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없는 크리스마스

by 보라

독일인들은 10월 초부터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하는 것 같다. 남자친구 초록이 역시 10월에 이미 프랑크푸르트 근교 외할머니 댁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가족들과 약속을 한 상태였다. 나는 초록이가 "혹시 할머니댁 같이 갈래?"라고 묻기 전에 "난 크리스마스 베를린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보내고 싶어."라고 쐐기를 박았다. 우리나라의 설날이나 추석에 맞먹는 독일 최대 명절 크리스마스에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 근교까지 이동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오래간만에 학교도 회사도 쉬는 2주라는 소중한 휴가를 스트레스 없이 보내고 싶어서였다.


지난해 크리스마스에는 우리 둘이서 슈베어린(Schwerin)이라는 소도시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는데, 크리스마스에 가족을 두고 여자친구와 국내여행(?)을 가는 건 사실 전통을 한참 벗어난 일이다. 올해는 초록이를 가족에게 양보하는 셈 치고, 아니 작년에 잠깐 훔쳤던 그를 올해는 가족에게 되돌려주는 셈 치고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각자 보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려던 것 치고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다. 우선 독일의 크리스마스 공휴일은 12월 24일 오후부터 시작해 26일까지고, 가장 중요한 가족과의 식사, 선물 교환 시간은 24일 저녁이다. 나는 베를린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 챠챠와 함께 23일과 24일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23일엔 크리스마스마켓에 갔다가 우리 집으로 향해, 24일 저녁을 함께 해 먹고 헤어지는 것이 계획이었다. (25일엔 그녀가 출근해야 했다)

23일 저녁, 베를린 샬롯텐부르크 성에 세워진 크리스마스마켓에 처음으로 가보았다. 성의 외벽엔 색색조명이 쏘여지고 있어 작은 쇼를 연출했고, 성 앞마당엔 목조 가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세워져 중세 소도시의 겨울 거리에 휙 떨어진 느낌이었다. 독일 크리스마스마켓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글뤼바인(Glühwein, 과일과 계피를 넣고 살짝 끓여서 따뜻하게 마시는 와인)이다. 나는 이날 글뤼바인을 무려 두 잔이나 마셨다. 독일 거주 4년 만에 드디어 술이 좀 세진 모양. 게다가 갓 튀겨낸 츄러스까지 더하니 어디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소소한 술과 안주가 갖춰졌다.


한편 글뤼바인 잔은 보통 3유로의 보증금이 있고 마켓마다, 가게마다 디자인이 달라서 보증금을 포기하고 기념삼아 가져와도 된다. 나는 사진의 하얀 반투명 잔이 맘에 들어서 기념품으로 데려왔고, 챠챠는 다른 가게에서 샬롯텐부르크 성이 그려진 파란 잔을 샀다.

알딸딸해진 우리는 늦게까지 수다를 떨다가 새벽 1시쯤 잠든 것 같다. 24일 오전에 느지막이 일어나 아점을 먹고 곧장 동네 극장으로 향했다. 시간도 맞고 크리스마스랑 잘 어울릴 것 같아 선택한 영화는 <웡카>였다. 극장 키오스크에서 표를 예매하고 바로 옆 카페에 가려고 했는데 거리는 썰렁했고 카페는 문을 닫았다. 24일 오후는 ‘크리스마스 마켓’조차 문을 닫는 명절 피크 타임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불을 밝힌 카페를 찾아 오트 카푸치노와 스웨덴식 아몬드 케이크를 즐길 수 있었다.

따뜻하고 달달한 후식을 긴 수다와 함께 끝내고, 극장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이런 날에도 문을 열어주어서 고맙다는 마음을 담아 "슈네 바이나크튼!(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카페를 떠났다.


그리고 시간대 때문에 선택의 여지없이 독일어 더빙 버전으로 봤던 <웡카>는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얼떨떨했다. 티모시 샬라메의 연기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능글맞으면서도 아이처럼 낙관적인 웡카의 캐릭터를 아주 잘 표현했다. 뮤지컬 영화인데 노래마저 독일어로 들어야 해서 어딘가 아쉬웠지만, 컬러풀한 초콜릿과 캐릭터들의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의상 덕에 눈은 충분히 즐거웠다.


집에 돌아와 바로 만들기 시작한 베트남 쌀국수와 타이 치킨샐러드는 대성공이었고 (챠챠는 칼질을 정말 잘해서 함께 요리하면 집요정을 가진 기분이다)

갑자기 '챠챠와 노래를 불러야겠다'라는 영감이 든 건, 로제와인 덕분이었을까.

우리 집에는 초록이가 플리마켓에서 12유로(약 2만원) 주고 업어온 중고 키보드가 있는데, 내 손길을 오랫동안 받지 못하던 이 녀석을 식탁 위에 올렸다. 챠챠는 영어 가사를 찾아 목소리로 합주했다. 곡명은 Silent Night, Holy Night(고요한 밤, 거룩한 밤).


챠챠는 노래를 잘하고 나는 웬만한 노래에 반주를 넣을 수 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같이 피아노 치고 노래 부르면서 놀아 볼 생각을 한 번도 못했는지 정말 의아할 정도로 우리의 잼 세션은 너무나 재미있었다.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와 <City of Stars>까지 함께 부르다가 나는 챠챠에게 제일 좋아하는 중국 노래를 도전해 보자고 했다. (챠챠는 중국인이다) 챠챠는 요즘 즐겨 듣는 중국 민요(!)를 폰으로 들려주었는데,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민요'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너무나 다르게 정말 서정적이고 세련되면서 낭만적인 곡이었다. 나는 중국어 가사를 읽을 수 없어 함께 부르진 못했지만 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피아노 반주를 조금씩 완성해 갔다. 챠챠는 음정도 박자도 정확했고 내 반주를 정말 잘 이해해서 또 새로운 의미에서 우정이 한 뼘 자란 기분이었다. 이렇게 언어를 초월해서 주고받는 감동이라니.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떨어진 동네에 사는 챠챠는 밤 10시가 좀 넘어 집에 갔고, 나는 (또) 와인 덕분에 아주 잘 잤다.


크리스마스 당일인 25일에는 집에만 틀어박혀 나 자신과 퀄리티 있는 시간을 보냈다. 새로 사놓고 두 달 넘게 쓴 적이 없는 팔레트와 캔버스, 그리고 초록이에게 얻어와 놓고 아직 쓴 적 없는 붓들을 꺼냈다. (우리집, 아니 내 집엔 초록이의 물건이 참 많다.) 이렇게 뭉크의 <별밤>을 따라 그리고

저녁엔 크리스마스에 꼭 하고 싶었던 해리포터 영화 정주행을 시작했다. 혼자였지만 와인은 빠지지 않았다.


연휴 마지막날인 26일엔 운동 갔다가 카페에서 책 읽으며 낮시간을 보냈다. 동네에서 좋아하는 카페 중, 한켠에 긴 소파 네 개가 네 면을 둘러싸고 가운데에 탁자가 몇 개 있어 거실처럼 꾸며진 곳이 있다. 그곳을 혼자 또는 여럿이 찾은 남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사선에, 혹은 맞은 편에 앉아있지만 서로 인사도 말도 주고받지 않는, 오후의 한 조각을 함께 할 뿐인 낯선 동반자들.


해가 떨어질 때 쯤 집으로 돌아와 해리포터 정주행을 이어갔다. 오랜만에 보는 <죽음의 성물>편은 스릴이 넘치면서도 너무 음울했다. 최종편에서 해피엔딩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 음울함에 그렇게 몰입할 필요도 없지만, 이 기분은 정주행의 끝에서 어른이 된 해리와 친구들이 빙긋이 웃는 마지막 장면을 봐야만 해결이 될듯 하다.


내일이면 그가 돌아온다. 내가 갖고 싶다고 했던 <해리포터와 불의 잔> 독일어판을 주문했지만 할머니댁으로 떠나기 전까지 택배가 도착하지 않아 나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도 없이 떠난 그가, 내일이면 아마도 그 책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너무나 사랑하지만 가끔은 며칠 떨어져 있음으로써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그 남자. 그가 없이 보낸 크리스마스,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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