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116)
존 싱어 사전트, 베네치아 거리(Street in Venice), 1880~82, 73.7 x 60.3cm, 개인 소장
존 싱어 사전트의 베네치아 연작 중 하나인 <베네치아 거리>는 그가 대중적인 초상화가의 성공과는 달리, 도시의 이면과 일상적인 분위기를 얼마나 예리하게 포착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예요.
사전트는 베네치아의 넓은 광장이나 운하 대신, 벽이 높게 솟은 좁고 어두운 골목(Calle)을 선택했죠. 수직으로 길게 뻗은 건물의 벽면과 바닥이 만나는 구도는 마치 무대 장치처럼 인물들에 집중하게 돼요.
화면 중앙에는 검은 숄을 두른 여인이 서둘러 걸어가고 있고, 그 뒤로 두 남자가 벽에 기대어 대화를 나누고 있죠. 여인의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듯한 묘사와 남성들의 시선 처리는 마치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스냅샷 같은 생동감을 주어요.
<베네치아 거리> 부분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갈색과 회색조에서 여인의 치마 아래로 살짝 비치는 붉은색 혹은 밝은 톤의 안감, 그리고 바닥에 흩뿌려진 듯한 빛의 파편들이 시각적 활력을 불어넣어요. 사전트는 아주 적은 색의 변화만으로도 차가운 돌바닥과 습한 공기의 질감을 완벽하게 재현했죠.
이 시기 사전트는 스페인의 거장 벨라스케스의 기법에 심취해 있었어요. 형태를 선으로 명확히 구분하기보다 빛과 어둠의 덩어리로 파악하고, 대담한 붓질로 공기의 밀도를 표현하는 방식에서 그 영향이 짙게 나타나죠.
사전트의 베네치아 거리 풍경들은 관람객들에게는 다소 "불친절하고 어둡다"는 평을 듣기도 했어요. 당시 사람들은 운하와 곤돌라가 있는 낭만적인 풍경을 원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재 이 연작들은 빛과 그림자의 추상적인 미학을 극대화한, 사전트 생애에서 가장 예술적으로 자유로웠던 시기의 걸작들로 평가받아요.
<베네치아 거리> 부분
중앙에 있는 두 사람이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뭔가를 속삭이는 듯한 구도가 정말 압권이죠. 당시 파리에서 전시됐을 때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하며 저마다 신비로운 상상을 펼쳤어요. 이 은밀한 만남은 그들이 밝게 빛나는 공간에서 만날 수 없는 사정을 간직한 게 아닌지 몰입하게 하죠.
저는 이 작품을 보는 순간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 月下情人>이 떠올랐죠. “달빛 아래 두 정인”이 인적이 드문 담장 아래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만나고 있는 걸작이죠. 밤은 깊어 초롱을 들었는데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바라보지도 못하는 여인이 안타깝죠. 그렇게 꽁꽁 싸매고 감추어서 더 미학적이지요.
신윤복, <월하정인>,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 간송 미술관
당시 베네치아에서 사전트를 만난 지인은 이렇게 표현했어요. “사전트는 남들이 베네치아에서 흔히 찾는 것들을 완전히 무시한다.”라고요.
‘그림이 될 것 같지 않은 소박한 주제'와 '어둡고 칙칙한 색조'에서 진정한 영감을 얻으려 했던 거죠.
존 싱어 사전트, 베네치아 거리, 1880~1882년경, 캔버스에 유채, 75.1 x 52.4cm, 클라크 미술관(Sterling and Francine Clark Art Institute)
회반죽이 벗겨지고 저 끝에서 빛이 쏟아지는 이 좁은 골목길은, 그 끝에서 들어오는 강렬한 빛이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요. 와인 저장고에서 나오는 여인은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데, 맞은편 남자는 우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자기 일에만 집중하고 있죠.
사전트는 뻔한 관광지가 아니라, 남의 사생활을 몰래 엿보는 것 같은 '진짜 베네치아의 뒷골목'을 그리고 싶어 했어요. 그 고집 덕분에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신비롭고 세련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죠.
존 싱어 사전트, 베네치아 실내, 1880~82년경, 68.3 x 86.8cm, 카네기 미술관, 피츠버그
사전트는 어둡고 습한 팔라초(Palazzo)의 공기를 포착했어요. 왼쪽 상단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날카로운 빛이 인물들의 어깨와 바닥을 비추며, 나머지 공간은 깊은 그림자 속에 잠겨 있어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죠. 바닥을 스치는 섬광처럼, 빛을 단 한 번의 사선으로 강렬하게 묘사했어요.
<베네치아 실내> 부분: 운하를 바라보는 여인
<베네치아 실내> 부분
오른쪽에 놓인 가구와 벽면 장식에 빛을 받는 부분의 묘사죠. 처음엔 물감을 흠뻑 적신 붓으로 힘있게 시작해서 마치 붓글씨를 쓰듯 힘을 뺀 터치를 느낄 수 있어요.
그림 속 인물들은 베네치아 현지인으로 구슬을 꿰거나 담소를 나누는 등 각자의 일에 몰입해 있어요. 마치 17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에서 페르메이르가 중산층 여인들의 일상을 관조하듯 정적인 분위기로 그린 것 같죠. 사전트 역시 정형화된 장르화가 아닌, 삶의 한 조각을 몰래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어요.
화면 하단과 오른쪽 빈 공간은 당시 유행하던 일본 판화나 사진을 연상시키죠. 인물들을 중심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치게 배치하여 공간의 깊이감과 적막함을 극대화했어요.
<베네치아 실내> 부분
가까이서 보면 거칠고 대담한 붓놀림이지만, 멀리서 보면 금속의 광택이나 직물의 질감이 생생하게 살아나죠.
이 시기 사전트는 베네치아에 머물며 약 80여 점의 수채화와 유화를 그렸죠. 대중이 기대하던 '관광지로서의 베네치아'가 아닌, 쇠락해가는 고딕 양식 건물의 내부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감 없이 그려내며 자신만의 예술적 시각을 확립했어요. 그랜드 투어를 마친 관광객들은 카날레토나 프란체스코 과르디의 전형적인 풍경화를 훈장처럼 가지고 귀국했지요.
카날레토(안토니오 카날), 베네치아 리바 델리 스키아보니의 풍경, 1730년대 후반, 톨레도 미술관
존 싱어 사전트, 베네치아의 실내, 1880~82년경, 캔버스에 유채, 48.4 x 60.8cm, 클라크 미술관
이 작품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텅 빈 바닥이예요. 인물들은 화면 오른쪽 상단 구석으로 밀려나 있으며, 관람자의 시선은 넓고 어두운 대리석 바닥을 지나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인물들에게 도달하게 되죠.
사전트는 카네기 버전보다 훨씬 절제된 빛을 사용했어요. 어둠이 지배하는 실내에서 아주 적은 양의 빛만이 인물들의 실루엣과 바닥의 질감을 살짝 드러내고 있죠.
비교적 작은 크기 덕분에, 사전트 특유의 빠르고 유려한 붓질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죠. 세밀한 묘사보다는 인물의 움직임과 자세 그리고 분위기를 포착하는 데 집중한 이 기법은 인상주의죠.
여인들은 유리 구슬을 고르고 있어요. 베네치아의 무라노 섬에는 유리 공예가 발달했죠. 크리스탈 유리에 색이 들어가고 커팅이 있는 유리잔을 기억하실 거예요.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커다란 방울 진주도 베네치아에서 유리가루로 만든 모조 진주였어요.
7명의 여인들이 소란스럽지 않고, 오히려 성당처럼 정적이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죠. 이는 화려한 운하 도시 베네치아 서민들의 차분한 삶을 대변해요.
카네기 미술관 본은 인물들이 조금 더 크게 배치되어 있으며, 실내 가구와 벽면의 장식적 요소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죠. 클라크 미술관 본은 공간이 주인공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구도가 더욱 과감하며, 빛과 어둠의 추상적인 대비가 더 강렬하죠.
두 작품 모두 사전트가 상업적인 초상화가의 길을 잠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화풍으로 빛과 공간이라는 회화 본질에 얼마나 깊이 침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