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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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이야기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어느 정도 공통점을 가진다. 신이 여러명 있는 종교에서도 결국은 유일신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있다거나,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기독교 이외에서도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거나 하는 모습이 그렇다. 그래도 핵심 가치는 조금씩 다르기 마련이지만, 수많은 신화에서 나타나는, 특히 서브컬쳐 쪽에서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낼 때 애용하는 텍스트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창조와 파괴는 본질적으로 맞닿아있고, 어느 쪽이 이길 지 힘겨루기를 하고 있으며, 또 다른 존재에 의해 중재되고 있어 균형을 맞춘 상태가 지금의 세계라는 개념이다. 개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인도의 신화가 아닐까. 창조의 신 브라후마가 세상을 만들고 파괴의 신 시바는 언젠가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며, 그것을 중재하는 신이 비슈누라는 인도의 신화는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자세한 개념까지는 몰랐다고 해도 신의 이름 정도는 한 번 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모든 문화의 근원이 된다고 여겨지는 신화의 메타포는 여러 방식으로 변용되어 현대의 이야기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만약 나우시카가 비슈누 신을 상징한다고 이야기한다면 잘못 가도 한참 잘못된 접근이겠지만, 분명 인도의 신화에서 비롯된 불교가 아시아권 문화에 끼친 지대한 영향은 고대 그리스가 로마를 넘어 기독교 문화로 거듭나 서구 전체의 근본 사상으로 자리잡은 현상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나우시카가 마지막에 몸을 던져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세계의 종말을 막아내는 것은 요리 보고 저리 봐도 물구나무를 서고 봐도 기독교적 메타포지만 그건 또 일본 문화에 기독교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고, 어쨌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다분히 신화적인 메타포를 차용하는 (심지어는 신이 대놓고 등장하는) 이런 이야기에서 사유의 근원이 어디인지 찾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다. 모든 이야기는 그 작가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의 문화적 뿌리를 통해 양분을 얻어 자라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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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야기는 그 크기를 점점 줄여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공의 성 라퓨타>와 <모노노케 히메>등에서 세계의 위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데 반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 특히 <벼랑 위의 포뇨>에 이르러서는 다분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 스케일이 작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새로운 상상력으로 구현해낸 신비로운 세계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지브리의 가장 초기작으로써, 미야자키 하야오의 생각이 오롯이 담긴 작품 중 하나이다.
그의 이야기가 정치적이라는 의심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향에서 온다. 대체로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비유를 통해 현실 세계를 비판하기 위함이고, 그런 의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문제의식이 묻어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현실 세계를 모사하고 과장하여, 혹은 오히려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정반대의 세계를 그림으로써 반어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드러내는 묘사는 비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할 때 확실히 효과적이다. 이를테면 <해리포터>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현실을 비판하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은 조금 비약이 있어 보이지만, 그 면면을 뜯어본다면 작가가 가지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풍자하기 위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떤 세계를 이야기하며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불합리를 언급하고자 하는 욕구를 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는 더더욱 그렇다. 영화의 배경은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인류를 멸망시키고 나서도 아스라이 남아 있는 적은 수의 인류마저도 다시금 멸망시키고자 하는 인간들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철학자들이 세계의 모순을 이야기하기 위해 리바이어던이나 이상국가, 유토피아를 상정한 것처럼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키기 위한 부수적인 도구로 영화를 사용한 것으로 봐도 무관하지 않을까.
나는 자신의 논리를 설파하고자 영화를 사용하는 감독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이데올로기의 하수인이 아닌 예술로써 남아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예술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형식을 통해 담아내는 도구인 것은 명확하다. 자신의 메세지를 담지 않은 예술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선동인지, 예술인지 그 미묘하고 애매한 차이를 가르는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 어떤 영화를 무엇으로 구분할 수 있을지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뿌듯하게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예술의 결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는 부분이다. 아무리 도발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을지라도 그 자체로 매끄러운 완성도를 지닌다면, 그의 사상에 비판할지언정 작품성에 대해 호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영화를 '잘'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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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무'라는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오무란 멸망한 세계에서 일종의 신화적인 존재로, 세계를 멸망시킨 주범이자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경우 곧바로 응징하는 수호자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모노노케 히메>의 사슴신과 비슷한 존재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자연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는가, 혹은 자연재해처럼 무작위하게 나타나는가의 두 가지 방향성 중 하나를 택하는 데에 비해, 이 영화에서의 오무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세상을 멸망시킨 자연재해와 같은 존재는, 인류와 소통하는 것이 불가하지만 나우시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들의 의지를 드러내고 소통 가능한 인격체로 거듭나게 된다.
의지를 가진 자연은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존재가 된다. 서구 기독교에서 출발한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은 자연을 개발하는데 사상적 논거를 제공함으로써 환경오염을 가속화시키는데 일조했고, 서구 열강이 세계를 지배하며 전 지구가 서구화되는 흐름은 작금의 환경에 대한 인식을 만들고야 말았다. 그에 반발하여 나타난 환경보호론적 입장은 주로 아시아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사조의 일환으로 자연이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라는 자연보복설이 극단적 자연주의자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이 능동적인 자정작용으로 인류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푸르름을 회복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아닐지라도,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을 통해 황폐화된 나머지 더 이상 어떤 생물체도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인류 전체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고, 자연의 황폐화를 막기 위한 여러 노력을 불러일으켰다.
오무는 결국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는다. 나우시카라는 개체의 희생을 담보로 하긴 했지만, 인류의 갱생 가능성을 다시금 믿고 기회를 준 것이다. 어머니 자연은 이처럼 우리를 품어주고 있는가. 우리의 과오를 끝없이 용서해줄것인가. 자연은 말이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희망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야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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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며 캐릭터나 상황이 상징하는 것과의 일대일 연결을 의도적으로 지양해보고자 했다. 나우시카에, 오무에, 토르메키아에, 페지테에 상응하는 개별적 현실세계의 존재를 배제하고, 영화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자 한다. 의도적 연결은 자의적 해석을 (그것이 감독이 의도하는 바라고 할지라도) 불러일으키고 도식적으로 드러난 결과를 통해 교조적 태도를 견지하게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비판을 받는 이유 중 대부분은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일종의 구원자적 존재인 나우시카의 희생을 통해 뭉뚱그려 해결을 보는 방향으로 결말을 냈다는 점이다. 현실 비판을 위한 모든 발판을 마련해놓고 마지막 순간에 구원자적 존재의 등장으로 인해 우화적인 방법으로 책임을 회피했다는 주장이다. 맹점은 현실 세계에는 구원자가 등장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감독의 바라는 바가 담긴 희망적인 메세지의 전달이다. 세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으면 하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내가 이 영화를 개별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고, 자연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인간들은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이걸 통해 직접적인 비판을 하고자 하지는 않고, 그냥 사람들이 모두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안 그랬으면 좋겠다 하는 완곡한 제안을 할 따름이다. 말하자면 인류의 갱생 가능성에 대한 또 한번의 낙관이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반응이 느리고 거대하다는 속성 상 자연이 소모되어가고 위기에 처한 것을 직관적으로 알기는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 속으로는 환경 문제에 대해 항상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품으면서도 책임 소재가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명쾌한 답을 제공해주지는 못할지언정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 작품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꾸준한 작품 세계는 그 자체로 충분한 영향력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