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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과사자 Aug 04. 2021

로키산을 오른 다섯 살 다운증후군 소녀-1

콜로라도 Dream Lake

올해는 벌써 두 번이나 첫째 꽃과 둘째 사자를 데리고 로키산을 걸어 올랐다. 말 안 듣고 아직은 체력도 안 되는 다섯 살과 세 살, 그리고 마흔 살 남편을 어르고 달래며 오른 산. 육아하는 시간 외에는 소파나 침대에 등 붙이고 있는 우리 부부가 14kg 넘는 아이 둘을 짊어지고 등산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올봄에 갔던 베어 호수가 이 모든 일의 발단이었다.


우리가 사는 작은 타운은 미국 콜로라도 로키산 국립공원의 한 입구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가까우니 매년 가긴 했지만 로키산에 대해 잘 알지는 못 했다. 웬일인지 비슷한 계절에 비슷한 곳만 갔기 때문이다. 그중 한 곳이 바로 베어 호수이다. 해발 2880m에 위치한 주차장에 내려서 호수 한 바퀴만 돌아도 알파인 호수의 정취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라 로키산 하면 이곳이 생각났다.


예년과 달리 올해는 봄에 베어 호수를 가게 되었다. 사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카시트에서 내리겠다고 난리를 치다 결국엔 토를 하고는 잠이 든 찰나에 호수 주차장에 도착했다. 바람이 너무 차서 겨울 잠바를 입고 꽃만 데리고 호수를 보러 갔다.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쌓인 눈, 누군가 만들어 놓은 눈사람, 꽁꽁 얼어붙은 호수, 그 위에서 즐겁게 사진 찍는 사람들. 4월 말의 이곳은 아직도 제대로 된 겨울왕국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이 날따라 트레일 헤드 표지판에도 눈길이 갔다. 님프 호수, 드림 호수, 에메랄드 호수. 이름이 참 예쁘기도 하지! 자세히 보니 드림 호수는 1.7km라고? 알파인 호수 등반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미국에 사는 아이들에게 자연 체험만큼 쉬운 게 또 있을까. 초등학교 4학년이 되면 국립공원 무료 이용 바우처는 물론 스키장 혜택도 주는 나라 아니던가. 남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건 꽃도 하고 살 수 있기를 꿈꾸면서 운동만큼은 열심히 시켜온 터라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차로 돌아오는 동안 내 머릿속은 이미 드림 호수로 가득 찼다.


남편한테 빨리 가서 보고 오라고, 여기 너무 좋으니까 다음엔 드림 호수에도 갈 거라고 선언했더니 그게 어디냐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일단 베어 호수를 보고 온 남편이 다음이 언제냐고 물었다. “다음 주에 가자.” “다음 주? 그렇게 금방?” “눈 녹기 전에 가야지. 이제 5월인데.” 내가 너무 신나서 얘기하니 남편도 반대는 하지 않는 소극적 찬성을 했다.


일주일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우리는 5월 1일 토요일에 드림 호수를 오르기 위해 출발했다. Co-66을 타고 서쪽으로 가다가 라이언스를 지나면 US-36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꼬부랑 돌산길이라 사자의 카시트 탈출 시도가 시작되었다. 창문을 열어주면 훨씬 나아서 우리는 과하게 시원한 바람을 쐬며 달려야 했다.


야생 동물이 수시로 돌아다니는 에스테스 파크 한쪽 외곽에 로키산 국립공원 비버 메도우스 입구가 있다. 연간 이용권을 보여주고 통과해서 조금 가다 좌회전하면 베어 호수 주차장으로 가는 도로가 이어진다. 그 길에서 보이는 봉우리들만 해도 장관을 이룬다. “얘들아, 저 산에 눈 좀 봐! 음~ 여기 공기 너무 좋지? 오늘도 사슴 나왔는지 찾아볼까?” 꽃과 사자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 트렁크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마지막 점검을 했다. 눈밭에 뒹굴 걸 예상해서 스노 빕을 입히고 장화를 신겼다. 물과 간식도 적당히 챙겼고 방수 잠바도 준비했다. “꽃, 엄마랑 갈 거야 아빠랑 갈 거야?” 내 베이비 백팩 캐리어에 탈 아이를 정하기 위해 평소처럼 꽃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다.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되면 사자보다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몇 번 번복하더니 결국 엄마 당첨. 꽃은 내 베이지 색에 사자는 아빠의 초록색 캐리어에 앉았다.


먼저 걸어가다 트레일 헤드를 지날 즈음 남편을 돌아봤더니 왓? 샌들을 신고 왔을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산길이고 눈이 있는데? 애초에 이해가 되지 않아 입을 다물고 갔다. 걸음걸음 눈이 샌들로 들어오자 남편이 이 신발로 될지 물어본다. “안 되지. 지금이라도 갈아 신어.” “이미 너무 멀리 왔나?” 주차장을 돌아보며 이 말을 반복하다 더 늦기 전에 갔다 오기로 한다. 뜻하지 않게 나는 등산로에서 애 둘과 캐리어 두 개를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꽃과 사자는 애틋하게 아빠를 부르며 따라가다가 내 설명을 듣고 곧 이해하는 듯했다. 자기들 키만한 캐리어 옆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인사를 하니 사람들 기분도 덩달아 좋아 보였다. 하산객 한 명이 나서서 우리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기다림이 길어져서 등산을 시도했는데 질퍽한 눈길이라 쉽지 않았다. 꽃이 미끄러진 김에 다리를 찢으며 주저앉으니까 사자도 같은 자세로 장난을 쳐서 결국엔 일부러 주저앉기 대회가 되어 버렸다.


신발을 갈아 신고 돌아온 남편은 벌써 지친 얼굴이었다. 특효약 콜라를 따서 다 같이 나눠 마셨다. 각자 아이를 업고 다시 출발. 출발은 같았으나 남편이 점점 뒤처진다. 속도도 맞출 겸 꽃을 내려서 걷게 했다. 소나무 숲을 빠져나가자 반 정도 언 님프 호수가 나타났다. 꽃은 사자와 함께 꺅 소리 지르며 눈을 가지고 놀았다. 손 시리면 호 불라고 가르쳐주니 두 아이 모두 바로 따라 하는 모습이 참 예뻤다.


호수를 가로질러 다음 트레일로 올라서는데 한 등산객이 우리에게 눈길을 준다. “애들 데리고 산행하려고 트레이닝한 거예요?” “아니요, 저희도 너무 힘들어요.” “콜라도 매고 가네요!” “네, 콜라가 꼭 필요해서요.” 서로 한 번씩 웃고는 계속 드림 호수로 향했다. 좁다란 절벽길을 지나 모퉁이를 도니 탁 트인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지나온 님프 호수가 바로 밑에 보였고 5월의 산이 끝없이 펼쳐졌다. 국립공원 쪽으로만 눈이 남아 있었다.


거기에서 아이들과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여자가 우리를 보고 있다가 다가와서 정중하게 말했다. “아이들이 예뻐요. You have beautiful kids.” 꽃을 데리고 다니면 그런 눈빛과 말투를 가진 사람들을 한 번씩 만난다. 장애아라고 대놓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저 따뜻하게 봐주는 시선 말이다. 고맙다고 말하고 다시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미처 몰랐던 바윗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릿지 산행을 다녔던 나는 점점 흥분했다. 지난 몇 년간 미국으로 이주하고 애 두 명 낳아 키우느라 이런 곳에 올 생각도 못했는데 이런 날이 오는구나! 애를 두고 올 기회는 없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왔다는 게 기뻤다. 안전벨트를 이중으로 하고 캐리어에 앉아 있는 꽃도 시종일관 기분이 좋았고 뒤에서 사자가 환호하는 소리도 들렸다. 남편 얼굴엔 웃음기가 없었지만 그러면 어떠랴? 싫어도 해주는 것이 고마웠다.


바위를 오르고 나니 아이들도 걸을만한 길이 이어졌고 그 끝에 드림 호수가 있는 듯했다. 목적지로 걸어갈수록 하늘에 잔뜩 낀 구름이 조금씩 물러가더니 꽃과 내가 드림 호수에 먼저 도착했을 땐 태양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 우연마저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꽃, 다 왔어! 우리가 해냈어! We did it!” 내가 소리치자 꽃도 “Did it!”이라고 외쳤다. 뒤늦게 도착한 사자에게 달려가 해냈다고 말해주는 꽃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태어나자마자 산소 호흡기 끼고 튜브로 영양 공급받던 그 아기가 해발 3000m 넘는 호수에서 만세를 하고 있다니! 장애아와 함께하는 삶은 근심 걱정뿐인 줄 알고 두려웠는데 오히려 꽃 덕분에 이런 도전을 할 수 있었다. 꽃과 사자 그리고 남편과 함께 가족으로서 드림 호수에 올랐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서 코끝이 찡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 트레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모든 곳에 가볼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갈 수 있는 곳도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몸소 깨달았다.


뾰족하게 솟은 바위 봉우리 아래로 얼어붙은 드림 호수. 쌓인 눈 위로 수많은 발자국이 나있었다. 한쪽에 얼음이 녹아 맑고 차가운 호수 물이 고요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장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하산했다.


바윗길에서 내려다보니 경치가 더욱 멋있었다. 눈 쌓인 로키산과 소나무 그리고 페인트칠한듯한 구름 뒤로 드러난 새파란 하늘이 잘 어우러졌다. 돌이 미끄러워 뒤돌아서 바위를 잡고 내려갔다. 평평한 길에서는 달리기도 하다 보니 금세 트레일 헤드에 도착했다. 피톤치드를 한 번 더 크게 들이켜고 차로 돌아왔다.


차에서 “땡큐, 아빠! 땡큐, 엄마!”라며 뽀뽀를 백번 날리는 아이들 애교 덕분에 피로가 사르르 녹았다. 로키산을 빠져나오는 길엔 저녁 먹으러 내려온 엘크 가족 이 보였다. 간식 통을 잡은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동네 쪽으로 오니 여기엔 비구름이 껴서 로키산으로부터 비치는 햇살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우리 눈앞으로 나타났다. 그야말로 완벽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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