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브런치 봉작가 Jul 15. 2021

살아가다 벽에 부딪칠 때, 빙 돌아가는 길도 있다.


 현장에서 10년 이상 경력을 가진

아동발달 전문가이다.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지방 국립대학에서 공대를 다녔고,

전공은 전자공학을 하였다.  

그런데 난 공대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수학을 싫어한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일학년부터 수학정석을 다시 공부해야 했다.

그 당시에 고등학교 시절, 남자는 이과였고,

그냥 성적에 맞추어 학과를 정하였다.


20대 들어,

미래에 직업 대해 고민하였고,   

아나운서와 같은 방송인을 꿈꾸었다.

그건 고등학교 시절 방송반 활동을 한 경험 때문이다.

방송인은 동경이었고, 꿈이었다.

그리고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런 꿈을 꾸고  

군대를 제대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꿈에 접근하기 위해

그 당시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MBC 방송 아카데미 캠프에 참가하였다.  


첫 초빙강사 

당시 1세대 스타 MBC 예능 PD님이 셨다.

강의를 듣고 질의응답 시간,

수십 명의 수강생을 제치고, 손을 들고 쩍 일어나

그 스타 PD님께 질문을 하였다.  

"PD님이  보시기에

제가 방송인 아나운서로써 재능이 있어 보이나요?"

PD님은 나에게 앵커처럼 멘트를 해보라 했고,

현실적인 말을 하자면

사실, 아나운서로써 재능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차라리 PD를 해보라고 했다.

그때의 그 말은 꿈꾸는 20대의 꿈꾸는 청년에게

청천벽력 같은 절망의 말이었다. 반면 오기도 다.   

 

모든 질의응답이 끝나고,

다시금 그 PD분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드리고, 명함을 받고 싶다고 했다.

흔쾌히 그분은 나에게 연락처를 주셨다.

  

방송캠프가 끝나고

지방 집으로 돌아온 나는 며칠 뒤  

나는 다시 그 PD분께 연락을 드렸다.

그런 나의 꿈을 깨는 쓴 돌직구로 시작된 인연은  

   

23년 넘게 현재까지 연락을 하며

계속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 인연은 내 삶에 큰 자양분이 되었다.


현재 난 PD는 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직업에 있어

PD의 마인드로 일하고 있다.  


학부 대학 졸업을 일년을 앞둔 시점,

꿈에 대한 미련을 저버리지 못하고,  

대한민국에 월드컵이 있던 해, 2002년

방송사 언론고시에 도전해 보겠며,

창원에서 서울로 상경을 하였다.


일단은 영어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아.  

강남 어학원에서 가장 가까운 고시원에

1평짜리 방을 잡고,

 강남 생활을 시작하였다.

내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낯선 서울생활이였다.


기왕 시작하는 영어,

CBT 토플 영어로 시작했는데

영어 점수는 오르지 않았고,

그만 영어점수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그래도 지금까지 후되지 않는 건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광화문에서 빨간 티 입고 응원했던 추억들이다.

우승을 하던 밤에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하나였고

강남대로를 모두가 뛰쳐나와 환호하였다.

역사적인 순간과 장소에

나의 이십 대가 있었고, 그것으로도  만족한다.


일 년의 언론고시 고시원 생활,

MBC 방송사 시험을 받고,  

국어, 상식 시험에 좌절했고,  

딱 일 년을

고된 서울 생활을 경험하고

귀향하고 복학하였다.  


졸업을 하고, 

계속 방송사를 준비하려고도 했지만,

당시 운명처럼 급하게 취업을 해야 했고,

우연히 본 교차로의 취업 공고문을 보고,

운명처럼

복지관에 지원하고 취업을 하게 되었다.  


당시도 사회 전공자에 취업 자격이 있었던

복지관에 취업은 당시도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나의 대학생활의 경험에 대한

짧고 간결하게 쓴 이력서를 한장은 통해,

경영진에 호기심을 자극했고,  

백도 없던 난,

난 복지관에 첫 취업을 하게 되었다.

사회복지분야였다. 그것도 복지기획팀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난 사회복지가 전공이 아니었다.

반면에 그랬기에 모든 일을 경험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초석이 되었고,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심어주었다.   


아동부터 노인까지

관련 모든일을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남자 직원으로서 책상, 의자 옮기는 일부터,

복지 현장에 나가 대상자 분들의 이사 돕는 것부터,

서류일부터 온갖 잡일을 다 하게 되었다.

교육행정을 챙기는 모든 일들을 다하였다.


그래도 가장 의미 있고, 기억에 남는 건,

복지재단 산하의 아동시설 아동들,

쉽게 말해 고아원 아이들과  

여름날 바닷가로 수련회를 갔던 기억들이다.


당시 20대의 나는, 열정 가득했고,  

여름 바닷가 캠프에 가서는, 해변가 버려진 그물을 가지고

아이들과 그물로 물고기를 잡자고 하며

놀이를 했고, 아이들 눈높이의 나의 행동을

아이들은 참 좋아했다.


이런 재능과 적성을 발견,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장애아동 재활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의 필요성과 중요성, 비전을 느끼고,

직장 퇴근 후 마산에서 대구로

재활보건대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방송인을 꿈꾸었던 나는

학업과 일의 병행을 통해

언어재활사가 되었다.


세상에 필요 없는 지식은 없다.

공대 시절 훈련된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훈련은  

재활분야에서 임상 문제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객관화하는 능력이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아동의 문제점은 찾고, 분석하는데 큰 장점이다.


그렇게 쭉 이분에서 일하며, 다시금 심리 관련학 박사과정으로 진학하였고

이렇게 복지부터 재활분야까지 20년 가까운 시간을

현장에서 일해 오고 있다.


최근에는 아버지와 함께 체리 농사도 짓고 있다.

상담 재활과 농업이 무슨 상관이라 하겠지만,

사실

네덜란드와 같은 유럽에서는

일찍이 '케어팜'이라는

농업과 복지의 결합이 이루어져 왔고

최근 국내에서는 치유농업이라는 용어로

최근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올해는 치유농업사라는 자격시험도 이루어진단다.


작년부터

나는 아동발달 센터의 아동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특별활동으로 체리 따기와 숲 체험 프로그램도 함께 실시하고 있다.    


돌아보면

이십 대의 나도 많은 갈등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차이에서 오는 갈등

열심히 한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달리기에서는 포기하지 않았다.

군대 시절 마라톤 대회에서는

이등병부터 상병까지 쭉

우승 상을 받을 정도였으니깐,

그러나 밥을 먹고사는 업에 있어서는 달랐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벽을 만날 때가 있다. 

벽은 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 벽을 넘는 방법도 있고,

그 벽을 뚫고 가는 방법도 있고,

마지막으로 그 벽을 빙 둘러 돌아가는 방법도 있다.

무엇이 옳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오래 시간이 걸리든

짧게 시간이 걸리든

가면 되는 게 아닐까?


예전에 나는 PD와 아나운서에 대한 꿈이 있었고

그래도 더 노력해 볼걸 하는 미련은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유튜브라는 매체가 생겨났고,

그동안의 경험을 기반으로

그 오래 전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마음만 먹으면 나만의 방송국이 생겨나는 것이다.  


돌고 돌아 다시 원래의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시청률은 모르겠다.


마지막

고민하는 청춘을 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길은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순간에 좌절하지 말고,

벽에 부딪치면,

때론

빙 둘러 돌아가는 법도 있음을 

말하고 싶다. 


                                      By 봉작가

작가의 이전글 바람 불어 흔들리던 날도, 햇살 뜨거운 날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