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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춘에이드 Jul 13. 2021

[풍수 칼럼] 풍수의 역사(이론편)

팔자 고치는 풍수지리

풍수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중국에서는 한(漢) 나라 때 청오(靑烏) 선생이 <청오경>이라는 풍수서를 내면서 풍수지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 경, 도선국사를 풍수의 시조로 삼고 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포춘에이드가 열심히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풍수는 그 이전부터도 존재해 왔습니다. 공자의 탄생 설화를 보면 동굴에서 태어난 공자가 호랑이 젖을 먹고 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가 태어난 동굴 앞산이 전형적인 호랑이 형상입니다. 그러니까 호랑이 산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인물이 '호랑이 젖을 먹고 컸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을 한 것이죠. 


그리고 우리나라 김수로 왕 설화를 보면 '구지가(龜旨歌)’가 나옵니다.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라고 하는 구전 고대가요가 바로 구지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김수로 왕이 태어난 곳의 뒷산이 거북이 형상의 산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문헌 기록이 작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왕족이나 귀족들은 풍수를 읽을 줄 알고 그것을 이용해 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경주의 신라 왕릉들을 보면 풍수가 점차 정립되어가는 과정이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게 왕족이나 귀족들에게만 비밀리에 이용되던 풍수가 조선시대로 내려오면 양반, 상민 할 것 없이 모두가 이용하려고 혈안이 되었죠. 선조들의 경험이 습득되어 내려오면서 마침내 백성 모두가 풍수의 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있었던 재판의 70퍼센트가 산송(山訟 ), 즉 묘지 재판이었다고 합니다. 내가 쓴 명당 근처에 다른 사람이 허락 없이 묘를 썼다거나, 심지어 권세 있는 사람이 자기 묘를 파내고 강제로 묘를 쓴 경우 재판이 벌어졌던 거죠. 명당을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들의 싸움이 비일비재했던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 마디로 조선시대는 풍수에 홀릭(Holic)된 시대였던 것이죠. 


지금은 어떤가요? 오늘날에는 풍수를 조선시대처럼 맹목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알 만한 사람들은 중요한 터를 잡을 때 여전히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보통의 사람들도 풍수를 관념적으로나마 염두에 두며 풍수 인테리어와 같이 실생활 속에서 소소하게 활용하고 있죠.  


포춘에이드 또한 이제는 풍수가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거나 실체 없는 속설이 아닌, 실 생활에서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실용학문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풍수 칼럼] 다음 시간에는 풍수의 기본 이론과 풍수가 어떻게 후손에게 미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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