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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일기장 Jun 12. 2019

나쁜 사람들은 왜 항상 행복할까.

<매치 포인트(Match Point), 2005>

1


 긴 밤이 끝나면 아침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나, 나의 세계는 여전히 어둡기만 하다. 어째서 그렇냐고 묻는다면 글쎄, 불행할 이유는 잔뜩 있는데 행복할 이유는 턱없이 부족해서지 뭐.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꼽아 만 가지는 될 빌어먹을 것들을 저주하며 스물 다섯 번의 밤을 뿌듯히 채울 수 있을 것이나, 줄이고 줄여 한 가지만 이야기하자면, 세계를 구성하는 잔인한 불확실성의 문제가 정말이지 참을 수 없게 힘들다. 순전히 운이 좌우하는 성공과 실패의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주로 실패한다고 가정한 후 생각하고 행동하는 편이다. 운이 좋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동전만 던져도 앞뒤를 술술 맞추곤 하던데, 나는 도통 맘처럼 되는 일이 없다. 설마 이렇게 되겠어 하면 과연 그렇게 되고, 제발 이렇게 되라 하면 당연하게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확률을 관장하는 행운의 여신하고 전생에 척이라도 졌는지, 짧은 인생을 살아내며 운이 좋다고 느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나의 불운함 쯤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고 관대하게 넘어갈 수 있지만, 그것보다 나를 더 확실하게 불행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타인의 과도한 행운이다. 일본을 여행할 때 신사에서 뽑은 종이 쪽지에서 가장 좋은 '대길'을 한 번 뽑아보자고 동전을 몇 백 엔이고 낭비하는 내 앞에서, 안 한다고 하다가 한 번 뽑더니 '대길'을 스윽 뽑아내는 그들에게 배가 아픈 건 단지 내 성격이 더러워서일까? 타인의 행운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게 나에게도 플러스가 된다는 사실은 살아오며 터득한 지혜지만, 꽁꽁 숨긴 마음 속에서 배가 아픈 건 아무래도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잘 되면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편이다. 나는 안되도 너라도 잘 되면 참 좋은 일이지. 그러나 비극이 찾아오는 순간은 하필 나쁜 놈들이 운이 좋을 때다. 팀플을 하면서 무임승차를 한 주제에 객관식 시험에서 더럽게 운이 좋아 찍은 게 다 맞아서 나보다 학점이 높았던 15학번 김가놈이나, 같이 나쁜 짓을 하자고 꼬셔서 내키지 않는데도 도와줬더니 나만 혼나고 자기는 안 걸려서 시치미를 뚝 뗐던 같은 반 최가놈을 떠올리는 것도 이렇게 열불이 터지는데, 세상에는 좀처럼 나쁜 놈들이 운이 안 좋은 경우가 없어 보인다. 바람을 피다가 내연녀를 임신시키고 아내와 헤어지겠다고 거짓말을 하다가, 수가 틀리자 총으로 내연녀를 쏴 죽이고도 경찰의 수사망을 운좋게 피해가는 <매치 포인트>의 크리스처럼 말이다.



2


 성공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크리스는 선수가 되지 못하고 고작 테니스 강사로 근근히 벌어먹고 산다. 그의 목적은 부자 수강생과 친해져서 인생을 역전하는 것이다. 마침 형편좋게 나타난 부잣집 자제 톰은 크리스에게 이상할 정도로 호의를 보인다. 이 때만 기다렸다는 듯 크리스는 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 가장 친한 친구가 되고야 만다. 그의 여동생을 유혹해 결혼까지 성공한 크리스는 그들의 아버지의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가 중요한 자리까지 꿰찬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데에 있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진입하는 데 있어서 어떤 윤리적인 기준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이렇게 교묘하게 계산된 방식으로 인맥을 마련하고 요직을 차지한 게 꾸준한 노력으로 자신의 가치를 높여 차근차근 올라와 같은 자리에 올라온 것보다 윤리적으로 하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크리스의 이런 속내를 톰이 알아챘다면야 배신감이 들 수 있겠다는 생각 정도는 든다.


 하지만 종종 우리는 인맥을 쌓아놓는 것이 대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든지, 인적 자원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듣곤 하는데, 그것과 이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교묘하고 구체적으로 인맥을 쌓으면 나쁘고, 술 한잔 기울이면서 호탕하게 친구를 맺는 건 괜찮은 걸까. 나는 항상 둘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가 아니라, 인맥을 쌓는다며 술을 먹으러 돌아다니는 것조차 기만적인 행위라고 여긴다. 누가 누구에게 도움을 주는 게 마치 거래를 하듯 한 번씩 돌아가면서 하는게 당연하고 성공의 방법 중 하나라면, 차라리 계약서를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에는 그 영혼이 맞닿는 진심의 울림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계산적인 관계가 아닌 진심으로 교류하는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살다 보면 인맥이 정말, 정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을 때가 있다. 특히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며 사회의 숨겨진 뒷면을 바라볼 때 그렇다. 일 년 노력할 거 하루 같이 술을 먹으면 해결된다면, 왜 그렇게 하지 않겠어. 현행법을 어기는 잘못된 행동이 아니고서야 조금 그래도 된다. 아니 오히려 그래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비정상적으로 경쟁적인 구도를 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다다를 때마다 종종 머리에 총으로 바람구멍을 내고 싶은 기분이 된다.



3


 만약 인간사를 주관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이렇게 불공평하고 더러운 사회를 그냥 놔두는 건 직무유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것처럼 신은 눈먼 시계공일까? 신의 존재유무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사회에 조금씩 젖어들어가며 느끼는 건 인과응보는 허상이라는 점이다. 나쁜 놈들이 응당 벌을 받아야 마땅한 건, 현행법상 문제가 되는 행동을 했을 때, 그리고 그게 발각되었을 경우에만 그렇다.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거나 들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앞으로도 행복하다. 때로 수많은 사람들이 믿는 가치는 신화적인 존재로 탈바꿈하여, 고작 믿음에 불과한데도 실제로 세계가 그런 모습으로 만들어진 양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빌 게이츠가 말했듯, 원래 인생은 불공평하고 나쁜 놈들은 항상 운이 좋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모든 걸 사회 탓으로 돌리고, 나를 금수저로 낳아주지 않은 부모를 저주하는 건 가장 쉬운 해결책이지만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나도 지금 죽겠는데 뚜렷한 해결책을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내린 결론 정도는 말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세계가 원래 불공평하고 삶이 모두에게 지난한 과정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눈앞에 거대한 부조리가 존재할 때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은 이게 마치 나의 세계의 전부처럼 느끼는 것이다. 세계는 이렇게 기형적으로 뒤틀려 있고, 행운은 여전히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나의 노력이 배신당하지 않고 노력에 따른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다. 그런 성공의 경험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테다. 다만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좌절하는 경우가 더 많거나, 크게 다가왔을 따름일테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야지 이가 없다고 불평하고 있을수만은 없기 마련이다. 위를 보면 아득하지만, 밑을 보면 이가 있어도 먹을 음식이 없는 사람들도 이렇게나 즐비한걸.



4


 글을 읽으며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화가 많이 나 있다. 감정을 갈무리해서 객관적인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영화를 보며 나는 이런 생각들을 했고, 그걸 솔직히 적어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치 포인트>는 이런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훌륭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디 앨런은 여전히 훌륭햔 이야기꾼이고, 그의 작품 중에서 도드라지게 냉소적인 이 영화가 그의 다른 작품들과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지 찾는 것은 흥미로운 과정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즐기지만 나의 세계는 이렇게나 좁다. 매일 만나는 사람으로 가득 채워도 꼽아 백 명이 채 안되는 작은 세계를 살아가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결론내리는 모든 것들이 과연 몇 명에게나 공감을 살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는 조금 성장했다고 믿고 싶다. 조금 더 솔직하고 조금 더 뿌듯하자. 하루를 채워나가는 일이 의무가 아닌 권리라고 여기자. 삶을 뒤덮은 수많은 불행을 하나하나 걷어나가는 일들이 언젠가는 끝이 날 거라고 믿는다.


 어른이 된 나를 상상하기가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나의 다 자란 육신도 아직 껄끄러운데 자라지 못한 마음이 들어앉기에 내 몸은 너무 넓고 공허하다. 영원히 어린 아이로 남고 싶다는 건 여전히 나의 욕심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도 나는 조금 더 자랐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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