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118)
카를루스–뒤랑(Caroius-Duran, 1837~1917), 장갑을 낀 여인(카를루스 뒤랑 부인, 폴린 크루아제트), 1869, 캔버스에 유채, 228 x 164cm, 오르세 미술관
카를루스 뒤랑의 아내이자 화가인 폴린 크루아제트(Pauline Croizette, 1839~1912)의 초상화인 <마담 카를로스 뒤랑의 초상>은 1869년 살롱전의 스타 작품이다.
사실주의로 호화로운 초상화의 원형인 이 작품 속의 여인은 회색과 검은색이 미묘하게 어우러진 수수한 회색 톤의 벽에서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 여인이 있는 실내는 뒤쪽 벽 중간에 그려진 띠 장식으로 보아 부르주아 계급의 아파트 내부인 것으로 추정된다.
산책에서 돌아온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여인은, 당시 부인들이 오후 외출 시에 꼭 지녔던 진주 빛의 장갑을 우아하게 벗고 있으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한 짝의 장갑은 화가의 붉은색 서명과 함께 작품 하단의 유일한 색조라고 할 수 있다.
떨어진 장갑은 오페라 극장의 부채처럼 단순한 패션 소품이 아니다. 그것은 은밀한 신호이자, 무의식의 상징이다. 프로이트 이후 심리학은 ‘떨어진 물건’을 무의식의 표현으로 읽어냈다. 손을 감싸는 장갑은 사회적 규범과 단정함을 상징하지만, 그것을 벗거나 떨어뜨리는 행위는 억눌린 욕망이나 자유에 대한 갈망을 드러낸다.
19세기, 파리 사교계에서 장갑을 떨어뜨린다는 것은 관심을 끌거나 대화를 시작하려는 사교적인 제스처로 읽혔다. 따라서 초상 속 여성의 장갑은 그녀의 엄숙한 표정과 대비되며, 신비로운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검은 드레스는 그녀를 현대 파리의 부르주아 여성으로 규정하지만, 떨어진 장갑은 그 규정에서 벗어나려는 암묵적 신호처럼 보인다. 바로 그 지점에서 파리지엔느의 신화가 완성된다.
단정함과 파격, 규범과 욕망이 교차하는 순간, 그녀는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1875년 프랑스 정부가 이 작품을 소장했을 때, 그것은 근대 초상화로서는 최초의 사례였다. 이 선택으로 <장갑을 낀 여인>은 뒤랑의 걸작으로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초상화라는 장르가 새로운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레옹 보나트(Leon Bonnat, 1833~1922), 포토카 백작부인(엠마뉘엘라 피냐텔리 체르키아라, Emmanuela Pignatelli di Cerchiara), 1880, 캔버스에 유채, 212 x 123 cm, 보나-엘뢰 미술관, 바욘 미술관
레옹 보나트는 컬렉터로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주목받고 인기를 끌었던 초상화가였으며, 에꼴 드 보자르에서 사전트를 가르쳤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사실주의 화가인 보나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초상화로, 모델인 포토카 백작부인(Potocka, 1852~1930)의 우아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세밀하고 사실적인 필치로 묘사했다.
이미 명성을 쌓은 화가였던 보나트는 부유한 폴란드 백작과 결혼한 시칠리아 왕실의 후손인 포토카 백작 부인에게 적합한 보수적인 선택이었다.
결혼하여 파리 8구 포토카 호텔에 정착한 포토카 백작부인(소파 맨 오른쪽 흰 드레스)의 마카베 서클 사진, 1889, 찰스 A. 바렌(1835~1913), 위키피디아
포토카 백작부인은 19세기 파리 사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살롱 주최자이다. 그녀의 살롱은 마르셀 프루스트, 기 드 모파상 등 당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문화 중심지였다.
프루스트는 파리 사교계의 인물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작품 속 인물로 재창조했는데, 백작부인의 살롱은 그에게 중요한 관찰의 장이었다. 프루스트는 인물들의 대화, 태도, 권력 관계를 세심하게 기록했다.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여러 인물과 장면은 당시 파리 살롱 문화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프루스트는 페르메이르의 <델프트의 풍경>을 마우리츠하위스에서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보았다” 라고 기록했다. 그리곤 그 소설에서 이 감동을 녹여내었고, 페르메이르를 재조명하게 했다.
나도 프루스트 덕분에 <델프트의 풍경>을 보기위해 델프트를 찾아갔다. 마치 성지순례처럼 유럽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델프트 도자기로 장식용 접시를 구입했고, 그걸 매일 바라보고 있다.
<포토카 백작부인> 부분
레옹 보나트가 그린 포토카 백작부인의 초상화는 한눈에 압도적인 품격을 드러낸다. 화면 속 인물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사실적 묘사로 빛나며, 이는 정치인과 배우, 사교계 인사 등 당대의 저명한 인물들을 매혹시킨 화가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1881년 살롱에서 큰 주목을 받은 이 작품은 곧 백작부인의 응접실 한가운데 놓여, 그녀가 주재한 문학과 예술의 향연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곳은 사무엘 포치와 같은 지성인들이 모여드는 문화 권력이었으며, 초상화는 사교계의 권위와 예술적 교류를 증명하는 증거였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 파리의 여인, 1876년 경, 캔버스에 유채, 192 x 125cm, 스톡홀름 국립 미술관
마네는 진보적인 실험과 센세이셔널한 전시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고, 사전트의 롤모델로 25년간 젊은 화가들의 존경 대상이 되었다. 마네는 전통적인 초상화 형식에서 벗어나, 당시 파리의 도시적이고 세련된 현대 여성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검은 드레스와 모자, 우아한 자세의 엘렌 앙드레(Ellen Andrée)는 파리 여성의 패션과 사회적 지위를 상징한다. 마네 특유의 자유로운 붓질과 빛의 표현이 돋보이며,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요소가 공존한다.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했지만 전시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마네는 독자적인 화풍을 유지했으며, 이 작품에서도 사실적 묘사와 현대적 감각을 결합했다. 19세기 후반 파리의 사회적 변화와 여성의 역할 확대를 반영하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파리의 여인> 부분
파리의 골목에서 태어난 앙드레는 처음엔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 했다. 그러나 몽마르트르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그녀는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고, 그 순간부터 미술사에 기록되었다. 드가의 〈압생트〉 속 앙드레는 고독과 도시의 불안한 근대성을 상징하는 인물이었고, 르누아르의 〈보트 파티의 점심 식사〉에서는 젊음의 에너지가 넘치는 모임의 중심이었다. 그녀는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몸으로 증언했다.
하지만 앙드레는 그림 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21세의 나이에 팔레 로얄 극장에서 무대에 오른 그녀는 자연주의 배우로 변신했다. 관객의 상상력에 의존하지 않고 현실을 무대 위에 재현하는 연극은, 그녀가 그림 속에서 보여주던 생생한 존재감과 맞닿아 있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희극과 드라마를 넘나들며 배우로서,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예술적 교류를 이어갔다.
앙드레의 삶은 예술가와 뮤즈, 배우와 지식인이라는 여러 얼굴을 오갔다. 그녀는 고급 문화와 보헤미안적 자유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살았고, 그 경계 위에서 예술가들과 함께 시대를 증언했다. 그림 속 고립된 여인에서 무대 위 살아 숨 쉬는 배우로, 엘렌 앙드레는 파리의 근대성을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드러낸 인물이었다.
마네가 그린 여성상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파리라는 도시의 다양한 표정이다. 화려함, 은밀함, 지적 교류, 그리고 세련된 패션까지—그 모든 것이 ‘파리지엔느’라는 이름으로 응축된다.
사전트는 아마 이 초상화를 보지 못했을테지만, 마네의 영향력은 특히 1883년 사망 당시와 1884년 추모 전시회 및 사전트가 두 작품을 구입한 스튜디오 경매에서 절감했을 터이다.
<파리의 여인>
19세기 후반, 여성 초상화는 인물 재현을 넘어 도시와 사회의 얼굴을 담아내는 장르가 되었다. 마네의 〈파리의 여인〉은 검은 드레스와 모자를 쓴 세련된 여성으로 파리의 공기를 응축했고, 카를루스–뒤랑의 〈장갑을 낀 여인〉은 화가이자 아내였던 폴린 크루아제트를 통해 사교계의 우아함과 패션을 상징했다.
그리고 휘슬러의 〈검은색의 배열, 5번: 레이디 뫼〉는 이 흐름을 한층 더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았던 레이디 뫼를 그는 검은색의 조화 속에 당당히 세워 두었다. 마네가 도시의 세련됨을, 뒤랑이 사교계의 품위를 그렸다면, 휘슬러는 사회가 외면한 여인을 예술의 힘으로 다시 정의했다.
여성들은 시대의 상징이다. 파리와 런던의 공기, 사교계의 품위, 그리고 편견을 넘어선 독립성까지, 각기 다른 화가의 붓끝에서 여성은 도시와 사회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얼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