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117)
샤를- 알렉상드르 지롱(Charles-Alexandre Giron, 스위스, 1850~1914), 장갑을 낀 여인, 일명 “파리지엔느”, 1883, 캔버스에 유채, 200 x 91cm, 쁘띠 팔레, 파리 시립 미술관
샤를- 알렉상드르 지롱의 <장갑을 낀 여인, 일명 ‘파리지엔느’〉(1883)의 검은 드레스와 장갑, 화려한 모자 속에 담긴 것은 한 개인의 얼굴이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이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에서 들라크루아가 삼색기를 든 여신 마리안느로 프랑스를 상징했듯이, 그녀는 파리의 세련됨과 자부심을 몸으로 드러내며, ‘파리지엔느’라는 이름으로 시대를 대표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2025년 전시에 소개된 이 초상화들은 파리와 런던에서 활동한 화가들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해석하였고, 그 다양성을 담았다. 사전트는 이런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고, 모델의 기대를 채우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참고했을 터이다. 특히 친구 지롱과는 스케치북을 나누며 교류했고, 결국 지롱의 초상화를 남기기도 했다. 예술가들의 우정과 경쟁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장갑을 낀 여인, 일명 ‘파리지엔느’〉 부분
반짝이는 비즈(Beads, 가운데 구멍이 뚫린 작은 구슬)와 시스루(See-through)가 더해진 검은 드레스는 갈색 톤의 벽지에 황금빛 아르누보 장식, 클래식한 테이블, 그리고 목이 긴 노란 장갑에 의해 한층 빛을 발한다.
여인의 곱슬거리는 금발과 생기 넘치는 투명한 피부는 검은 모자와 어우러져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부분 불그스레한 귓바퀴는 실존 인물을 보는 듯한 사실감을 자아내며, 화가가 얼마나 세심하게 관찰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 장면은 패션의 묘사를 넘어, 빛과 색, 질감의 교차 속에서 인물의 존재감을 극대화한다. 화려함과 섬세함이 공존하는 순간, 우리는 화가의 눈이 포착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지롱은 스위스에서 태어나 파리로 건너온 화가였다. 그에게 파리는 야망을 시험하는 무대였다. 공개 전시회에서 주목받고자 했던 그의 열망은 결국 〈파리지엔느〉라는 작품 속에 응축되었다. 당시 파리라는 도시의 문화적, 예술적 자부심이 가득한 지식인들은 ‘파리지엔느’는 프랑스인이어야 한다고 선을 그을 정도로 국수적이었다.
검은색 데이 드레스는 절제된 우아함을 드러내며, 지롱의 회화적 기량과 세련된 취향을 동시에 보여준다. 한 평론가가 “다른 모든 것을 대신하고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파리지엔느의 우아함과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장갑을 낀 여인, 일명 ‘파리지엔느’〉
이 작품은 다음 편에 소개되는 마네의 〈파리의 여인〉과 카를루스–뒤랑의 〈장갑을 낀 여인〉과 나란히 놓을 때 더욱 빛난다. 마네가 도시의 공기를, 뒤랑이 사교계의 품위를 담았다면, 지롱은 파리 여성의 상징성을 정면으로 그려냈다. 검은색의 깊이와 장갑의 우아함은 패션을 넘어, 도시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방식이다.
여기 소개하는 다섯 점의 초상화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검은색 드레스와 모피 코트를 입고 있다. 왜 하필 검정일까? 16~17세기 스페인의 벨라스케스,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가 그린 초상화에서도 검정은 수없이 반복된다. 화학 염료가 없던 시대, 검정은 여러 차례 염색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값비싼 색이었다. 그래서 왕과 귀족, 상류층 부르주아만이 입을 수 있는 권위의 색이었다.
그러나 가장 값비싼 색은 따로 있었다. 바로 보라색이다. 교황과 추기경이 보라와 붉은색을 착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보라색은 권력과 신성의 상징이자, 염료 가격으로도 최고가였다. 그래서 인공 염료로 맨 처음 만들어진 색 역시 보라색이다.
그 대표적인 천연 염료가 바로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인데, 지중해 연안에 사는 뿔고둥의 분비물에서 얻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염료가 너무 귀했다는 점이다. 수천 개의 조개를 모아야 겨우 소량을 얻을 수 있었으니, 자연히 왕과 귀족만이 누릴 수 있는 색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색을 ‘로열 퍼플’이라 불렀다.
붉은빛을 내는 염료는 오래전부터 곤충에서 얻어졌다. 코치닐(연지벌레), 락(Lac) 같은 작은 벌레들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붉은색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다른 색을 섞거나 ‘백반’ 같은 재료를 더해 보라색을 만들어냈다. 봉숭아 꽃물 들일 때 백반을 섞어 색이 더 선명하게 남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처럼 자연에서 얻은 재료와 작은 화학적 지식이 만나, 단순한 붉은빛은 고귀한 보라색으로 변신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보라색은 권위와 특별함을 상징했기에, 곤충에서 시작된 이 작은 실험은 곧 사회적 의미까지 품게 되었던 셈이다.
1856년 월리암 퍼킨이 최초로 합성 염료인 ‘모브(mauveine)’를 발명하기 전까지 이러한 천연 재료들이 주로 사용되었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McNeill Whistler, 1834~1903), 검은색의 배열, 5번: 레이디 뫼(Meux), 1881~82, 캔버스에 유채, 약 193.7 x 130.2 cm, 호놀룰루 미술관
1882년, 사전트보다 20년 연상이던 미국 출신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는 살롱에서 파격적인 초상화를 선보였다. 검은색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가슴이 깊게 파인 채 등장한 인물은 바로 레이디 뫼(1852~1910)였다. 그녀의 대담한 모습은 빅토리아 시대의 관습을 흔들었고, 휘슬러의 실험적인 화풍과 절묘하게 어울렸다.
휘슬러는 사실주의보다 색과 질감의 조화에 더 관심이 있다. 그림 속 검은 드레스와 그림자 진 배경은 그녀의 흰 피부와 풍성한 모피, 그리고 눈부신 다이아몬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는 음악과 회화의 만남으로, 색채와 질감의 ‘배열’을 통해 추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려는 휘슬러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모델인 레이디 뫼는 영국 데번 태생으로 극적인 신분 상승의 주인공이다. 정육점 주인의 딸로 태어난 수잔 랭던(Susan Langdon)은 부유한 양조 가문의 귀족과 결혼해 런던 사회에 스캔들을 일으켰다. 홀본의 카지노 드 베니스에서 벤조를 연주하던 바텐더 겸 매춘부였던 랭던은 그곳에서 헨리 뫼 경을 만났다. 한 시즌 무대 위에 섰던 그녀는 곧 런던 사교계의 화려한 연회장으로 옮겨갔다.
<검은색의 배열, 5번: 레이디 뫼> 부분
뫼 경의 아내로서의 삶은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외피와 은밀한 과거가 교차하는 무대였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런던 사교계의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진 욕망과 야망의 초상화였다. ‘발 리스(Bal Lis)’ 시절은 훗날 사교계 명사로서 그녀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었고, 빅토리아 시대의 모순과 매혹을 한 몸에 담아낸 드라마로 남았다.
그러나 휘슬러의 붓끝에서 그녀는 당당하고 세련된 여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결국 이 작품은 두 사람의 야망이 만난 결과였다. 사회적 편견을 넘어선 여성과, 영국에서 다시 자리잡기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한 화가. 그들의 만남은 시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았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 분홍색과 회색의 조화: 레이디 뮈, 1881~82, 캔버스에 유채, 193.7 x 93cm, 프릭 컬렉션, 뉴욕
이는 휘슬러가 주문 받은 두 번째 작품이다. 아마 세 번째 작품은 스케치만 남아 있는 걸로 보아 모델과의 분쟁으로 작가가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 검정색의 배치, 뫼 부인의 초상, 1881, 갈색 종이에 잉크, 시카고 미술관
<검은색의 배열, 5번: 레이디 뫼> 부분
휘슬러가 이 작품을 그린 1881~82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격동적인 시기였다. 존 러스킨과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휘슬러는 1879년 파산을 선언하고 런던을 떠나 베네치아에서 판화 작업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경험은 오히려 그의 예술적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되었고, 귀국 후 그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으며 다시 초상화 작업에 몰두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런던 사교계의 이단아인 레이디 뫼였다. 그녀는 휘슬러에게 3점의 초상을 의뢰했다. 이 작품은 파산 이후 재기를 모색하던 휘슬러가 색채와 구도를 통해 자신만의 미학을 다시금 선언한 결과물이었다. 즉, 레이디 뫼의 초상은 휘슬러가 소송과 파산의 상처를 딛고 예술과 재정적인 부분에서 재기를 꾀하던 순간을 기록한 증거라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여성 초상화는 더 이상 개인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의 얼굴이며 사회의 자화상이었다. 화가들의 캔버스 위에서 여성은 시대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