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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원 Nov 21. 2020

독서실

무엇을 먼저 해야할지 고민된다면, ‘중요하고도 급하지 않을 일’을 선택하

책을 읽고, 혼자 힘으로 지식을 깨닫는 사람들이 부럽다. 책 안에 길이 있고, 뭐든 다 할 수 있다지만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학창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배우고 싶은 일본어와 중국어를 독학으로 배우고 싶다. 책안에는 모든 지식과 정보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책을 읽어서는 잘 안됐다. 자동차 정비도 배우고 싶고, 건축과 토목에 대해서도 알고 싶다. 모유수유를 끝낸 신생아는 이유식을 해야한다. 곧바로 밥이나 면을 먹게되면 소화를 시켜내지 못한다. 이유식을 먹어할 시기에 어른 음식을 먹는다면 소화장애는 물론, 필요한 영양분 공급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기에 맞는 책이 있고, 단계에 맞는 책이 있다. 나는 자동차와 일본어, 건축을 알고 싶지만 교과서에서 알려주진 않는다. 깊게 알려주지 않는다. 형에게 물어봤다. 도서관에 가보라고 했다. 학교 도서관은 너무 어려웠다. 독서카드를 만들었다. 정확히 독서 대여카드였다. 3학년때 처음 가본 학교 도서관은 내 기대와 달리 너무 작았다. 교실 두개 정도를 도서관이라 이름 붙이고 그 안에 책장 가득 책이 꽂혀 있었다.

독서카드는 만들었지만, 내가 원하는 책을 찾기란 너무 어려웠다. 책 이름을 알려주더라도 도서의 위치를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선생님께서 가르쳐준 적은 있었지만, 그 책을 도서관에서 찾기가 어려웠다. 책 이름이 ‘가나다’순이 아니었으며, 책은 분야별로 나뉘었다. 알쏭달쏭 암호같은 색인번호는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내가 도서관을 꺼리는 이유가 됐다. 조용해야 했기 때문에, ‘외국어, O-3’의 책 위치를 혼자서 찾을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서 내가 원하는 제목의 책을 찾은 적이 없다. 그냥 도서관을 거닐다가 찾고 싶었던 책과 비슷한 제목의 책을 빌리곤 했다. 서점에 가면 책 제목을 알려주면 그 책이 있는 곳을 알려주거나 심지어 책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국민학교 시절 도서관에 간 기억은 10번이 안되는 것 같고, 중학교 고등학교때는 더 적었던것 같다. 교학사나 스쿨서점처럼 책 읽는 것이 자유롭게 허용된 서점이 더 가까웠고 더 좋았다. 위인전이나 소위 대단한 사람들은 책에 파묻혀 살았다고 한다. 책만 읽기 시작하면 몸이 꼬이고 좀이 쑤신 나로서는 따로할 수 없는 ‘넘사벽’이었다. ‘어떻게 그럴수 있지? 밤을 새워 책을 읽으면 어떻하지? 도대체 얼마나 재밌길래?’ 그들이 이야기한 책들을 집어들었지만, 단 한권의 책도 나를 밤새게 만들어주지 못했다. 중학교때는 시립도서관, 도립도서관, 학생도서관 등을 다녔다. 도서 대여목적으로 다닌것은 아니다. 내가 ‘색인별 분류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모르면 물어보면 됐을 것을, 그게 뭐라고, 그게 모르는게 부끄러운게 아니었는데, 그 때는 그랬다. 도서대여가 아니라 열람실을 이용하기 위해서 자주 찾았다. 거의 매일 다녔다. 칸막이가 있는 자리는 독서실 모양이었다. 앞과 좌우가 막혀있기 때문에 고개를 들더라도, 주변을 살펴보더라도 방해할만한 것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짙은 갈색의 칸막이만 있을 뿐이다. 숙제를 하거나, 시험공부를 하거나, 교과서를 다시 읽을때 무척 용이했다. 내가 읽었던 책은 교과서뿐이었다. 문제집과 참고서, 그외에 고전이나 인문학도서는 전혀 읽지 않았다. 사춘기 시절 풍부한 감성을 자극할만한 ‘쉬운 책’이 없었다. 교과서, 문제집, 참고서 이외에 내게 도움되는 책은 없다고 단정했다. 지식을 배우고 싶으면 사람에게 배워야한다고 믿었고, 독학은 비전문적이라 판단했다. 요약하면 ‘끈기와 이해력’이 부족했다.

중학교 1학년때부터 독서실 칸막이 형태의 공부 환경이 나에겐 딱 맞았다. 작은 칸막이 안에 오래 앉아있는건 자신있었다. 시간 가는줄 모르고 앉아있었던 적은 있다. 그 안에 만화책은 없었다.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만 있을 뿐이었다. 이해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예습은 할수 없었고, 그날 있었던 수업의 복습과 노트필기, 각종 숙제를 해내는 데 아무런 방해없이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물론, 혼자서 도서관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은 ‘농구하러 가자, 뭐 먹으러 가자, 컴퓨터 하러 가자, 축구하러 가자’고 꼬셨다. ‘끈기’가 부족했으므로 쉽게 설득당하고 농구, 컴퓨터, 축구하러 가곤 했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내 공부의 80%는 도서관 열람실이 해주었던 것 같다. 수업시간에 졸지 않고 들었고, 곧바로 도서관 열람실로 갔으니 기억속에 오래 남았다. 적어도 수업시간 내에 논의된 내용 (in class discussion)에 대한 단답식 문제에 대해서는 담당 과목 선생님이 놀랄 정도로 잘 맞췄다. 그래서 중학교 때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이었다. 전교 1등은 아니었지만, 차이가 크지 않았다. 반에서 1등을 줄곧 한건 아니지만 상당기간 1등도 해봤다. 공부가 쉬웠다. 아니 중학교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쉬웠다. 수업시간에 잘 듣고, 복습하면 그 뿐이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는 너무 쉬웠고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수업시간내에 논의된 내용에 대해 단답형 평가를 하는데 있어서 ‘학교 - 도서관 열람실’ 프로세스는 최소한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고 최대 효과를 발휘했다. 그랬다. 그렇다.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트렸다고 판단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긴 했지만, 시험성적이 좋은 학생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 수학능력이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원인은 다양했지만 공부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시험공부에만 익숙해진 탓이라 본다. 하지만, 그땐 그걸 몰랐다.

고등학교 수업과 중간고사 기말고사 방식은 다를바 없었지만, 내가 도서관을 찾는 횟수가 현격히 줄었다. 야간 자율학습이 있었기 때문에 주중에는 도서관을 찾을수가 없었다. 주말에는 할일이 많았다. 그냥 할일이 많았다.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기도 해야했고, 농구도 해야했고, 그냥 놀기에도 바빴다. 학교 수업시간 좌석 그대로 그 좌석에서 밤 12시까지 자율학습을 하는 것이 능률적이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집중하지 않는 빈도가 늘어났고 혼자서 복습할 수 있는 분량이 ‘용량초과’였다. 한계에 달했다.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때 진도가 다 끝내야 했으므로 수업진도는 정말 빨랐다. 정신을 차릴수 없을 정도였다. 고등학교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날씨도 좋았다. 봄이면 봄이라서 좋고, 여름이면 여름, 가을이면 가을, 친구들도 좋았다.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은 공부를 잘해서 좋고, 공부 안하는 친구들은 재밌어서 좋고, 그냥 다 좋았다. 노는것도 좋았다. 처음 마시는 ‘술’의 느낌도 좋았다. 야간 자율학습 몰래 빼먹는 것도 좋았다. 야간 자율 학습 이후에 노는 것도 좋았다. 친구 하숙집에 모여서 노는 것도 좋았다. 중학교 시절 공부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었다. 성적이 아주 나쁘진 않았지만, 점점 지쳐가다는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12년의 공부에 초점을 맞춰있다보니 체력조절에 실패했던 것 같다. 언덕을 오르고, 내리막을 걷고, 다시 계단을 오르내리고, 막히기도 한다. 막힌 길은 돌아가야하기도 하는 그 시절을 너무 얕봤다. ‘다음중 xx내용으로 옳지 않는 것은?’이라는 문제에서 막혀서 돌아가는 ‘학창시절 공부의 곡선’을 잘 몰랐다. 야간 자율학습 이후에 독서실을 다시 찾은 것은 고등학교 3학년때였다. 정확히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훈민정음 독서실’을 찾았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중학교 시절 시립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칸막이’가 그리웠다. 왠지 거기서 공부하면 더 잘될줄 알았다. 처음 독서실에 발을 내 딛었을때가 아직도 생생하다. 출입체크하는 총무가 있었고 내 좌석을 안내받았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으므로 ‘바닥에서 잠을 자는 학생’들도 있었다. 칸막이 좌석이외에는 캄캄했으며 너무 조용했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출입문 여닫는 소리만 있을뿐 대화소리라곤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어디인가? 내가 선택한 곳이 이곳인가? 왜 사람들이 독서실에 가는거지?’ 신기했다기 보다는 무서웠다. 그럴리 없겠지만, 공부하는 도중 뒤에서 뭔가 나올거 같은 섬뜩함? 너무 조용해도 방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생활 소음, 적당한 소음, 중학교 시절 공공 도서관 열람실에서 느꼈던 편안한 느낌은 온데간데 없었다. ‘왜 이리 더워? 좀 답답한데? 음료수 좀 마시고 올까? 친구들은 뭐할까?’ 전에 없던 산만함이 생겼다. 당연히 집중력도 떨어졌고, 늦게까지 독서실에 다녀오느라 잠은 부족해지고 일정한 공부리듬에 변화마져 생겼다. 2개월 가량의 독서실 생활은 공부 절대 시간 확보가 곧 학습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오히려 그 시절 잠을 더 자고, 수업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지나고 나서, 고등학교 교과목에서 새로운 지식을 공부하지 않았다(적어도 그 시절, 내가 다니던 그때는 그랬다) 2학년 2학기가 마무리되면서 고등학교 2학년과 3학년생은 같은 수준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은 지난 2년간 배운 내용을 되풀이하고 문제에 적용하고, 끈기를 키우는 그야말로 막판 스퍼트 시기였다. 그 시기에 잠을 줄이는 선택이 잘못됐지만, 후회는 없다.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다. 좋은 경험을 했고, 수능시험이후 여러 입시나 큰 시험을 앞두고 잠을 줄이는 선택은 하지 않았다. 암기를 위해서는 적절한 수면이 필요하다. 잠은 망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기억력을 촉진시킨다. 과학적 근거없는 개인적 경험이 알려준 삶의 교훈이다. 물론 독서실에서의 추억도 있다. 처음 1주일간은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일정시간 이후에 총무 역할을 하는 분도 퇴근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면, 독서실은 놀이터가 되곤 한다. 늦게까지 공부한다는 핑계로 야식도 많이 먹었고, 몰래 몰래 당구장에 가기도 했다. 독서실 그만두기 직전에는 독서실에 가방만 팽개치고 당구장으로 향한적도 있으니 얼마나 짜릿했을까? 살면서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이 있다면, 중요한 일을 먼저하라고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들을 해결하고 나면, 급한일들이 줄어든다. 시간관리 매트릭스라고 하는건데 무엇을 먼저 해야할지 모를때 활용하면 아주 효과적이다. 당구장에 가고, 야식을 먹는 일은 매우 급한 일이다.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하지만, 당구장에 가는 것과 야식을 먹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삶에 영향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하지 않아야 할 일들에 가깝다. 유혹의 손길은 그런 것이다. 두 귀를 막고, 뚝심있게 자리를 지키는 연습이 오히려 급하지 않은 일이다. 급하지도 않다. 오늘 공부 내일로 미뤄도 상관없다. 당장 무슨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1주일이 되고, 한달이 되면 인생의 첫번째 관문인 대학입시에서 큰 일을 만든다. 신앙을 떠나 그게 맞는 것 같다. 노력하지 않고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 다음 관문에서 막힐 것이고, 그 다음 관문, 또 다른 관문 등 인생의 수많은 선택의 관문에서 큰 곤경을 맞이한다. 행동의 우선순위는 ‘10분만 고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 중요하고도 급한 일을 우선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을 해야한다.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을 외면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시한번 중요도와 긴급함을 점검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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