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학교에서 가장 흔한 체벌은 토끼걸음이었다. 선생님은 비좁은 복도에서도 쭈그린 채 나를 따라오게 했다. 교무실 앞에 도착하면 “손 들고 있어”라는 말이 이어졌다. 그렇게 벌은 늘 덧붙여졌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한 말이지만, 당시의 우리에게 그 시간은 아주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것은 잠시 떠들썩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의 시간이었고, 기합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의 엉덩이를 털어주며 웃어넘기던 일상의 일부였다.
학교에서 토끼걸음을 하는 아이를 보는 일은 흔했다. 서슬 퍼런 선도 선생님뿐 아니라, 내가 가장 좋아하던 미술 선생님조차 준비물을 챙겨오지 않으면 같은 벌을 주었다. 미술 시간에는 늘 추가 비용이 들었고, 가난했던 우리 중 완벽한 준비물을 갖춘 학생은 드물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주머니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규칙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를 웅크리게 했다.
남학생들 중에는 왜 여학생은 토끼걸음을 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아이도 있었다. “치마 입었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오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두고 괜히 억지를 부리며 웃어넘기곤 했다. 그 벌은 일종의 '미안함의 의례'였던 셈이다.
어느 날 아침 자율학습 시간, 교실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전날 새벽 먼 나라에서 열린 축구 경기에서 국가대표팀이 극적으로 4강에 올랐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흥분한 목소리는 복도를 넘어 옆 교실까지 퍼졌다.
결국 우리 반은 모두 운동장으로 집결했다. 토끼걸음이 시작될 것을 짐작한 아이들은 저마다 몸을 풀기 시작했다. 허리를 돌리고, 목과 어깨를 풀고, 어떤 아이는 가랑이를 길게 벌리며 진지하게 준비 운동을 했다.
그때 담임 선생님, 별명이 ‘변사또’였던 선생님이 지휘봉을 손바닥에 ‘딱딱’ 치며 다가왔다. 성이 변씨이기도 했지만, 고전 소설 속 춘향의 절개를 묻듯 엄격한 훈계를 즐기셔서 붙은 별명이었다. 선생님은 본인을 향한 그 익살스러운 호칭을 은근히 즐기시는 눈치였다.
“모두 앉아.”
“머리에 손 올리고.”
“농구 코트 따라 돌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웅크린 소년들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몇 바퀴쯤 돌자 헐떡이는 숨소리가 흙먼지와 섞여 올라왔다. 그때였다. 정적을 깨는 요란한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순간 모두가 누군가의 바지 재봉선이 항복을 선언한 줄 알았다. 하지만 소리의 주인공은 옆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후영이의 방귀였다.
웃음은 산불처럼 순식간에 번졌다. 엄숙해야 마땅할 반성의 시간은 찰나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변사또 선생님 역시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다, 결국 등을 돌린 채 어깨를 들썩이며 "그만" 하고 외치셨다. 그리고 뜻밖의 구세주가 된 후영이에게 다가가 그의 흙먼지 묻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셨다.
시골 학교의 아침은 그렇게, 벌과 웃음이 한데 버무려진 기묘한 행진곡으로 채워지곤 했다. 비록 낮은 자세로 웅크려 걷던 길이었지만, 우리는 그 길 위에서 함께 웃으며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