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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ssica Kim Jul 16. 2020

D-DAY

안녕.. 그리고 안녕?

드디어 디데이가 눈앞에 다가왔다.


센치해진 마음으로 누가 살짝이라도 건들면 톡 하고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나름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는데 난생처음 한국을 (그것도 혼자!) 떠나는 것이라 자꾸만 뭔가 빠뜨린 게 없나 불안하고 두려웠다. 다 입지도 않을 필요 없는 옷가지와 신발, 생필품 등을 초대형 캐리어에 빈틈없이 꽉꽉 채워 넣었다.  누가 보면 무인도로 이민 가는 줄 알겠다....  

이것이 바로 초보 여행자의 정석.


가족들이 모두 인천공항까지 그 먼 길을 동행해 주었다. 

나는 국비지원프로그램을 통해 필리핀, 호주 연계코스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담당 인솔자가 공항에 나와있어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모여 간단한 설명을 듣고 체크인을 하러 갔다.

그 때 당시 체크인 수화물이 23킬로까지 가능하다는 걸 알 리가 없었고, 저울에 올라간 내 과체중 캐리어는 이미 32kg을 찍고 있었다.

그냥 숫자가 앞뒤로 바뀐 셈 ^^; 


다행히 가족들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긴급으로 이것저것 10킬로 정도 빼서 그들에게 짐들을 넘길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불안해서 식은땀이 나고 있었는데 시작도 전에 이런 불상사가!

 내 몸에서 10킬로가 영혼과 땀으로 빠진 느낌이었다.


이제 정말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그렁그렁 눈물 맺힌 엄마의 눈을 보니 그간 씩씩한 척 연기해오던 것이 단 한순간에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큰소리치면서 잘 다니던 회사도 때려치우고는 가지 말라고 말리는 가족, 친구들을 뒤로하고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전혀 가보지 못한 길을 간다는 게 솔직히 두렵고 자신이 없었다. 마음이 한없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나는 지금 공항에 와있고 모든 것을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입으론 미소 지었지만 이를 꽉 깨물고선,  한없이 슬픈 눈으로 가족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공항 검색대로 들어섰다. 




무사히 비행기를 탔고 정신없이 있다보니 어느덧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도착해있었다.

외국 공항은 어떨까 늘 궁금했었는데 내리자마자 공항에서 느껴지는 습기와 열기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공항 시설이 전 세계 1~2위를 다툰다는 사실을 알리 만무했고, 나는 마닐라 공항에 도착함과 동시에 그 사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꼈다. 


일단 공항 밖을 나와 현지 인솔자와 함께 우리를 픽업할 차량을 기다렸다. 

밤 10시 늦은 시각. 그 사이 화장실에 갔는데 변기커버가 없었고 휴지도 없었다. 

한국 가정에서 남자들이 소변 보고 커버 안 내린다는 이유로 싸우는 커플들을 많이 봐왔는데 필리핀에서는 그런 싸움이 불가능하겠다. 아예 없으니까... 마치 과거로 돌아온 기분이랄까? 지린내도 진동을 하고...


내가 여태껏 평소에 가진 것들을 너무 당연시 여기고 살았던 것 같아 갑자기 조금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벌써부터 한국이 그립다. 

지금 나는 휴대폰도 없고 가족, 친구도 없고 집도 없고 변기커버도 없는 타국의 화장실에서 휴지도 없이 볼 일을 봤다.


서글퍼진다.. 공항 밖에서 픽업 차량을 기다리는데 피부가 까무잡잡한 마르고 키가 작은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다. 괜히 무서워진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총기사건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보고 겁에 질려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공항 경찰관과 보안요원들이 커다란 총을 메고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누가 봐도 한국인스러운 나를 신기한지 계속 쳐다봤다. 나는 위축되었고 그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두 시간 정도 기다렸을까?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안은 에어컨이 너무 빵빵하게 작동 중이라 바깥과 온도차이가 심하게 나서  너무 춥게 느껴졌다. 스웨터를 입고도 덜덜 떨었다.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는 바기오. 마닐라에서 북서쪽으로 250km떨어진 해발 고도 1,500m 인 고원에 위치한 곳이다. 필리핀 하면 무더운 해변가를 생각하기 쉬운데 필리핀도 땅이 꽤 크기 때문에 여러 가지 지형과 그에 따른 기후가 존재한다.  우리는 7시간 정도를 달려 동이 트는 새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거리를 달려 이 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마닐라공항에서처럼 후덥지근한 날씨를 예상했는데 이게 웬걸? 바기오의 새벽 공기는 선선하고 상쾌했다.

자연 에어컨 바람이 따로 없다. 기분이 좋아졌다.

기대치가 낮으면 실망 대신 서프라이즈를 선물로 받게 된다.


구불구불한 언덕 제일 위쪽에 내 목적지가 있다. 리조트를 어학원으로 개조해서 그런지 꽤 럭셔리해 보였다. 

지대가 높아서 종종 구름이 안개처럼 끼곤 했고  때로는 우리가 구름 위에 있기도 했다.


대학 오티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설렘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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