 다녀오기 위해 쏜살같이 뛰던,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고 킥킥거리던 푸릇 기억이 난다.


어찌 됐건 그 친구와 어른이 되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연락이 끊겼다. 명확하지 않으나 아마 내가 연락처를 자주 바꾼 탓도 있었다. 어른이 되고 나는 복잡스러운 상황들과 맞닥뜨렸고, 스토커를 만나기도 했다. 스토커 얘기를 하자면 군대에서 나를 소환하러 올 정도로 다소 스펙터클 한 얘기가 있는데 언제 한번 얘기할 기회가 있기를.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학창 시절에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반강제적으로 만나던 친구들이 없어졌다. 친했던 친구, 존재만 알았던 친구, 무서운 선생님, 이상한 선생님, 하루를 가득 채웠던 수많은 과목들과 각종의 시험들, 그 모든 강제적인 것도 함께 사라졌다.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 연연하는 사람도 아니고, 여럿이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는 외향적인 듯 보이나 내향인이었고, 먼저 끌어내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그런 약간의 은둔형의 사람인 듯하다. 여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정을 나눌만한 동성친구라든지 그런 것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요 근래에는 갑자기 '친구'라는 존재,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가 내 마음 한편에 자리하더니 점점 크기를 더해갔고, 가끔은 그 향수의 공간에서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우주가 친구를 연결시켜 준 것이다.  


아무리 친했던 친구라도 그 많은 시간을 건너 만나려고 하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우리는 교복을 입고 수다를 떨던 그 여고생의 모습으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서로에게 대화하는 법을 잊지 않았을까?

그리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항상 생각한 것이지만 나는 여느 여자들처럼 사사로운 일을 서로 나누는 것에 서툰 사람이다. 한마디로 여성스러운 수다본능이 떨어진다. 가십거리나 개인사를 속속들이 얘기하는 것에도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친구와도 그러지 못할까 두려워한 것이다. 이미 나는 그 예전의 내가 아니었고, 친구와 나 사이에는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한 시간이 이었고 그 시간들은 우리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친구가 생각하던 예전의 나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 친구가 그러하든지.   


하지만 나의 이런 걱정은 말 그대로 기우였다. 친구와 나는 20년 동안의 사건 사고들을 빠르게 요약해 얘기하고는 일상적인 얘기들과 생각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있었다. 언어들은 정제의 과정을 거치느라 뇌에서 머물던 시간들이 줄었고, 대화는 가볍고 편안했다. 그리고 20년 전처럼 쓸데없는 얘기를 계속하고 실없이 웃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놀라움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머리 가득하게 '생각'이라는 것을 가득 채우고 지내왔는데, 그리 생각이라는 것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그때도 생각이 많았지만 지금에 비하면 그때는 '생각이 없는 것'이었음을 그때는 몰랐었다.)  


그리고 친구도 변함이 없었다. 변함없이 허술했다. 나는 전날 친구에게 집 주소를 알려주고 여기까지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다. "1시간이면 갈걸?" 하고 가볍게 얘기하는 소리에 "조심히 와~"하고 가볍게 응답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한 시간 이상 지체되었다. 이유는, 친구가 다른 비슷한 지명을 내비에 찍어 넣어 무려 한 시간 이상 더 걸려온 것이다. 친구는 나에게 내비를 잘 못 찍었다며 "내가 좀 허술하잖아." 하고 웃으며 얘기했는데 나에게는 그 실수가 '안심'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역시나 한결같이 허술하네." 하며 같이 웃었다. 그 웃음은 우리가 변하지 않았음을, 나이는 먹어 몸은 예전과 달라졌지만 마음은 여전함을, 그런 것들을 얘기해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그동안 밀린 얘기를 했고, 그리고는 쓸데없는 얘기를 하고 팔짱을 끼고 아래층의 마트를 구경했다. 고등학교 때 매점에 가듯.


친구가 돌아갈 때 또 내비를 잘 못 찍지는 않을까 확인하기 위해 운전석 차창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비의 도착시간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2시간 30분이 넘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너 북한에서 넘어왔어?!" 하고 물었다. 친구는 게이치 않고 "괜찮아, 나 운전 좋아해, 금방 가." 하는 것이었다. 친구는 왕복 5시간 이상의 거리를 나와 점심 한 끼를 위해 달려와주었다.  2시간이 넘어가면 매우 먼 거리로 여기고 여행조차 가기를 꺼려하는 나로서는 매우 먼 거리에 속했다. 우리는 서로 가까운 거리에 살지 않음을, 자주 만날 수 없음을 알았지만, 그래도 '자주 보기'를 약속하며 헤어졌다.


친구가 돌아가고 나는 그동안 나에게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런 감정들을 다시 느꼈다. 실속 없는 말을 하는 것, 말없이 한동안 있어도 그리 많이 어색하지 않은 것, 특별한 대화거리가 없어도 만날 수 있다는 것. 너무 오랫동안 그런 것들을 잊고 내 삶의 문제만 붙들고 살아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깊이 사귄 친구랑 하는 쓸데없는 얘기는 쓸데없는 시간이 아니고 나의 휴식 시간이 되는구나. 마음이 편안해진다. 헤어짐이 아쉽고 다시 보고 싶고, 낙엽이 지면 같이 낙엽을 밟고 싶고, 꽃이 피면 꽃을 함께 보고 싶은. 좋은 것은 함께 보고 싶은, 그런 마음들. 참으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마음이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해가 질 때 아마도 나는 친구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신사임당이라 부르는 아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