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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Jan 17. 2019

닿을 것 같지만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어떤 것에 관해.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2018>

1


 어떤 현상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A의 대처를 하지만, 사실은 B를 하는 것이 맞다는 것에 대해서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A일까, 혹은 B일까. 아마도 B라고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A로 행동하게 되는 동인은 대부분 귀찮다거나, 옳은 것을 행할 정도로 정의롭지 못하다거나, 하는 일종의 패배주의가 아닐까. 조금 더 디테일한 예를 들어보자면, 이를테면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무단횡단을 하거나, 일회용 컵을 사용하는 행위이다.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신호를 지켜서 건너고, 텀블러를 사용하는 것이 환경에 좋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한다.


 '나 하나쯤이야.'라는 태도는 오랜 시간 지양해야 할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이런 태도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자면, 나 하나가 변한다고 이런 잘못된 풍토가 변하지는 않는다. 심지어는 내가 열심히 주변인들을 설득하여 100명의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된다고 해서 이 풍토가 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며 혼자의 힘으로는 구조를 변화시키기가 아주 힘들다. 그리고 충분히 크지 않은 규모의 다수는 개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물론 그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영향력을 가지고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진보적인 이들의 희망적인 예측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 것을 보니 우리 모두의 폐부 깊숙이 들어찬 공기의 정체는 어쩌면 패배주의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해보았다. 그러니 '나 하나쯤이야'는, 이미 우리의 문화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그런 사회를 살고 있다.


 B로 행동하는 것은 올바르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쉬운 일일지라도 그렇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하니 이것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올바르게 할 정도로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B로 행동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행동하는 A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A로 행동하게 만드는 이유를 단지 미성숙한 시민의식이라는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든다. 모두가 A를 하고 있지만 B의 이야기를 하는 상황에서, A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다소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다.



2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 쉽게 연결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소한 정의의 구현이라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실제 벌어지는 일과 현상의 본질간의 괴리라는 넓은 의미로 방금의 사유를 확장해보면 영화와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장률 감독의 지난 영화들과 비슷한 감성을 공유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 개봉한 그의 영화들 중 레퍼런스로 꼽아보고 싶은 두 영화는 <경주>와 <춘몽>이다. 이 두 영화를 포함해 총 세 편의 영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키워드를 꼽아보자면 '불확실성'이다. 어떤 것으로 수렴하여 하나의 답을 도출해내는 여타 다른 영화들과 달리, 장률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하여 정의하고자 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그대로 흘리듯 풀어내는 것이다. 이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이런 느낌이군요. 그의 영화는 마치 이런 이야기를 넌지시 건네며 은은하게 웃고 있는 작은 체구의 노인에게 뿜어나오는 신비한 분위기를 닮았다.


 끊임없이 감독이 윤영의 입을 통해 반복하는 대사는 '우리 어디서 보지 않았나요?'하는 질문이다. 상대방과 친밀감을 빠르게 형성하기 위해 거짓말을 치는 졸렬한 사내인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영화의 후반부 즈음 가서는 개중에 몇몇은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굳이 이 대사를 여러번 반복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란 무엇인가,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쉽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름의 기준을 세워볼 수는 있겠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명확하고 깔끔한 정의는 아무도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해 정의하려는 시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반복되고 있다. 이 대사는 아마도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시적인 대답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은 그 자체로 대답이 된다. 어쩌면 여러 영화들이 '이미 어디서 본'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비웃음일수도 있다. 가령, 두 영화가 같은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비슷한 결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두 영화를 비슷한 것으로 파악할지언정 같은 것으로 정의할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를 만난 기억이 있다고 해도, 그 때의 그 사람과 지금의 그 사람은 어쩌면 다른 사람이다. 한 번 만나보았다고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과거에 우리가 만난 적이 있다고 해도, 만난 적이 없다고 해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을 통해 앎에 대한 기준을 계속해서 세워나가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즉, 본질에 대한 탐구로 귀결된다. 보는 것은 아는 것인가. 얼마나 보아야 우리는 알 수 있는가. 사람도, 영화도.



3


 답은 끝까지 주어지지 않는다. 만난 적 있어요, 혹은 없어요가 아닌, 잘 모르겠네요. 본질에의 탐구는 반복되지만 영원히 다다를 수는 없다.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밖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영원히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윤영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을 진짜로 만났는지 아닌지를 넘어, 영화에는 그 밖에도 수많은 미스테리가 산재한다. 어두운 밤거리에서 거위의 흉내를 내는 사내, 막걸리 집을 운영하는 묘한 분위기의 백화라는 여인, 송현이 어떻게 이혼했고, 전남편이 지금의 여자친구를 어떻게 만났는지, 윤영과 민박집 딸에게는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아마 감독도 그 진상을 알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와, 우리는 영원히 B에 다다를 수는 없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거기에 다다르고자 해도, 0으로 수렴하지만 절대 0이 될 수 없는 그래프처럼 우리는 계속해 가까워지려는 시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작은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는데,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면, 어째서 거기에 끝끝내 가까워지려고 우리는 노력하는가. 왜 B가 될 수 없는데 B에만 집착하는가. 있는 그대로 A를 받아들이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는가.


 B에 다다르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일종의 패배주의라고 상술한 바 있지만, A가 '현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그러나 분명한 가치가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창조적 패배주의'인 것이다.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물론 매번 무단횡단을 하고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겠건만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누구나, 어느 누구나 가끔은 그런 행동을 하고 살아간다. 이렇게 프레임을 바꾸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의외로 많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니만큼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곳을 마련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훨씬 도움이 되는 행동이다.


 수많은 영화를 찍은 장률 감독도 영화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바라지 않는 마당에, 평범한 관객인 우리가 영화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영화를 더 이해하려고 깊이 파고드는 것보다,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 누군가에게 즐거운 경험을 주고자 하는 처음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확실히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누군가 물으면 영화에 대해 잘 모른다고 대답하곤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영화에 대해 해석하려고 들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영화를 즐기고자 하는 편이다. 항상 실패하는 편이지만.





 영화의 메세지가 생각보다 정치적으로 뚜렷한 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특이한 점이다. 이렇게 흐릿한 영화에서 감독이 정치적으로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방향성이 진보나 보수의 한 쪽이 아니라는 것은 유의미한 부분이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가짜 조선족은 씨발놈아 장사도 안되는데 시간낭비하고 지랄이야 개새끼가, 따위의 쌍욕을 내뱉고, 보수적 성향을 가진 윤영의 아버지는 밤시중을 들기를 거부하는 조선족 가사도우미에게 비하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스스로도 재중동포 출신인 그의 이야기는 그러므로 정치적 발언과는 조금 거리가 먼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추론도 가능하다. 정치란 사실 이렇게나 개인적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바를 크게 내뱉으면 정치적인 발언으로 순식간에 둔갑하고야 만다. 어떻게 여기에 정답이 있을 수 있을까. 개개인의 경험을 존중하는 시대에는 개개인의 정치 성향도 존중받아야만 할 것이다. 여기에 정답은 없다. 나만의 답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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