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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Apr 03. 2019

미야자키 하야오, 나의 친애하는 폭군.

<꿈과 광기의 왕국(夢と狂気の王国),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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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물은 정말이지 신기한 사람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속성을 하나하나 분리해 마주하게 한다면 대폭발이 일어나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모순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내뱉는 모든 말에 확고한 신념을 가진 것을 보아하니 뚜렷한 자아를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아이를 사랑하지만 인간 전반에 대한 혐오를 품고 있으며, 일본을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고, 느긋한 듯 하지만 철저하고, 끝없이 자상하지만 스튜디오의 폭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전투기와 탱크를 좋아하는 '밀덕후'지만 끊임없이 반전 메세지를 역설하고, 공산당을 지지하는 글을 투고하기도 했으나 우익 논란을 매번 달고 다니며, 정치적 메세지를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으나 아나키즘에 가까운 사상을 가졌다. 맨날 은퇴한다고 해놓고 다시 번복하는 것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지브리'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의 이름이 어쩌면 익숙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들이 기억하는 '지브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물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인간으로써의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감독이라기엔 아주, 아주 큰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또 다시 물끄러미 들여다보자면, 모든 작품은 뚜렷하게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물을 가리키고 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천재란 으레 이렇게 모순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와 같은 인물이 있었을까. 물론 있었겠지. 하여튼 참 신기하다.


 내가 이 영화에서 본 것은 지브리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도, <바람이 분다>의 제작과정도 아닌,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사람이었다. 지브리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라기에는 조금 의아할 수 있는 제목 또한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완벽하게 이해가 간다. 꿈과 광기라는 얼핏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부정교합과, 왕국, 즉, 모든 구성요소가 왕을 향하고 있는 절대군주의 국가라는 속성은 그의 모습을 아주 잘 표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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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초반,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그의 모습과, 앞치마를 두르고 인자하고 온화하게 이야기를 건네고, 회의에는 참여하지도 않고 열심히 그림만 그리고 있는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의 이미지와 (외모까지 포함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쉬는 시간에는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고, 라디오 체조를 하며, 귀여운 고양이를 쓰다듬고, 마을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며, 창고에 있는 염소 인형이 외로울까봐 집에 데려다놓는 그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자신의 관성을 유지하여 꾸준히 작업하는 따뜻한 거장이다.


 그러나 성우 발탁에서 기존 성우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에반게리온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를 갑자기 주연 성우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는데도 오타쿠를 '아무것도 안 배우는 사람'이라고 폄하하는 모습, 애니메이터들에게 디테일한 지시를 아끼지 않는 모습, 수면안정제를 먹지 못하면 잠들지 못하는 모습 등은 예민하고 냉소적인 고집쟁이 예술가의 모습이다. 영화에 나오는 지브리의 대표 이사부터 말단 직원까지 모든 이들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왕을 보좌하는 신하들처럼 보인다.


 영화가 완성되는 순간까지 마지막 대사를 고민하고, 자신이 만들었던 작품에 후회만 남는다고 하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모든 생각에 대해 스스로 반문하는 자기모순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어떻게든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한 지난한 사유의 과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떤 쪽에 더 가까운가 하면 이건 그냥 단순한 변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수억원의 돈을 투자해서 만드는 영화에서 각본도 완성해두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그리는 사람이지 않은가. 이렇게 완성해도 좋은 작품을 만들 자신이 있어서일까?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그냥 하는 대로 하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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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가장 최근작 <바람이 분다>까지 그의 작품을 주욱 흝어보고 있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순적인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주로 이용하는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 이를테면 공중을 뛰어다니거나 날아다니는 모습, 는 답습될지 모르나, 과연 같은 감독이 만든 것이 맞는 걸까 할 정도로 들쭉날쭉한 선과 메세지를 담은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붉은 돼지>와 <벼랑 위의 포뇨>가 같은 감독 작품이라는 걸 상상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닐테다. 특히 그 모순적인 요소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을 하나 꼽자면 아마 <모노노케 히메>일 것이다.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는 진정한 의미로써의 '자연 상태의 모순'을 그대로 묘사한 이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라고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군가 한 번 내뱉은 말로 그 사람에 대해 쉬이 규정하고 낙인을 찍곤 한다. 그러나 타인이 자신을 그런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불쾌해한다. 어째서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가 되기를 타인에게 기대받고, 동시에 스스로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내 자신을 부정하는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기 마련이다. 매운 걸 전혀 못 먹는 나는 가끔 굽네 볼케이노 치킨을 시켜 먹고 싶어진다. 비린 건 입에도 못 댄다던 A는 게걸스럽게 생굴을 파먹었다. 오이를 못먹는 B는 여전히 오이를 못 먹지만 어쨌든 끝없는 자기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건 아마 고등동물인 인간 종의 핏줄에 새겨진 숙명이리라. 그러니 '나다운 것'이란 개념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으레 그렇게 하게 되는 경향성이야 발견될 수 있지만 내가 백 번 너와 입을 맞추었다고 영원히 너와 함께할 맹세를 한 것은 아니다. 나다운 것. 나다운 게 뭔데. 니가 나에 대해 뭘 알아. 그건 니 생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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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는다. 비록 지금의 은퇴 선언을 나중에 번복할지라도, 그 말이 거짓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적어도 내뱉는 순간에는 그의 입에서 태어나는 모든 단어는 있는 힘껏 진심이다. 마치 거대한 진자가 왕복 운동을 하듯, 왼쪽 끝까지 올라갔다가는 오른쪽 끝으로 간다. 그리고는 다시 왼쪽 끝으로 돌아가겠지. 때로는 조금 덜 가기도 하고, 때로는 앞으로 뒤로 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을 꽉 붙들고 있는 끈이 끊어질 염려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나고, 이 모든 것이 나이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가 들쭉날쭉하다고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필모그래피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고 내려가자면, 아, 역시 이거 전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게 맞네. 하고 긍정하게 된다. 나는 감독과 그 특유의 그림체를 숨기고 그의 작품을 보더라도 단번에 그가 만든 영화라는 것을 맞출 자신이 있다.


 그가 어떤 이야기를 꾸준히 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 기저에 깔린 생각이 결국은 하나로 수렴되기 때문일까. 아마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보다는 오히려 오랜 세월동안 흔들린 그의 궤적이 결국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어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이제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라도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감독의 냄새가 항상 짙게 풍겨온다.


 그러니 '나다운' 것이라는 것은 결국 자연스럽게 완성되는 것이다. 굳이 성격 검사까지 해가며 그래 나는 INFP형이야! 그러니 앞으로 INFP다운 삶을 살겠어. 하는 규명의 과정이 없이도,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이윽고 내가 된다. 굳이 힘을 들일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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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의 부재에 대한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과연 누가 그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인가. 내수용에 불과했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품성을 세계 무대로 이끌어내고, 역사에 길이 남을 거장 중에 거장의 반열에 살아서 오른 그지만,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이고, 어떤 사람도 그의 뒤를 이을 수는 없다.


 이것은 일본 애니메이션 계에는 아주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으나, 미야자키 하야오에게는 무엇보다 기분 좋은 칭찬일 것이다. 역사를 다 뒤집어 놓아도 다시는 나같은 사람은 나오지 못할 거야, 라는 것은 개인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이 아닐까. 찬찬히 시간의 더께를 쌓아 진보하는, 축적의 동물인 인간이라는 종의 한 개체로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가면서 끝없는 자기 모순에 빠지고 자신의 작품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대차게 부정하는 그이지만 그런 그이기 때문에 그는 유일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내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로써 남는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거장이란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아닐까. 그의 다음 작품이 더욱 기다려진다.





+

<엔딩 노트>의 감독이었던 스나다 마미의 작품이다. 자신의 철학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인물이었던 그의 아버지와는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을 조명했다는 점에서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것이 재밌다.


+

스즈키 씨, 미야자키 고로 씨. 이 두 인물에 대해서도 이렇게 쓴 만큼이나 할 말이 많다. 특히 아버지와 사이도 별로였고 건축 일을 하다가 갑자기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데뷔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고로의 짜증섞인 대화가 담긴 장면은 굳이 이 영화에서 하이라이트로 꼽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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