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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Mar 18. 2019

나는 나도 특별한 사람일 줄 알았지.

<프랭크(FRANK),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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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긴 어게인>의 인기와 OST의 저력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의 만듦새가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는, 평범한 인물들에 대해 다루는 이야기인 척 하면서, 사실은 엄청난 실력을 지니고 있는 재야의 은둔고수를 주인공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불운한 천재에 관한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대중에게 닿기만 한다면 바로 인정받을 실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말 재능이 없는 진짜 평범한 나는 어떻게 해도 안되겠구나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해도 꼬여도 참 제대로 배배 꼬인 성격이다 싶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산다.


 내가 좋아하는 건 오히려 죽을 만큼 노력을 해 봤자 천재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하는 평범한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로 씁쓸한 결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인물의 이야기야말로 오히려 내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세상 만사가 그렇겠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재능의 비중이 무엇보다 압도적이다. 노력한다고 해서 재능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어떤 것인지 정도야 통계와 표본 조사를 통해서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만들 수 있는 작업물이라곤 지금까지 이미 누군가 했던 것들의 반복에 불과하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새로운 결과를 내놓는다는 것은, 뇌 과학으로 증명된 만큼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창의력의 영역이다.


 <비긴 어게인>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프랭크>는 지금까지의 음악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결을 지닌다. 주로 희망적이고 진취적인, 가능성에 대해서 주로 다뤄 왔던 음악 영화들과는 달리 예술에서 재능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를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뒷맛이 씁쓸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훨씬 좋다.



2


 한국에서 ‘잘 팔리는’ 영화란 대체 뭘까. 그나마 <곡성>의 성공으로 요즘에는 그런 공식도 많이 깨졌다지만, 적어도 영화 홍보를 담당하는 배급사들에게는 지켜야 할 일종의 공식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감히 해본다. 실제 영화와 전혀 다른 감성을 지닌 홍보로 인해서 피를 본 영화는 많지만, 이 영화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자면 아마 <판의 미로: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와 <지구를 지켜라>를 들어볼 수 있을 것 같다. <판의 미로>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잔혹 동화를 흡사 해리포터를 연상시키는 환상의 판타지 월드처럼 보이게 만들어 놓았고, (심지어는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라는 어드벤처성 짙은 부제까지 사족으로 달았다.) <지구를 지켜라>는 장준환의 비릿한 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부조리극을 좌충우돌 코미디로 만들어 놓았다. 다행히 나는 이 일련의 사태를 소문으로 익히 듣고 이 두 작품을 감상했지만, 포스터와 홍보 문구만 철썩 같이 믿고 극장으로 향한 사람들의 당혹감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프랭크>라는 영화의 성격을 굳이 정의하자면 현실의 씁쓸함을 풍자한 블랙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홍보 문구는 ‘똘끼충만 천재 뮤지션’. ‘無재능 열혈 작곡가’, ‘우리 존재 파이팅’이었다. 홍보 문구에만 의존해 영화의 성격을 예상한다면 아마 이 영화에 크게 실망할 것이다. 근본 없는 ‘똘끼충만’ 같은 은어는 참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이제 요즘 아이들은 기억도 못하는 ‘빵상아줌마’의 철 지난 유행어라니. 이런 묘한 분위기의 영화를 보게 하기 위해 실제로 티켓을 사 줄 일반 관객들을 극장에 앉히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초점이 어긋나있다면 이건 거의 사기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3


 천재의 생각이나 행동은 주로 예측할 수 없는 새롭고 돌발적인 속성을 지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런 천재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규격이 되고야 말았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천재들은 대다수가 <셜록>의 셜록 홈즈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다. 부족한 사회성과 공감 능력, 뛰어난 재능, 냉소적인 태도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프랭크는 천재로 분류될 수 있을 테지만 일반적인 천재의 모습과는 닮은 듯 다르다. 그는 사회성이 부족하지만, 그의 부모님에 의하면 그의 부족한 사회성은 음악적 재능과 별개로 존재하며 오히려 재능을 약화시키는 요소였고, 존이 보여준 팔로워 숫자에 감동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인다. 천재의 속성보다는 정신질환자의 속성이 더 부각된 모습이다.이런 식의 독특한 설정을 비롯해, 이 영화는 여러 부분에서 일반적인 이런 형식의 이야기와는 다른 모습을 가진다. 원래 ‘이런’ 영화는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지 않는다.


 존은 프랭크의 괴상한 모습에 처음에는 놀라지만 그만의 방대하고 견고한 음악 세계에 감명을 받아 그의 제자를 자처하게 되고, 프랭크의 지도편달을 통해 그에게 내재된 재능을 깨달아 각성했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 사건들 이후에 프랭크의 품에서 벗어나지만 이미 충분히 성장한 존은 자신의 능력으로 혼자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것이고, 영화가 끝날 무렵 정상에서 다시 프랭크와 마주한 존은 그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깊은 우정을 자랑하며 이야기를 마쳤어야 한다. 그리고 대단원에 이르러 프랭크의 그 괴상한 가면이 슬로우 모션으로 벗겨지며 끝이 난다면 완벽한 결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존은 눈을 씻고 찾아도 재능이라곤 전혀 없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프랭크 또한 존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가르침을 주긴커녕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기 바쁘다. 진실한 우정 대신 존은 프랭크의 재능을 통해 유명해지는 방법을 택한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물고기를 잡아오는 노예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사실 이런 식의 전개가 방금 말한 ‘일반적인’ 영화의 전개보다 훨씬 현실과 맞닿아있다는 것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는 말처럼 재능 있는 인물을 발견한 세상은 그들에게 무언가 배우려고 하기 보다는 그 재능을 이용해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한다. 어차피 이 녀석은 돈과 명예보다는 완벽한 작품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어 보이니까, 잘 구슬리고 이용해서 나도 유명해져야지. 제대로 잡아서 나도 대박 한 번 쳐봐야지. 이런 실제 사례들을 주변에서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실세계에 내팽개쳐진 천재는 천재라기보다는 정신병자의 지위를 가진다. 왜 재능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분야에서 뛰어난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가 없는 걸까? 왜 웃음과 미소를 팔아 인맥을 쌓고 정치를 하고 ‘똑똑하게’ 행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 




 존을 악역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존은 악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재능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그 밑을 받치고 있는 대다수의,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가질 수 없지만 가지고 싶어 미칠 것 같은 것을 가진 이들을 볼 때, 우리는 항상 깊은 질투와 박탈감을 느낀다. 존이 프랭크를 세상 속으로 꺼낸 이유는 가장 먼저 자신이 유명해지기 위함이었겠지만, 이렇게 좋은 음악을 하는 프랭크가 더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좋은 의도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존의 예상대로라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었다. 프랭크의 음악이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덩달아 자신도 유명세를 타 뮤지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신비롭게 보이던 프랭크의 모습이 그냥 기행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자 대중의 관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식는다. 존 또한 이게 세상의 논리라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을 테지만 세상이 언젠가 다시 알아줄 거라는 순수하기까지 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난 이후에 프랭크는 가면을 벗은 채로 떠났던 자신의 밴드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는 처량하게 악을 쓰며 그들에게 노래한다. ‘I love you all.’ 그리고 반복해서 부르는 프랭크의 고백을 들으며, 쓸쓸히 혼자 떠나가는 존의 뒷모습을 보면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오지 않을 수가 없다. 나도 동료로 인정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 사람에게는, 이 사람들에게는, 나는 아무 의미가 없는 사람이었구나. 애초에 나는 안중에도 없었구나. 나는 이 사람의 인생을 망쳤지만 이 사람은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구나. 나는 원망조차 듣지 못하는, 먼지 같은 존재였구나.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재능이 없는 이들에게 세상은 이렇게나 잔혹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오히려 위로가 되는 까닭은, 없는 재능도 있다고 치켜세워주는 것보다, 차라리 없는 건 없다고 말해주는 게 나으니까, 독이 들어있는 진수성찬보다는, 더럽고 치사할지언정 빵 쪼가리 한 쪽도 나눠주지 않는 게 그나마 나으니까. 


 그냥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어차피 안 될 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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