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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May 29. 2019

네 이웃을 사랑하라, 비록 그가 살인자일지라도.

<버니(Bernie), 2011>

1


 같은 감독이 만든 영화는 대부분 일정한 결을 지니고 있다. 처음부터 어떤 영화들을 만들지 정해두고 찍는 경우나, 의도적으로 그러는 경우도 있을테지만, 보통은 별 생각 없이 만들었는데 만들다보니 소재도 자기가 주로 사용하는 것에 손이 가고, 구성이나 배치도 습관적으로 하다보니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떤 영화가 좋았을 때, 그 영화와 비슷한 작품이 더 보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건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면 대부분 성공하곤 한다. 이런 경향은 하나의 작품으로 큰 성공을 이룬 감독에게 자주 드러나는데, 가끔 너무 반복하다 보면 자기복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감독의 작가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잘 드러나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감독도 많다. 나만 그런 걸수도 있겠지만 나는 유난히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마션>과 <글래디에이터>, <델마와 루이스>가 같은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은 막상 듣기 전에는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디테일하게 들어가서 분석하기 시작하면 금방 티가 나기야 하겠지만 우주와 로마와 미국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상상력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런데 <버니>의 감독인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특별히 소재의 스펙트럼이 넓지도 않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도 꾸준한 편인데, 묘하게 그의 작품들을 늘어놓고 보면 한 감독의 영화라는게 믿기지를 않는다. <보이후드>, <비포 선라이즈>, <스쿨 오브 락>, <스캐너 다클리>, <에브리바디 원츠 썸!!>를 보고 일련의 스타일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까? 나는 조금 어려운 편이다. 어떤 작품이든 빼놓지 않고 사랑스럽다는 사실을 뺀다면.


 영화 자체로도 <버니>는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분명 극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다큐멘터리인가 하는 인터뷰 장면들이 등장하고, 이야기의 흐름은 얼추 있지만 기승전결이 명확하지 않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에는 실제 '버니'씨의 인터뷰를 하는 잭 블랙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실존 인물인 버니의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린 처사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조금 묘한 기분이 든다. 분명 코미디 영화인데, 전혀 미스테리한 장면이나 암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복잡한 계산이 필요할 것 같았던 수학 문제를 다 풀고 답도 나왔고 틀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디선가 식 몇 개쯤 빼놓고 한 것 같은 찝찝함이랄까.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2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는 홉스의 자연 상태에 요즘 푹 빠져서 뭘 할 때마다 인용하고 있긴 한데, 사실 자연 상태는 인간사에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홉스가 이런 상태를 상정한 것은 현실을 비추어 어떤 관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인간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회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고, 또한 그것이 인간이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 살고 있는 최근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아프리카 오지라고 해도 납득하기 어려운데 과연 그것이 미국의 한 마을이라면 어떨까. 그런 맥락에서 한 인간이 다른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단어가 우리들의 입에서 그렇게나 자주 오르는 것에 비하여 평범한 우리에게는 극한의 비일상이다.


 죽음이 일상에 침입하는 순간은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의 순간이다. <버니>의 마을 사람들의 경우, 이 인지부조화의 상태에 맞서 이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비상식적인 선택을 한다. 1. 살인은 잘못된 것이다. 2. 그러나 버니는 착한 사람이다. 자신들이 그렇게도 아끼던 버니가 살인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머지, 그의 살인을 정당화하기로 한 것이다. 잘못된 살인을 마땅한 살인으로 바꾸면, 사실은 버니가 죽인 부인이 나쁜 사람이어서 죽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 이들의 부조화 상태는 해결된다.


 그러나 '죽어 마땅한 자'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그보다 앞서 '누군가를 죽여도 되는 사람'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엄연히 법치국가인 미국에서 이 심판은 법이 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버니는 만장일치로 유죄를 받는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마치 버니를 잡아들이려는 검사가 악역이고, 버니가 무고한 사람인 것만 착각을 당신은 느끼지 못했을까? 법의 영역을 적용하기 전에, 그에 앞서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버니를 옹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는가?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이 영화를 통해 건드리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3


 어떤 사건에 스토리텔링을 더하는 것은 이렇게나 무서운 잠재력을 가진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깊게 공감하게 되는 순간 수용자는 그 사건에 대해 자신만의 감정을 가지게 되고, 일단 감정의 영역으로 넘어온 순간, 이성 따위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공고한 관점이 생기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방법론이 적용되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먼저는 광고 분야가 그렇고, 또한 유명인의 이미지를 만드는 쇼 비즈니스, 혹은 정치계가 그렇고, 심지어는 요즘 아이들을 가르칠 때, 수학에서도 스토리텔링을 적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구나 자신은 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쿨함' 또한 감정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가끔 강연 따위에서 심리학 실험을 보여주며 인간이 얼마나 쉽게 자신의 선택을 비이성적으로 변화시키는지 증명해낼 때는 몸에 소름이 돋곤 한다. 막상 어떤 상황에 휩쓸렸을 때, 다시 생각해보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많은 순간을 기억한다. 대부분의 후회는 이런 감정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일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 비약해 거의 항상이기 때문에, 나는 항상 후회를 달고 사는 편이다.



4


 그리고 비극은, 이렇게나 쉽게 오류를 범하고 마는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가치판단의 순간을 마주해야 한다는 데에서 찾아온다. 매일의 삶을 겪어내며 세계는 계속해서 선택의 순간을 우리의 턱 밑까지 들이댄다. 대부분의 이런 순간에서 정답을 찾아내는 것이 매번 이 정도로 어렵지는 않지만, 가끔은 정답과 오답이 아닌, 두 가지의 답 중에 더 나은 것을 찾아내거나, 두 가지의 답 중에 덜 나쁜 것을 찾아내야할 순간이 온다. 안일한 태도로 흘러가는대로 이런 순간을 넘기는 것도 훌륭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때도 분명히 존재할테다.


 후회를 달고 산다고 상술한 바 있지만, 후회에서 배우는 것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분명 한 번 실수를 했다면 거기에서 배우는 게 있고,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응당 지성을 가진 인간으로써 가져야할 태도지만, 잠시라도 정신을 놓고 시간을 보내다보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세상에 신경써야 할 게 너무 많다. 모든 것에 대해 모든 답을 가질 수는 없는 일이지만, 손에 잡을 수 있는 만큼은 해결해나가면서 살고 싶다. 그게 최선이 아닌 차악에 불구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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