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로라도 Cache La Poudre River
미국 날짜로 추석을 하루 앞둔 오늘은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몸을 부르르 떨며 춥다는 소리를 저절로 할 만큼 공기는 차가운데 햇살이 뜨거워서 더위도 완전히 가시진 않은 날씨. 여전히 짧은 팔을 입을 수 있지만 긴 팔이 더 잘 어울리고 높고 푸른 하늘에 감탄하게 되는 날씨.
첫째 꽃을 픽업해서 걸어오는 길에 보니 어느 성질 급한 이웃은 벌써부터 문 앞에 커다란 호박을 갖다 놓았다. 음력으로 입추야 진작에 지났으나 그동안 워낙 기온이 높아서 오늘에서야 제대로 가을을 느끼는듯하다.
한국과 비슷하게 우리 동네도 지금부터 10월까지는 이상적인 날씨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여긴 11월 첫 일요일 서머타임이 끝나면서 일몰 시간이 무려 오후 다섯 시 전으로 앞당겨진다. 그리고 최소한 다음 해 4월에서 최대 5월까지 눈이 내린다.
콜로라도에서 유난한 산간지방이 아닌데도 그런 날씨이다 보니 매년 이맘때가 되면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한다. 가을에 대한 설렘과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오는 아쉬움. 그래서 올해 마지막이었던 계곡 캠핑에 대한 글을 써보고자 한다.
5월 중순 우리는 어마 무시한 첫 캠핑을 시작했다. 편도 600km 넘는 곳에서 무려 3박 4일. 그때 둘째 사자는 두 돌을 2주 정도 앞두고 있었다.
우리가 가장 걱정했던 건 처음으로 하는 캠프 파이어였다. 꽃과 사자는 (정말 안전하게 행동하진 않았으나) 큰 탈없이 불놀이를 즐겨 주었고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두 아이를 지키는 일”만” 하면 되어서 앞으로도 그 정도일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세 번째 캠핑에서부터 사고는 시작되었다.(그전에 평화로웠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꽃과 사자 둘 다 파이어 핏 그을음을 손에 잔뜩 묻힌다던가 신나게 놀다 못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가 된다던가 하는 것은 사고가 아닌 사건으로 치자.)
우리가 가는 캠핑장엔 항상 피크닉 테이블과 벤치가 있는데 벤치에 앉아서 마음대로 움직이던 사자가 벤치 아래로 머리를 박으며 떨어진 것이다. 크게 울긴 했지만 이것저것 확인해보니 괜찮은 듯했다.
모든 장비를 버려두고 병원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나니 잔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 말 안 들으니까 그렇잖아!” 그 말을 하고 나면 늘 작게 덧붙인다. “물론 엄마 말 듣는다고 다 안전한 건 아니지만..”
그 뒤로 꽃과 사자가 벤치나 캠핑 체어에 앉을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그런데도 두 아이는 유아용을 멀쩡히 두고 어른 캠핑 체어에 앉았다가 내려올 때 곤두박질칠 뻔하곤 했다.
그리고 9월 11일에 간 계곡 캠핑에서는 역대급 사고가 일어났다. 캠핑장에 있는 놀이터에서 놀고 나서 밸런스 바이크를 타는데 꽃과 사자 둘 다 말을 안 들으니 남편은 꽃을 나는 사자를 맡기로 했다.
길 한쪽으로 타고 다니는 게 그렇게 어려운지 사자는 굳이 비어 있는 캠핑장으로 들어갔다. 나는 길가에 서서 이리 오라고 했고 그 말을 “아는” 사자는 계속 타다가 내 쪽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비탈길을 발견했다.
내가 “Don’t!”를 다 외치기도 전에 붙잡으러 가기도 전에 사자는 그 길을 타고 내려갔다. 발길을 옮기는 순간 이미 심상치 않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27개월짜리가 경사길을 쉽게 성공할리 없다. 급하게 가보니 바위 바로 옆에 엎어져 울고 있었다.
그래도 바위에 머리를 찧은 게 아니라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상태부터 확인했다. 외상이 있는지 눈 맞춤을 제대로 하는지 살핀 후 사자를 안아 주었다. 이런 경우 아픔보다는 놀랐을 것이다.
어련히 내 쪽으로 올 거라 생각했던 안일함을 자책하면서도 줄곧 청개구리처럼 굴다가 이렇게 큰 위험에 처할 뻔한 둘째가 밉기도 했다.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는 꽃과 사자를 떠올리니 미안함과 함께 화가 같이 치밀어 올랐다.
더러우니까 만지지 말라고 하면 손으로 차를 닦으며 한 바퀴 돌고, 푸세식 화장실 건물로 가지 말라고 하면 일부러 뛰어가서 문에 손을 대어 보고 (심지어 그대로 들어가기도 하고), 차가 언제 올지 모르니 우리 캠핑장에서만 놀라고 하면 벗어나려고 뛰어가는 꽃과 사자.
“아, 청개구리 이야기는 청개구리가 아니라 우리 애들 얘기였구나.”하루에 몇 번을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오죽하면 남편이 “그래, 만져라 만져!”라고 윽박지를 때도 있을까.
토요일이라 캠핑장에 아이들 데리고 온 가족이 많았는데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꽃과 사자 같은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부모가 정해준 길로 자전거를 뱅글뱅글 타고 다니거나 얌전히 부모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갔다.
꽃과 사자는 엄마 아빠가 동시에 나서지 않고는 바이크를 타기 어렵다.(그동안 수십 차례 도전했다가 후회한 경험 있음) 그리고 한 명씩 전담하면 무엇하리? 가지 말라고 하는 곳에 가서 꼬라 박거나 내리막 길에선 걸어가라는 지시를 무시한 채 발 들고 타다가 바이크에서 떨어졌다.
대소변 훈련이 되지 않았으니 손 잡고 화장실은 안 가더라도 휴대용 변기에 하거나 기저귀를 가는 일도 No라고 외치고 보는 이 아이들을 어찌하리오.
특히 밖에 나가서 이런 일이 반복되면 울화통 터지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저 천방지축 청개구리는 뉘 집 애들일까?라고 삼자 입장에서 보고 싶은데 내가 낳은 우리 집 애들이다. “아, 청개구리 이야기는 청개구리가 아니라 우리 애들 얘기였지.”
아이들도 남편도 잠들고 난 밤, 내가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등 배기는 잠자리나 자정이 다 되도록 목소리도 낮추지 않고 모닥불을 피우는 이웃 탓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꽃과 사자에게 화가 난 나 자신 때문이었다.
“누가 낳아 달라고 했어?” 내가 한 때 우리 엄마한테 발악했던 것처럼 꽃도 사자도 나보고 낳아 달라고 한 적 없다. 첫째가 장애아라 더 힘들걸 예상했으면 둘째를 안 할 수도 있었는데 내가 낳아 놓고는 둘이라 힘들다, 도와줄 친정 엄마가 없어서 힘들다, 첫째가 말을 잘 안 들으니 둘째가 따라 해서 힘들다(심지어 요즘 첫째는 꽤 잘하고 있는데도 이 핑계는 습관인 듯), 우리 집 애들이 유난스러워서 힘들다 등 온갖 사유를 갖다 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힘차게 떼쓰고 용쓰고 해도 누우면 내 품에 속 들어올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인데 자면서 잠깐 눈 뜰 때도 엄마 아빠가 옆에 있는지부터 확인하는 아이들인데 아무리 혼나고 (욕먹고) 나도 돌아서면 엄마 아빠 향해 웃는 아이들인데 뭘 그렇게까지 힘차게 용써서 화를 내야만 했던 걸까?
오늘 캠핑장에서만 해도 우리 가족을 보면서 과연 내 착각처럼 “뭐 저런 청개구리 같은 애들이 다 있나. 엄마가 정말 애쓰네.”라고 생각했을까?
돌이켜 보면 대다수가 꽃과 사자에게 미소 지으며 지나갔다. 대부분은 장난꾸러기 유아들이 연출할 수 있는 장면이었고 (텐트 치는 걸 돕겠다고 나선다던가 내가 쫓아가면 재밌다고 더 도망간다던가 하는 정도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거기서 아이들 안전을 위한답시고 소리치면서 몸을 홱 낚아채는 내가 마녀 역할일지도 모른다.
조금 떨어져서 본다고 상상하면 이 시기의 아이 둘을 건사하기란 어려운 게 당연한 거고 그 와중에 아이들을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지켜주는 게 게 중요한 거지 내 지시를 안 따른다고 해서 당장 아이를 뜯어고쳐 놓을 기세로 불같이 화를 낼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 더 시간이 지나기까지 꽃과 사자가 확 달라질 일은 없다. 이 아이들은 천성이 활발하고 도전을 좋아한다. 아주 어렸을 때 호수에 데려가면 “이게 뭘까?” 궁금해하는 게 아니라 일단 걸어 들어가서 “이게 호수구나.” 하고 깨닫는 스타일이었다.
떨어져도 또 매달리는 아이들, 굴러도 다시 타는 아이들이 내 아이들인데 왜 남의 집 아이 같지 않냐며 참 오래도 고민했구나. 왜 그러냐, 하지 마라는 말보다는 그저 받아들이면 될 것을 왜 그렇게 화를 내고 있었을까?
아이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아까 사자가 비탈길을 구르기 전에 따라가서 여긴 우리 캠핑장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데려올 수 있었을 것이다. 텐트 앞 바위에 올라갔다고 한숨 쉬기보다는 손발 쓰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 것이고, 식사 시간에 벤치에 잘 있다가 갑자기 엄마 옆으로 오겠다고 불안정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을 타박하지 않고 도와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이들 금방 큰다, 그때가 제일 예쁘다는 말이 아직은 크게 와닿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내가 조금만 마음을 고쳐 먹으면 꽃과 사자는 심리적으로 조금 더 안정적으로 클 수 있겠지. 고쳐 먹자! 작심삼일이면 삼일마다 고쳐 먹자!
(특히 어린아이) 육아에서 부모의 역할이 전적이라는 점이 꽤 버겁다. 그렇다고 꽃과 사자가 고민하고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더 크면 아이들도 엄마 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고 대들겠지. 그전에 화를 좀 비우자. 비우고 보면 사실 아이들은 예쁘다. 밤하늘 별을 보며 나에게 최면을 걸어 보았다. “뭘 먹고 이렇게 예쁜 애들을 둘씩이나 낳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