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노랑 Dec 06. 2023

나는야 삐뚤빼뚤 경험주의자

탄탄하고 넉넉한 대로(大路)를 품은 사람

“이 사람, 진짜 단단한 사람이에요.”


서로 고민을 털어놓던 중 무심코 후배가 날 표현한 한 마디. 이 말에 동조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 분명 기분이 좋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참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날의 방황과 자기 부정이 머릿 속을 빠르게 스쳐 갔다. 최근 3년 간 나는 단단한 바위 보단 나부끼는 강아지풀에, 튼튼한 표지판 보단 휘청휘청 돌아가는 바람개비에 가까웠다. 


어느 지방 소도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머리를 가진 덕분에 운 좋게 서울이라는 큰 세상을 빨리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정말 운이 좋은 것이 맞긴 한건지, 시골 소녀의 눈은 점점 높아져 갔고 남의 떡은 더 맛있어 보였다. 그렇게 이것 저것 남들 하는 건 죄다 쫓아다니기 바빴다. 20대 후반이 되자 타인의 경험에 대한 관심은 서서히 '부'로 타겟을 옮겨갔다. 주식, 코인, 부동산, 그리고 블로그, 유튜브, 스마트스토어까지.. 사람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또 바삐 쫓아다녔으나 진득한 고민 없는 불나방 같은 투자와 사업은 결국 화려하게 불쇼로 끝나고야 말았다.


어느 날 문득 손바닥을 내려다보니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허탈했다. 정말 이게 다인가. 싶던 찰나, 생각지 못한 깨달음이 우연한 순간에 스며들었다. 첫 번째 깨달음은 이것 저것 찍먹했던 경험 덕에 잡학박사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비공식 학위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단연코 모든 종류의 첫 대면식이다. 팀에 전배 오는 신규 인력을 맞이하는 첫 날,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하는 첫 날, 심지어 소개팅 자리에서도 모든 경험이 빛을 발했다. “오, 저도 그거 알아요!” 이 마법의 한 문장은 처음 만난 현대인 사이 흐르는 어색한 공기를 삽시간에 뒤집기 놓았고 여기에 내 경험까지 한 스푼 곁들인다면 상대의 마음은 스르르 녹아 내렸다.


두 번째 깨달음은 내가 어느덧 내 취향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20대 초반 EDM 페스티벌을 좋아하던 나는 어느새 인디 음악 페스티벌을 더 선호하고, 여행 취향에 있어서는 화려한 도시의 불빛보다 압도적인 대자연의 풍채에 끌림을 느낀다. 물감보단 색연필, 피아노보단 우쿨렐레, 스윙댄스보단 힙합댄스. 여름엔 록시땅 버베나, 겨울엔 몰튼 브라운 진저 릴리 바디워시. 자기 취향 권위자가 되어 일상 속 작은 틈에도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이 쏙쏙 숨겨두었다. 집-회사를 왔다 갔다 하는 도돌이표 같은 삶이지만 잠시 숨 돌릴 때 만나는 우연한 작은 불씨들에 다시금 가슴이 따숩게 데워진다.


이제 내 정체성을 ‘경험주의자’로 당당히 정의하고 있다. 그동안 스스로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줏대 없는 사람이라 폄하했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줏대 없음이 내 세상을 무한히 확장 시켜 주었다. 여기서 한 술 더 떠보자면, 이 모든 것이 결국 내 자유의지와 실행력의 산물이 아닌가. 강남도 압구정도 친구 따라 갔다 왔다지만 사실 그냥 가만히 집에 앉아 뒷모습이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어도 인생은 무탈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땅따먹기 하듯 기어코 부지런히 쫓아가 발도장을 쾅쾅 찍고 돌아왔다. 땅은 다질수록 단단해진다. 그간 부지런히 쏘다니며 튼튼히 다져 놓은 덕분에 취향이 바로 선 사람, 가치관이 단단히 자리잡은 멋진 어른이 되었다. 물론 그 버릇 어디 갈세라, 여전히 어디 재미난 것 없나 하고 두리번대기 바쁘다.


그렇게 서쪽으로 갈 때도 있고 어떤 날은 동쪽으로 이만큼 갈 때도 있다. 당장은 삐뚤빼뚤 해보일지 몰라도 먼 훗날 바라보면 나름 대칭을 이룬 넓은 길이 되어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탄탄하고 넉넉한 대로(大路)를 품은 사람. 지난 날의 방황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느끼며 지금 이 순간 불어오는 돌풍에도 기꺼이 웃으며 몸을 맡겨본다. 

작가의 이전글 [작가소개] 저는 '경험주의자' 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