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일기장 Jun 03. 2019

저기, 나 좀 죽여줄 수 있어?

<죽여주는 여자, 2016>

1


 영화가 사회 고발의 기능을 반드시 품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바이지만, 그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해내는 매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항상 문제는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것일테다. 일단은 영화를 잘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문제 의식을 담는다면, 문제 의식에 대한 문제제기는 있을지언정, 영화의 완성도에 트집을 잡을 사람은 없다. 메세지만 앙상하게 남은 '못 만든 영화'는 아무리 좋은 메세지를 담고 있어도 옹호하기 어렵기 마련이다. 이렇게나 좋은 메세지를 품고 있는데 감히 이 영화를 비판하다니 당신은 쓰레기로군요, 하고 매도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물론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문제 의식을 담아내는 데에 영화가 훌륭한 도구인 이유는, 영화가 누군가의 삶을 조명하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관객과의 사적 친밀감을 형성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시키게만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실제로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인물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하더라도, 마치 그들의 아픔을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인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죽여주는 여자>는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데에 성공한 사례이다. '박카스 아줌마'라는 딱딱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풍기는 표현은 대상을 객관화시켜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받아들이게 하지만, <죽여주는 여자>의 '소영'은 그들을 살아 숨쉬는 주체로 이해하게 한다.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


 마냥 긍정적인, 당장 보기에 편한 영화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불편한 영화는 우리를 성장시킨다고 믿는다. 문제를 인식하는 것은 해결하기 위한 가장 첫 번째 단계이고, 정반합 과정을 통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부정하고 싶은 그들의 존재는 나와 같은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다. 트랜스젠더와, 장애인과, 몸을 파는 노인들도 모두 함께 모여 '우리'가 된다.



2


 어떤 주체에 대해 부정적인 가치 판단을 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어찌하여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안다면, 그들의 인격이 실재하는 것을 깨달아버린다면, 그들에 대한 평가는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하고 확고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필요하다. 세계는 이렇게나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도 머리가 아픈데, 이 영화는 깊게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우수수 쏟아낸다. 마치 감독이 안일한 대중들에게 짜증을 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노인 성매매, 장애인, 트렌스젠더, 코피노, 판자촌 등 서울의 가장 아래에 있는 인간 군상은 어느 하나도 쉽게 언급할 만한 것들이 아니다. 종로를 기점으로 산재하는 이들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려면, 아주, 아주 긴 시간의 고민이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긍정은 '올바르게' 보이지만 안일한 대처가 될 수밖에 없다. 부정하기엔 이들은 우리의 손으로 만든 사회 구조의 피해자이다. 외면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모두 듣기 시작한다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 영화 한 편을 보고서 이들에 대해 확고한 어떤 가치체계를 구축했다 자처하는 건 오만한 짓이다. 애초에 우리는 이들에 대해 모두 알고 있지 않았는가.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이들의 존재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극 중 다리가 하나 없는 장애인인 도훈은 편견으로 가득 찬 사내이다. 실실 웃으면서 잘못된 고정관념에 기반한 무신경한 말들을 내뱉는다. 그러나 사회적 소수를 쉽게 무시하는 그는 스스로 사회적 소수의 위치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는 사회적 소수이기 때문에 배려받아야 할 대상인가, 혹은 편견으로 인해 지탄받아야 할 대상인가. 어쨌든 영화의 끝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오늘 행복했다. 작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며 자기들끼리 사랑하기도 반목하기도 즐거워하기도 슬퍼하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는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다같은 사람이다.



3


 소영은 의도치 않게 한 노인의 자살 과정에 동참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고 이렇게나 고통으로 가득 찬 사회라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리라, 확고한 그의 목소리에 소영은 범죄인 것을 알면서도 그의 죽음을 방관한다. 그녀가 또한 수많은 노인의 자살을 돕고, 수많은 죽음과 마주한다. 자신도 죽음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노인이기도 하다. 그녀가 느꼈을 고뇌가 얼마나 커다랗게 마음 한켠에 들어앉아 있었을지는 나로서는 상상도 가질 않는다.


 안락사의 당위성은 끊임없이 논의되는 주제이지만 아직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똥밭에 굴러도 사는게 나으니 당신은 절대 죽으면 안된다고 국가는 우리에게 말하지만, 모든 탄생이 존엄한 것처럼 우리 모두의 끝은 또한 존엄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낳아놓고 죽여주지 않는 사회는 한없이 냉혹하다.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으로 사는가. 죽음에 관한 사유는 항상 나의 마음을 힘들게 만든다. 적어도 오늘 힘드니 콱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너무 어린 마음이라는 정도가 아직까지 내가 내린 결론의 전부다. 



4


 이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보았다면, 자, 이제 답을 내려야만 한다.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당신의 앞에서 숨쉬는 이들에게, 당신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나는 기꺼이 이 문제의 결론을 당신에게 미루고자 한다.

작가의 이전글 네 이웃을 사랑하라, 비록 그가 살인자일지라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