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즈 리턴(キッズ・リターン),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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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보내며 시간이 빌 때면, 영화를 재생하는 것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틈틈히 영화를 보는 것은 다양한 영화를 섭렵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긴 하지만, 10분, 20분씩 끊어서 영화를 보는 습관이 생긴 이후로는 때때로 시간이 통째로 빌 때도 영화를 끊지 않고 보기 힘들어지는 부작용도 함께 생겼다. 매일 영화를 보다 보면 권태기도 생기기 마련이다. 영화 하나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새로운 영화를 계속 틀곤 한다. 류승완의 <베를린>은 아직도 끝까지 보질 못하고, 오프닝 시퀀스만 벌써 열 번을 넘게 봤다.
요즈음은 이런 현상이 더욱 심각해졌다. 첫 30분만 본 영화가 벌써 일곱 가지나 된다. 극장에 가지 않고서는 앉은 자리에서 영화 한 편을 끝내기가 어렵다. 어쩌면 나는 이제 영화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걸까 내심 걱정을 하기도 했지만, 나를 끝까지 자리에 앉혀놓을 영화를 아직 만나지 못한 것 뿐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새벽 4시, 피곤이 몰려와 눈이 감기는 와중에 보기 시작한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앉은 자리에서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중간에 끊어 본 기억이 없다. <소나티네>도, <기쿠지로의 여름>도, <아웃레이지>도,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도, 선혈이 난무하는 야쿠자 영화와, 평화로운 여름의 한 때를 그리는 청춘 영화를 넘나들지만 묘하게 같은 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납득하게 되고야 마는 그의 영화는 한 번 재생하면 좀처럼 끊기 어렵다. 어떤 화려한 연출이나 섬세한 스토리텔링도 없는 우악스러운 전개 방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이토록 매력적이다. <키즈 리턴>은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권태기, 혹은 영화 불감증을 끊게 만든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고마운 영화로 기억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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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영화의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이를테면 데이빗 핀처나 대니 보일, 가이 리치의 영화는 어떻게 한 사람이 이토록 복잡한 층위를 쌓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시킬 수 있는지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마치 손목시계의 작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듯 완벽하게 짜맞춰진 영화에 감탄하게 되는 것은 물론 즐거운 경험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못한 채 사장되어가는 수많은 영화들의 패인은 아마도 충분히 복잡하지 못했던 탓일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간 영화들, 80-90년대의 이른바 '명작' 영화들을 보고 있자면 생각보다 단순하고 뻔한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회자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 당시에는 신선한 구조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비약해서 복잡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조금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한국 영화들은 병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이야기를 복잡하게 꼬는 것에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끝까지 간다>와 같은 작품은 그런 시도를 통해 훌륭한 결과물을 만드는 데에 성공한 케이스에 속하지만, 대부분의 다른 영화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억지로밖에 보이지 않는 반전은 왜 계속 넣는걸까. 물론 한국영화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각설하고,
중요한 것은 영화의 작품성이 얼마나 더 복잡한지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영화들은 놀라울만큼 단순하지만 놀라울만큼 매력적이다. 단순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호소력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메세지가 간결할수록 뇌리에는 더 길고 강렬하게 남는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일종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말 영화를 담백하고 깔끔하게 만들지 않는 이상 그냥 유치하다고 느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할 경우, 이런 '의도적 단순함'을 지닌 영화는 시대가 지나면 식상하게 느껴지는 '복잡한 영화'보다 더욱 길게 살아남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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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단순한 영화를 잘 만드는 감독을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꼽자면 몇 명 되지 않아 기타노 다케시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물론 함정도 조금 많아보이지만) 압도적으로 단순하다. 대사도 최대한 덜어내고, 인과관계나 상황 설명도 최대한 덜어낸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서는 심지어 주인공이 말을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주변 사람들이 빈 오디오를 채우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다들 조용해진다. 대부분의 요소를 전부 덜어내는 이런 독특한 연출 방식을 통해 우리가 집중하게 되는 것은 결국 인물의 역동성이다. 극중에서 배우의 모든 움직임은 다른 영화들보다 특별히 과도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역동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무언극에서 배우들이 몸짓으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담백한 느낌이다.
단순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을 꼽아보자면 아마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을 빼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다'는 속성을 제외하고는 두 감독의 스타일은 대척점을 이루고 있는데, 타란티노는 사실 단순한 척을 하지만 복잡하고 복잡하게 꼬아서 수많은 대사와 파격적인 장면 구성을 통해 일차원적 쾌감을 주는 의도적이고 기술적인 연출을 하고, 다케시는 하나의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들을 들어내는 소거법적 연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속한 국가적 특성과 연결해보자면, 타란티노가 아무 재료나 때려넣고 소스와 치즈를 잔뜩 부어 구어낸 피자라면, 다케시는 찻잎을 깊이 우려내어 궁극의 맛을 추구하는 차와 같다. 다케시가 추구하는 것은 이런 담백함이다. 이런 단순함은 할리우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종류의 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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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즈 리턴>은 부유하는 청춘에 대하여 다룬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가끔 교차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정한 삶의 방향으로 곧장 뻗어나간다. 이런 다수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은 주로 겹치는 그 시점에서 대부분의 사건이 벌어지거나, 혹은 결국 한 점에서 모이는 것으로 영화의 마무리를 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겹치는 부분에 별로 관심이 없다. 가끔 겹치기도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은 사건이고, 영화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곧게 뻗어나가는 이들 각자의 이야기이다.
만약 당신이 영화가 조금 간이 덜 된 것처럼 심심하게 느낀다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조금 안타깝고, 때로는 미소가 지어지는 청춘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것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영화에서 시선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단순한 이야기의 매력은 이런 것이다. 조금 뻔하고 지루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의외로 이들에게 깊게 감정을 이입하고 집중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야 만다. 지루함이라고 느껴지던 감정은 사실은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다.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고 바보같은 선택을 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과 아주 꼭 닮아 있다.
혹은 당신이 이 영화의 인물들에 자신의 모습을 쉽게 투영하지 못할지라도, 이들을 싫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는 주변 인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답답하기도 한 이들이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무해하다. 영원히 자라지 않을 것처럼 순수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싫어하고 삶에 비관적인 부정적 관객들, 이를테면 나같은 사람에게도 '진정성'있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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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담없이 수용할 수 있는 영화에 머무른다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영화로 기억되기에 그칠 것이다. 영화의 백미는 가장 마지막에 있다. 나는 감독의 목소리가 영화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큰 거부감을 느끼는 편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걸 영화로 굳이 만들어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에 환멸을 느끼는 편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그런 작위적 사용은 허용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긴다. 이데올로기를 담은 영화들이 그렇고, 혹은 정치적이지 않더라도 교조적인 냄새를 풍기는 수많은 꼰대적 영화가 그렇다.
이 영화의 엔딩에 위치하는 대사는 그러나 등장인물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오히려 감독의 목소리에 가깝다. 사실은 이 이야기를 하려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을 좀처럼 숨길 의지가 없어 보인다. 어쩌면 아무 생각도 없는 바보의 이야기일수도,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이건 정말 아무 생각도 없는 바보가 맞다. 하지만 누가 과연 이 말을 듣고 얼굴을 가득 채우는 뿌듯한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자는 가르침 따위와는 전혀 다른, 심지어는 영화를 보는 관객이 아닌 자기 자신한테 소리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삶 그 자체에 대한 압도적 긍정. 반드시 나는 마지막에 웃고 있을 것이라는 바보들의 벅차는, 그 깨끗하고 맑은 우렁찬 외침은 반드시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은 그렇게 되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