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Krótk film o milci),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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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영화가 유치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가 교조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영화 안에서는 세상에서 제일 잘생기고 제일 예쁘게 나오는 배우들이, 설정 상으로는 평범한 외모를 가진 채로 등장해, 사랑이 뭔지 한 수 알려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세상에서 제일 애틋하게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을 전시하는 것이 이 장르의 클리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완벽하고 매끈한 사랑에 다가가려는 시도에 동경을 품게 되는 건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겠다만, 기본적으로 나는 이러한 태도에 심드렁하다. 어차피 내가 닿을 수 없는 판타지의 영역이라고 느껴지는 순간, 영화의 주인공들에게 소외받는 기분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로맨스는 나의 사랑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종류의 작품들이다. 사소하고, 치졸하고, 질척이고, 잔인하고, 그러나 때로 반짝이기도 하는.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내가 겪어나갈 수 있는 일상의 사랑에 대해 다루는 작품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사랑이라는 개념과 그 본질에 대한, 짐짓 철학적인 탐구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해 마지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다른 로맨스 영화들 또한 이데아의 세계에나 존재할 법한 '완벽한 사랑의 형상'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이미 다 아는 양 으스대는 면모가 있다. 이렇게 해야만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마냥 조심스럽다. 제가 탐구해본 결과 사랑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하며 조심스럽게 자기 연구 자료를 들이미는 소심한 학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제목을 살펴보자. '사랑에 관한' 이라는 부분은, 이 영화가 사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영화 내부의 어떤 제재나 현상을 인용해 제목을 쓰지 않은 이런 점은, 마치 이 영화가 일종의 연구와도 비슷하다는 인상을 준다. '짧은' 이라는 수식어를 굳이 사용한 지점이 제일 재밌다. 단순히 영화의 길이에 대한 안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첫인상일테지만, 87분이라는 러닝타임이 특별히 더 짧은 편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하나의 사례로밖에 접근할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자기변호이자,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짧게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일테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서,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위해 검색창에 영화의 이름을 넣었고,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원래 이 영화는 폴란드의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TV용 연작 중 한 편을 떼어 영화로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시리즈의 제목은 '십계', 이 에피소드의 원제는 '간음하지 말라.'라고 한다. 이 연작을 더 접해보지는 않아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이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1.5
영화의 구성이 상당히 도식적인 형태로 되어 있다. 2차원의 좌표평면을 떠올려보자. 우상향하는 직선을 하나 긋고, 또 우하향하는 직선을 하나 긋는다. 그러면 X자 형태의 그래프가 완성된다. 먼저는 남자, 토메크의 시선에서 마그다를 관찰하며 영화가 진행되다가, 어느 시점에서 둘은 교차한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마그다의 시선에서 토메크를 관찰하며 나머지 부분이 진행된다. 이 점에 참고하여 영화를 보고, 글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 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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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메크는 열 아홉 살의 고아다. 그는 친구가 없는 친구의 집에서 친구의 어머니와 둘이 함께 살고 있다. 우체국에서 근무하는 그에게 유일한 낙은 맞은 편 아파트에 사는 마그다를 몰래 훔쳐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어딘가 결여되어 있는 그에게 사회와 유일하게 연결되는 창구는 아마 일방적인 관찰이라는 기형적인 관계 뿐이었을테다. 10년 동안이나 그녀를 바라보던 토메크는 그녀와 함께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된다.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는 모습을 목격하자 거짓말로 가스 고장 신고를 해서 방해하고, 가짜 통지서를 보내 자신이 일하는 우체국으로 찾아오게 하고, 우유 배달부를 자청해 그녀의 집 앞에 우유를 배달한다.
그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명백한 범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토메크는 스스로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또한 (물론 이러한 행위 때문에 영화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있어 이러한 장면이 극단적으로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은 충분히 존중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를 무조건적으로 악인으로 규정하게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한된 상황 속에서 토메크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이란 압도적인 고독밖에는 없었다. 함께 살고 있지만 완벽한 타인처럼 느껴지는 친구의 어머니는 그걸 채워줄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에 불과한 그의 일터 역시 그렇다. 그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자신밖에는, 혹은 자신마저도 스스로의 감정에 신경을 쓰지 못한다. 고독이란 으레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부정적인 상태라고 간주되기 마련인데, 토메크에게 있어서는 그 상태가 오히려 매일 겪어 익숙한 평범한 상태이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유전자를 품고 있는만큼, 아무리 고독이 익숙한 상태여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정은 필요했을테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채워본 적이 없으니, 토메크는 기형적인 방식의 연결만으로도 자신의 그 욕구를 채웠다고 느끼며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는 건 시간문제였을 따름이다. 비로소 그가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조금 비약하자면 나는 모든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어딘가 기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고 여기는 편이다. 그래야지만, '영화'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형태 중 하나로서의 영화는 등장하는 인물들을 재료로 이용하여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은 대부분이 매우 복잡한, 물질-비물질(육체-정신)의 혼합체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이야기의 진행을 돕는 메타포로 사용되기에는 적합치 않다. 때문에 작가는 이야기 속 인물을 그릴 때, 그 인물이 가져야 하는 역할에 맞는 요소를 증폭시켜 그리기 마련이다. 나머지 부차적인 요소는 마치 배제된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가 어떤 캐릭터를 떠올릴 때 여러 수식어들로 (이를테면 정의로운, 악한, 섬세한, 감정적인, 강인한, 연약한, 장난스러운, 등등) 그들을 정의하기를 당연스레 여기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러한 특성을 거꾸로 적용해본다면, 토메크의 모습에 우리 각자의 모습을 투영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는 우리 중 하나이자,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그의 기형적인 행동을 보고 있자면 무슨 미친 소리냐고 할 줄도 모르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고독이란 흔한 감정이다. 현대인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토메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독이라는 감정을 인간화한 인물이다. 감독은 토메크라는 인물을 그리는 것을 통해서, 고독이란 감정에 젖은 우리 모두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한다. 꽤 흥미로운 발상이다. 사랑과 제일 가까운 감정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도 주저없이 고독을 고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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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냈다는 표현을 쓰기 적절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토메크는 스스로의 정체를 마그다에게 밝힌다. 밤에 전화를 걸어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것도, 편지를 보내서 우체국에 오게 한 것도, 지금까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도, 모두 밝힌다. 당연히 마그다는 불같이 화를 내며 토메크를 쫓아낸다. 그러다가는 또 갑자기 토메크를 부른다. 아마 만나는 남자도 사라졌고, 불순한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였을거라고 추측해볼 수는 없지만, 그 이유는 자신만이 알 것이다. 만나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뒤, 마그다는 토메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그에게 코웃음을 친 마그다는, 관능적인 모습으로 그를 유혹한다. 한 번도 이런 성적인 상황에 놓인 적이 없던 토메크는 그녀의 몸에 손이 닿자마자 사정해버리고야 만다. 당황해하는 토메크에게 마그다는 '이게 사랑의 전부'라며 조롱하고, 토메크는 도망가버린다.
토메크의 사랑은 순수하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의 모든 행동과 감정선을 따라가는 관객은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행동이 정당화되는가, 하면 거기에는 전혀 참작의 여지가 없다. 마그다는 그에게 관용을 베풀었지만, 만약 그녀가 고소를 한다거나, 혹은 두려움에 떨며 도망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의도와 행위 중에서 중요한 건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지, '무슨 의도였는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토메크가 방에서 혼자 생각해낸 진실한 사랑 따위는 상대방에게 발현될 때 중요하게 고려될 요소가 아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이 순수한 건 사실이라는 것이다. 행위는 잘못되었지만 적어도 그의 의도는 순수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에게 시니컬한 사랑의 태도를 보이며 조롱했을 때 조그맣게 피어났던 사랑의 새싹은 뽑혀 말라붙는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상상한다. 사랑을 방해할 수백가지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그런 이미지다. 그러나 이 사랑은 너무 연약하다. 온실 속에서만 살아가던 사랑은 차가운 현실에 몸을 내놓는 순간 그대로 죽어버린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순수한 사랑'이 발원한 지점이 하필 토메크의 마음 속이라는 사실이다. 사랑이란 혼자가 아니라 둘이 같이 해야만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토메크에게는 함께 사랑을 나눌 사람이 없었고, 그는 스스로 사랑을 키워야만 했다. 비유하자면 햇빛을 받지 못하고 자란 식물과도 같다. 물과 양분이 있다면 자라나기는 할테지만, 푸릇푸릇하고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 아닌 어딘가 뒤틀리고 불쾌한 노란색을 띄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라난 사랑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설령 이 관계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지라도, 이건 건강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 건강한 사랑이 매우 드물다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마그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추측컨대 그 중에서는 그녀가 정말 사랑한다고 느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모든 사람들은 그녀를 떠났다. 단지 몸을 섞을 사람이 필요할 뿐,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 마음 속에서 사랑의 씨앗을 키워보려 했지만, 실패한 나머지 존재하는 것조차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고야 만 것이다. 때문에 그녀가 토메크를 조롱한 건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진실을 이 어린 소년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나름의 호의에서 비롯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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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메크는 집으로 뛰어가 자신의 손목을 긋는다. 다행히도 목숨을 잃지는 않지만, 치명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간다. 마그다는 장난이라며 다시 돌아오라고 그를 찾지만 더 이상 그는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막상 사라지고 나자 자신의 장난이 너무 심했다고 생각하며 그를 찾지만,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다. 집까지 찾아갔지만 병원에 있다는 이야기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이제 마그다는 토메크를 그리워하며 애타게 기다린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그가 퇴원하기로 한 날 찾아가자 토메크가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그녀를 친구의 어머니가 막아선다. 어쩔 수 없이 마그다는 그의 방에 있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집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를 추억한다.
마그다는 사랑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냉소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한 때 절박하게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과 동의어다. 이를테면 복권을 사는 것에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한 때 매주 복권을 사도 한 번도 당첨이 된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관심을 끄고 살기 마련이다. 때문에 마그다는 처음 만났을 때 토메크의 사랑을 쉽게 부정해버린다. 네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건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토메크가 떠나버리고, 곰곰이 다시 생각하자 그녀는 그게 진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우리는 로맨틱한 기적을 꿈꾸기 마련이다. 진짜 사랑이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것들을 떠올리며, 역경과 고난을 거쳐 다시 사랑에 성공하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꿈꿀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술했던 이 영화의 구성을 다시 떠올려보자. 두 그래프가 교차하는 지점은 X자 모양의 정가운데 단 한 번 뿐이다. 그렇게 그를 그리워하다가 다시 토메크와 만나게 되지만, 그가 대화할 수 있는 건 그의 보호자 뿐이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다시 대화할 수 없다면 마그다에게 있어 그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토메크의 초상이 현대인들을 대변한다고 상술한 바 있지만, 그건 마그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이야기다. 그녀의 모습은 관계에 지치고야 말았지만 피상적인 관계는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과 조금 더 직관적으로 닮아 있다. 토메크에게 찾을 수 있던 감정이 고독이라고 했고, 그녀에게 찾을 수 있는 감정은, 역시 고독이다. 단지 그가 갇힌 방 안에서 홀로 피워나간 고독이라면, 그녀의 고독은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마지막 무렵의 씬에서 그녀는 그가 쳐다보던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보이는 건 불이 꺼진 자신의 방 밖에는 없을테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그녀가 볼 수 있을 리가 없을 지난 날의 시선들이다. 그의 시선에서 그녀는 자신을 되돌아본다. 이런 장면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겠구나. 망원경으로 훔쳐보고 있을지언정, 그 따스한 시선, 자신을 위로하는 시선. 종국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일마저 보고야 마는데, 이미 죽어서 누워 있는 토메크가 절망에 빠진 자신을 위로하는 장면이다.
조금만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우리가 지나왔을 수도 있던 행복한 시간들을 아무리 상상해본들 이미 지나온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인간은 후회의 동물이다. 모든 순간을 지나며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을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게 최선도 아니고, 차선도 아니고, 사실은 최악이었다는 걸 깨닫고야 만다. 그러면 그 때라도 다시 최선을 다하면 좋으련만, 또 지나고 나면 그 순간마저도 또 다시 최악의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영원히 과거의 순간들을 곱씹으며, 내일로 나아가야만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우리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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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제목이 이 영화가 사랑을 정의하려는 시도에 기반하여 만들어졌다고 언급한 바 있다. 끝까지 영화를 보고 나면 과연 이 영화가 나름대로 사랑을 정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사랑을 조명하는 듯 했지만 그걸 통해서 사랑 일반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즉,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지개의 끝을 쫓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의 형상을 보고, 사랑을 찾아 표류하지만 영원히 그 존재에 닿을 수는 없다. X자 모양의 좌표평면을 다시 떠올려보자. 이런 식의 구성을 하고 있다고 인지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 교차하는 지점에 사랑이 있을거라 기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기대를 배신하고 그 곳에도 사랑을 두지 않는다. 토메크에 마음 속에 자리하던 사랑은, 그 교차점에서 마그다의 마음 속으로 옮겨간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사랑을 가지고 만나지 않는다면 사랑은 영원히 허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프를 그릴 때 우리는 선을 그리지만, 사실은 선이 아니라 무수한 수의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배운 바 있다. 이처럼 그들 각자의 수많은 점들 중, 어느 하나의 점에는 아마 사랑이 존재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점을 특정할 수 없다면, 단지 무수히 많은 수의 단 하나로 존재할 뿐이라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