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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d Feb 07. 2022

Bottletalk. 한 병 정도의 이야기. 11

nonfiction.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 

(nonfiction) Bottle 11.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 




너무 뻔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클리셰가 클리셰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와인에서 뱀파이어를 연상시키는 것 말이다. 오늘은 와인과 뱀파이어를 엮어 먹어볼 참이다. 그런데 왜 와인과 뱀파이어일까? 와인에서 붉은 피를 연상시키기는 너무 쉽다. 그렇다면 다른 점은 없을까? 많은 좋은 와인들은 오랜 시간을 버티고 살아 깊고 근사한 맛을 보여준다. 뱀파이어, 그들도 일단 오래는 산다. 깊고 근사한 맛이랄 게 그들에게 있을지 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클리셰 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오늘의 영화, 짐 자무쉬의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를 보며 마시기 위해 선택한 와인은 의외로 미국의 피노누아, 하트포드 러시안 리버밸리 피노누아다. 미국의 피노누아는 보통 단향이 느껴지는 밝고 소위 ‘양陽 ’한 맛이었던 기억이 났으므로 이 선택이 과연 괜찮은 것일까 또 고민했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으면 어울리지 않는 대로 재미있는 선택이 되리라는 생각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코르크를 열었다. 

나는 이전에 미국 러시안 리버밸리의 피노누아, 조셉 스완 피노누아를 마셔본 적이 있다. 너무 좋아서 마시고 난 뒤, 그 경험을 픽션으로 만들어 이 글 리스트에 써 올리기도 했다. 이번 하트포드 러시안 리버밸리 피노누아에서는 조셉스완에서와 비슷한 향과 다른 향이 동시에 풍겨졌다. 비슷한 느낌으로는 비에 젖은 나무와 낙엽, 물에 젖은 자갈 등이 있겠다. 하트포드 피노누아는 조셉스완보다는 좀 더 밝은 쪽에 속했다. 장미와 진한 체리, 초콜릿이 느껴졌으니까. 와인이 주는 달콤한 맛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달디단 장면들과 결을 함께 한다. 


이제 영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곧 우리는 영화 주인공들의 정체를 금세 깨닫게 된다. 뱀파이어. 인간의 피를 마시고 장수하는 그들이다. 와인과 엇비슷한 색의 피를 마시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쾌락을 누리는 표정을 지으며 각자 자리에 드러 눕는 뱀파이어 아담, 이브, 그리고 말로우의 표정은 얼핏 근사한 와인 향을 맡고 맛보았을 때 나의 표정과도 겹친다. 

아담은 디트로이트의 후미진 곳에 은둔하듯 살고 있는 우울증에 걸린 뱀파이어다. 그에게는 모로코의 탕헤르에 사는 와이프 이브가 있다. 아담은 병원에서 깨끗한 인간의 피를 사고 이브는 말로우를 통해 안전하게 피를 공급 받는다. 우울해 하는 아담을 위해 탕헤르에서 날아온 이브. 너무 오래 산 두 뱀파이어는 함께 차를 타고 한때는 번성했으나 공장들이 망하고 황폐해진 디트로이트를 달린다. 


이쯤 되었을 때, 다시 와인 잔을 코끝에 갖다 대 본다. 와인은 뒤로 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쿰쿰하고 짙은 음陰한 향과 맛을 드러낸다. 이제 맛을 본다. 처음 마셨을 때, 감각 기관 안쪽 끝까지 들이대는 듯 했던 단맛은 어느 정도 몸을 사렸고, 음한 맛과 함께 밸런스가 잡혀 우아하고 깊이 있는 맛을 낸다. 혀에서 휘발되는 가벼운 단맛보다는 짙게 남는 프룬의 맛. 아담과 이브의 사랑, 에술을 향한 책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어우러지는 맛이었다. 아담은 냉소적이지만 예술만큼은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 예술이 없었다면 이 긴 삶을 이겨내게 해줄 것은 없었으니까. 화끈하게 불타오르는 사랑보다는 오랫동안 지속시킨 근력있는 애정에 가까운 예술을 향한 사랑. 게다가 뱀파이어들의 어둑한 분위기와도 이 맛은 직관적으로 닮아 있다. 

그렇다면 초반의 양陽한 단맛은 무엇과 연결되었을까? 해답은 영화의 말미에 있었다. 나름의 체계가 잡혀 있던 그들의 조용한 삶은 이브의 동생 에바가 오며 금이 가고 만다. 결국 모로코, 탕헤르의 밤거리에서 자신들의 종말을 예감하며 떠돌던 아담과 이브. 두 사람은 한 연인과 마주친다. 누가 지켜보는 줄도 모르는 채 뜨겁게 키스하는 그들. 분명 삶의 의지도 다해가고 있었는데, 사랑하는 한 연인의 모습을 통해 아담과 이브가 보게 된 것은 현재의 사랑,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이었다. 아담과 이브가 본 그 연인의 사랑과 다시금 불타오르는 아담과 이브의 삶을 향한 욕망의 맛은 분명 와인의 양한 단맛과 닮지 않았는가. 음한 기운은 은은히 맛의 아래를 받치고만 있고, 삶과 사랑을 향한 욕망으로 불타오르는 붉은 맛.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나는 뱀파이어와 와인을 엮어볼 생각이었다. 이 미국 피노누아와 이 영화를 엮었을 때에는 흐릿한 이미지와 색감만이 있을 뿐 글을 위한 디테일한 키워드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사랑으로 와인을 읽어낼 수 있으리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뱀파이어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는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뱀파이어가 아닌 뱀파이어의 다양한 사랑과 우리 인간 역시 동조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만들어졌다. 사랑도 사실은 클리셰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와인에선 이만큼 어울리는 키워드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 영화를 본 이후, 같은 와인을 한 병 더 마셨고, 영화를 한 번 더 보았다. 그제서야 보이는 특정장면의 감정이 있었고, 그것이 불러들이는 와인의 맛과 향이 있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여러 사랑의 면을 읽어 내게 만들 수 있다니, 와인은 신기한 음료다. 다음 와인으로는 어떤 것을 또 읽어낼지 매번 기대하는 마음이 든다. 







와인 정보


Hartford Court Russian River Valley Pinor noir 2019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구매처 : 이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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