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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호원 Nov 20. 2020

운전면허

기쁨을 나누면 두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

자동차. 나만의 백과사전에서 찾아보자. 차는 미국에서 만들었다. 그런데 미국 자동차는 고쳐써야한다. 그것이 제맛이다. 독일은 1, 2차 세계대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자동차는 이동수단이기 때문에 자동차 산업이 발전했다. 좋은 차를 많이 만든다. 하지만, 뭔가 미심쩍다. 전쟁하면 일본도 만만치 않다. 세계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일본의 군수물자 이동수단은 일본 이외 지역에서도 쉽게 수리가 가능해야 했기 때문에, 일본 자동차는 수리가 쉽고 내구성이 뛰어나다. 이탈리아 자동차는 멋지지만, 이탈리아 물건 가운데 옷은 사입어도 기계는 사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영국 자동차는 재규어다. Beautiful and Fast. 재규어에서 물이 새고, 기어핀이 올라오지 않아 낭패를 본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스차는 차를 만든다. 한국에는 현대 자동차라는 메이커가 있다. 신차 품질은 매우 뛰어나다. 내구성은 약하다. 몇년 지나면 차량 성능이 급격히 나빠진다. 중고차 가격이 떨어진다. 제네시스 전후가 극명히 갈라진다. 국내 판매용과 해외 수출용은 문짝에 사용하는 강판의 두께가 다르다고도 한다. 국내에서 번 돈으로 해외수출에 나선다고도 한다. 기아자동차는 디자인이 훌륭하다. 가장 좋은 차는 프라이드였고, 그것을 따라갈 차는 아직도 없다. 너무 괜찮은 차가 너무 앞선 시대에 나타난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기아자동차를 이야기할 때는 쏘렌토가 있기전과 그 이후로 나눠진다. 나만의 백과사전에서 ‘자동차'를 검색한다면 ‘내마음대로 백과사전’에서 아무말 대잔치가 쏟아진다.

어릴적부터 차 이름은 줄줄 외우고 다녔다. 설이나 추석때 우리집에 오시는 작은어머니께 어머니의 막내아들 칭찬은 입이 마를 정도였다. 차례상 준비하는 동서에게 막내아들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다. ‘집에 차도 없는데, 아버지는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데, 차 이름은 다 안다니까, 뒷 모습만 봐도 차이름을 대 대니까, 정말 신기한것 같애.’ 당신이 시집오던 해에 태어난 나를 끔찍히 아끼셨던 작은 어머니도 흐뭇해하셨다. 서울 강남에 사시는 작은 어머니에게 국민학교 3학년생은 조잘조잘거렸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차는 ‘그랜져'에요. G.R.A.N.D.E.U.R. 그 다음은 콩코드에요. 그리고 캐피탈, 대우에서 만든 로얄살롱은 크기만 크고, 엔진이 텅 비었어요. 엔진이 텅 빈 차는 현대 스텔라가 있는데 그건 몇년만 타면 차가 퍼져요. 프레스토는 단종됐구요. 기아에서 만든 프라이드가 참 괜찮아요. 기름 가득 채우면 서울에서 부산을 가고도 남는데요. 현대 프레스토는 ‘음악에서 매우 빠르게'라는 뜻인데, 차는 별로 안 빨라요. 차라리 일본차 터셀을 베낀 엑셀이 더 나은거 같아요. 대우에서는 현대 엑셀을 이기기 위해 ‘르망'을 만들었는데, 그거 타면 도로로, 망할망 도로에서 망해요. 그렇게 재잘거리던 조카가 신기했을 터이다. 집 근처에는 큰 도로도 없어서 승용차 다니는건 구경할 일도 많지 않았고, 차 정보가 담긴 잡지가 있었을리 만무했는데.. TV에 나왔을리도 없는데..

나의 차 지식들은 정식이한테 배웠다. 3학년때 단짝이었던 정식이는 친형이었던 한식이형한테 배웠다고 한다. 한식이형은 카센터가 꿈이었고, 오토바이는 물론 간단한 차량정비도 가능한 수준이었다. 고등학생이었지만 시내에 있는 카센터에 가서 알바도 하면서 차를 배웠다고 한다. 차량 정비 메뉴얼 공부도 했고, 차 디자인과 내구성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도 있었다. 그런 형을 둔 정식이와 단짝이었던 나는 정식이가 하는 말이 전부였다. 왜냐하면 그랜저와 콩코드를 본적이 없지만,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 떠들어대는 정식이의 자신감과 해박한 지식 앞에 무장해제되고 모든 것을 흡수했다. 정식이 지식은 중학생 수준이었기 때문에 반발할 여지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랜져를 타고 싶은 꿈이 생겼지만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운전면허였다.

어릴적 우리집엔 차가 없었다. 아버지는 줄곧 오토바이만 운전하셨다. 오토바이는 경제적이고 민첩하긴 했지만, 비오는 날이거나 빙판길 등에서는 매우 취약하다. 아버지는 오토바이 운전을 매우 잘하셨다. 125cc배기량의 오토바이를 타셨다. 혼자 출근하실때도 있었지만, 누나를 태우고 출근할때도 있었다. 누나에다 형까지 태우고 출근한적도 있다. 어떨땐 형과 누나가 뒤에 타고 나를 앞에 태우고 출근하신적도 있었다. 동남아 여행을 가면 볼수 있는 오토바이에 여러명 타는 그런 광경이다. 아버지보다 커진 이후 절대 타진 않았지만, 언젠가 다시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다가도 일흔이 넘으신 아버지뒤에 탈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출퇴근 거리가 멀진 않았지만 아주 가끔씩 크고 작은 사고가 있었다. 미끄러져서 오토바이가 부서지는 일도 있었고, 가장 큰 사고는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때였다. 퇴근길에 앞서가던 국도를 달리던 경운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부딪혀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그 사고를 계기로 아버지의 오토바이 출근은 끝났다. 50세를 맞으신 아버지가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타면 안될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리고 차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다. 문제는 우리집에 자동차 운전면허증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 아버지 병간호를 맡은 내게 미션이 주어졌다. 바로 단기간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차를 결정했다. 현대자동차에서 나온 갤로퍼였다. 6인승 RV차였다. 아반테나 소나타같은 승용차가 아닌 승합차였다. 외삼촌 소개로 만난 딜러가 병문안을 왔었고 차에 대한 견적이 오갔다. 그 사이 나는 운전면허를 따야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사실 나는 겁이 많았다. 어떤 일을 주도적으로 하는 편도 아니었고, 특히 운전이나 기계를 다루는 것은 양보가 익숙했다. 특히 아버지의 운수사고를 몇차례 접한 이후 내 영역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친구들 대부분이 고등학교 수능시험이 끝나고 대학이 결정된 이후 기간을 활용해 속성으로 운전면허증을 따지만 나는 그마저도 양보했다. 그러나, 차가 있는데 그것도 갤로퍼라는 멋진 RV가 생기는데 면허증이 없어서 세워두는 일이 생기면 안된다. (지금도 승용차 운전은 곧잘하는 편이지만, 오토바이 운전은 포기했다)

운전면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했다. 학원을 다녀야 하나? 학원에서 배운 면허는 실전용이 아니라던데? 그래도 학원이 확실하잖아. 학원은 비싸잖아. 학원은 얼마야? 40만원? 그러면 혼자 면허시험장 가서 따면? 15만원? 학원은 어디있어? 안동에도 있잖아. 그러면 면허시험장은 어디야? 대구? 칠곡? 경산 하양? 거기가는 버스나 기차 비용은? 주중에 아버지 병실을 지키는 역할을 하다가 주말에는 어머니랑 임무교대를 한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는 마당에 세상 고민이 많은 대학생은 친구들과 주말마다 면허증 고민을 했다. 이미 면허증이 있는 친구들은 수능시험 이후 학원에서 어렵지 않게 딴 경우고, 면허가 없는 친구들은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부름을 받고 면허증을 따야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결정은? 운전면허시험장에 가서 따는 것이었다. 혼자하기 힘들어 성갑이와 같이 시작했다. 당시 보급되기 시작한 PC방에서 과정을 알아보고, 필기시허 접수를 했다. 1주일 이후 필기시험, 결과는? 당연히 합격~ 사실 좀 쉬웠다. 아니 크게 어렵지 않았다. 혹자는 ‘시험보러 가는 길에 잠깐 봤는데, 합격했어요~’라고 너스레를 떨지만, 그럴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어렵지 않게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기능시험을 접수했다. 경북 칠곡에 있는 면허 시험장에서 당당히 필기시험에 합격한 합격증이 포함된 기능시험 접수장을 들고 나는 아버지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다리 깁스, 옆에 계신분은 팔이 부러지고, 각종 교통사고 환자분들이 계셨다. 한결같이 응원해주셨다. 아버지 골절이 가장 심각한 골절이었으므로 가장 오랜시간 입원하셨으므로 자연스레 아버지는 최고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초저녁 잠이 많으셔서 아버지 잠들고 나서 6인실 병실의 나머지 5명과 대학생 나는 자연스레 야식을 시켜먹었다. 절대 그래서는 안되지만, 가끔 소주도 마시곤 했다. 아버지를 제외한 5명과 나, 심부름은 항상 나였고 그게 싫지 않았다. 그분들은 간호사 몰래, 나는 아버지 몰래, 탕수육 같은걸 시켜놓고 소주를 마셨다. 그분들 이야기로 ‘우리는 겉이 아픈 사람이지 속이 아픈 사람이 아니다'고 하셨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특히, 나의 면허 시험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을수 없었다. 단번에 합격한것이 참 대단하고, 기능시험에 대해서도 잘 알려주셨다. 같이 운전면허를 준비하던 성갑이와 달리 나는 기능시험을 연습해볼 방법이 없었다. 성갑이는 집에 포터가 있었다. 결국엔 친구중에 티코를 타던 상석이를 선택했다. 안동과학대학 운동장에서 주전자에 물을 받아 선을 그렸다. 실제 운전면허 기능시험은 언덕넘고, 주행 능력을 테스트하는 S자 코스와 후진 연습하는 T자 코스, 가속구간, 돌발구간 , 평행주차 등으로 구성된다. 가장 큰 감점은 방향지시등의 켜고 끄고, 정지선의 위치, 평행주차에서 이뤄진다. 대학교 운동장에 주전자로 선을 그어놓은 것은 기능시험 대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작 엑셀러레이터와 클러치의 미묘한 움직임, 기어 변속, 후진시 바퀴의 움직임 등의 감각을 익히는데는 조금 도움이 되었다. 상석이의 티고로 몇차례 연습을 하고 기능시험장으로 향했다. 안동에서 칠곡까지 가는 버스비는 5000원 안팎이었다. 첫번째 기능시험이었다. 출발! 바로 감점이다. 왼쪽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았다. 괜찮다. 20미터 앞의 횡단보도 정지선, 너무 앞에 섰다. 5점 감점, 다시 출발, 언덕에서 멈추는 구간, 다시 출발, 지연 출발로 5점 감점, S자로 들어섰다. 선을 넘었다. 바로 5점 감점, 돌발 정지, 비상등의 위치를 확인하지 않아 5점 감점, 그 순간 차량 내부에서 ‘점수미달, 점수미달, 불합격입니다. 안전지대에 차량을 정차하시고 하차하시기 바랍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기계음의 말을 잘 들었다. 그러자 얼마되지 않아, 면허시험장 직원이 달려왔다. 옆자리에 타라고 했다. 시원스럽게 코스를 빠져나왔다. T자 주차 시범을 보여주었고 가속페달구간과 평행주차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끝났다. 그렇게 허망하기도 하고, 정신없기도 하고, 첫번째 기능시험은 보기 좋게 불합격했다. 불합격 도장이 찍힌 수험표, 거기에는 두번째 기능시험 일정이 잡힌 ‘인지'가 같이 붙여져 있었다.

그날밤도 아버지는 일찍 주무시고, 병실에선 다들 나를 위로해주셨다. 나도 위로받았고, 처음이라 어쩔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다음날 상석이를 또 만나고, 그 이야기를 했고, 자세한 코스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응시, 불합격,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T자에서 점수미달이었다. 세번째 도전도 마찬가지 T자에서 점수미달이었다. 문제는 3번째였다. 인생은 삼세판이었다. 세차례 떨어지니, 위로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위로로 들리지 않았다. 기운이 빠졌지만, 면허를 포기할순 없었다. 정말 큰일이었다. 다음번 시험에도 합격할 자신은 없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평행주차에서 5점 감점을 예상해야하는데 아직 나는 평행주차까지 가보지도 못했다. 세번째 기능시험 이후에는 정말 입맛도 없었다. 나는 왜 이렇게 운전을 못할까? 왜 우리집에는 포터가 없을까? 상석이는 왜 똑바로 알려주지 않는거야? 별의별 핑계꺼리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도 그럴것이 성갑이는 이미 면허시험에 합격했다. 임시면호로 연습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포기해야하나? 운전면허 학원에 다시 끊어야 하나? 그러면 친구들의 조롱은? 병실에 계신 아버지의 체면은? 내 명의로 된 승용차 운전을 하고 다니는 지금의 나의 모습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운전면허의 벽'에 막힌 것이다.

드디어 운명의 네번째 시험날이었다. 긴장이 많이 되었고, 떨어지면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의 세차례 시험에서 실수한 부분을 되뇌었다. 출발, 언덕, 굴절, 급정거, 가속, 후진, 그리고 접해본적 없는 평행주차. 네번째 시험? 시작하자마자 방향지시등 실수가 있었다. 급기야 T자 주차에선 턱을 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범했다. 네차례 시험 가운데 최악의 결과다. 같이 따라간 상석이와 성갑이, 그리고 또 한명의 친구 앞에서 보기좋게 네번째 기능시험 탈락을 했다. 친구들은 괜찮다. 그러나, 병실에 가야하는 내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버지는 물론, 모든 사람이 ‘불합격'이라는 단어는 기대하지 않을것이다. 그 기대에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하나? 그것이 고민이었다. 남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면허시험’이 나에겐 왜이리 가혹한가. 그런 고민을 하면서 어느덧 아버지 병실 앞에 다다랐다. ‘권군! 합격이지?’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해버렸다. 얼굴에는 ‘아니오'였지만 입은 ‘네~’라고 했다. 저녁식사 이전에 잠깐 졸고 계신 아버지도 동시다발로 들려오는 ‘축하해 권군~! 역시~!’ 라는 환호성에 잠에서 깨셨다. ‘수고했다'고 했고, 저녁 식사를 나르시는 밥차 아주머니도 ‘축하해요~’, 링겔 교환하러 온 간호사도 ‘축하해요~ 어떻게 학원 안다니고 기능시험까지 합격하셨어요! 나중에 좀 알려주세요!’ 안동병원 6층 정형외과는 나만 빼고 모두 합격을 축하해주었다. 얼떨결에 주어담을수 없는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냥 운이 좋았어요~’라고 짧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오늘은 나 혼자 있을테니 집에 가서 쉬어라'고 하셨다. 평소 같으면 아버지 일찍 주무시고, 재밌는 아저씨들과 술한잔하려고 ‘괜찮아요, 여기서 자면 되요'라고 했겠지만, 그날은 그냥 집에 갔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의 폭풍 칭찬을 뒤로하고 일찍 누웠다. ‘정말 큰일이다' 다음주 다섯번째 시험, 낭패다. 너무 큰 일을 저질렀다. 수능시험 결과를 기다릴때도 소환한적 없는 ‘부처님, 하나님, 예수님, 알라신, 공자님, 맹자님, 각종 유명하신 분들이시여~ 저 면허증 좀 딸수 있게 기능시험 합격하게 해주소서'

다섯번째 기능시험은 그냥 합격했다.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갔었고, 조용히 합격하던 그 순간, 평행주차에서 5점 감점받고 85점으로 시험합격했던 그 기분, 우리 가족은 물론 안동병원 6층 아저씨들은 아무도 모른다.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던 5차 기능시험을 위해서 내가 할수 있는 것이라곤 ‘기도'밖에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친 이후 방학이었기 때문에 상석이도 운전병 군입대를 앞두고 있던 시기라 ‘너 군대 가기전에 나 면허 따는거좀 도와줘'라고 하기에는 너무 염치가 없었다. 1주일동안 운전연습 한번 안하고 마음을 비우고 임한 5차 기능시험, 정말 마음을 비웠다. 마음을 비우니, 운전하는 내 모습이 보였다. 정말 보였다. 그리고 나에게 코칭을 하더라. 출발시엔 좌측 방향지시등, 정지선에는 안전하게 멈춰라, 거리감이 없다면 조금 멀리서 섰다가 조금 앞으로 조금씩 움직여봐. 그리고 귀를 기울여, 통과라는 메시지가 나오니까 그게 나오기 전까지는 움직이지마. 언덕에선 알지? 클러치를 깊게 밟고 아주 조금씩 떼면 돼. 굴절코스는 좌우를 살피고, 오른쪽 끝에서 왼쪽으로 가는 거야. 곧 급정거가 나온다. T주차, 5점 감점 생각해. 직선 주행코스에서는 기어 변속이 핵심이니, 느려도 좋으니 클러치를 깊게 밟어. 평행주차는 ‘권호원 니 감을 믿어봐' 타이핑으로 이 단락을 써내려가는 시간 정도의 시간 안에 합격이 결정되었다. 응원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는 나만의 시험을 나는 통과한 것이다. 응원하는 사람 한명도 없었고, 아버지 병실에도 몇몇분은 이미 퇴원했기 때문에 이제 ‘권군의 운전면허증 따기'는 관심 밖이었다. 아버지도 많이 회복하셨고 퇴원 이야기가 오고 가는 분위기였다. 나만의 전략으로 기능시험에 합격한 나의 이 자존감, 나를 향한 나의 자신감은 정말이지 고난의 1주일을 보상해주기엔 충분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도로주행은 아주 여유있게 마무리했고, 열흘 가량 이후에 운전면허증이 나왔다. 그리고, 기다리던 우리집 첫 차는 내가 시운전을 맡았다. 아버지 퇴원을 도와준 겔로퍼, 퇴원이후 아버지 출퇴근을 시켜준 겔로퍼, 방학기간 아버지 출근 이후 겔로퍼와 나는 온동네 나들이를 다녔다. 아버지 퇴근 시간에 맞춰 돌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어머니 시장볼때도 큰 역할을 했다. 여름방학에는 친구들과 가까운 계곡을 가기도 했다. 아버지가 쉬는 날이면 또 산으로 들로 다녔다.

아직도 아찔하다. 예상치도 못했거니와 의도치도 않았던 작은 거짓말로 인한 고난의 1주일, 그리고 마음을 내려놓는 방법을 알려준 5차 기능시험. 다시는 그런 과정을 겪고 싶지 않다. 누군가가 도와준 것임에 분명하다.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굳이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1차~4차까지 기능시험을 보면서 운전실력이 향상된 것이었다. 4차 시험 이후에 길거리에 다니는 차를 보면서도 ‘내가 운전한다면 좀 더 나을텐데'라는 자신감이 생긴걸 보면, 합격할 때가 되어서 합격한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운전면허를 취득한 내가 아직까지 사고없이 운전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혹독한 시험과정이 있어서가 아닐까.

웃으면서 회상하는 이런 일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은 아닐것이다. 앞으로 남은 많은 세월들에서 그런 일들에서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법은 없다. 가능성은 도처에 열려있다. 내 상황을 모른채 주변인의 시선에 의해서 부화내동하는 경우에 그런 웃픈일은 또 벌어진다. 나 뿐만 아니라, 아직 스무살의 운전면허증을 겪지 않은 너희들에게도 가능성은 열려있다. 슬픈 일도 아니고, 말못할 일도 아니다. 그저 삶이라는 긴 선(line) 위에 있는, 선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점(point)일 뿐이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이나 어려움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다. 고민과 걱정, 실수 역시 나누면 반이 된다. 나도 그 시절 아버지에게 내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 했더라면 더 좋았을까? 아버지라면 충분히 이해해 주셨겠지만, 그로인해 배운게 있지 않는가.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을 비울 수 있었던 경험. 아버지도 그런 부분을 이해하셨기에 특별히 언급하지 않으셨을 것 같다. 나는 아버지만큼의 혜안이 없으므로, 우리 자녀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늘 좋은 일은 없고, 항상 슬픈 일만 있을수도 없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 그러니 선택은 너희가 하는 것이고, 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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