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여행을 떠났다.
혼자 국내여행을 떠나는 건 스물여덟 인생 중 처음이었다. 이십 대 초반에는 혼자 일본도 돌아다니고 유럽으로 배낭여행도 씩씩하게 잘 다녀왔었는데, 어째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외로움을 많이 느끼면서 혼자 하는 일들이 더 이상 재미없고 불안하게만 느껴졌었다. 퇴사를 하기 전까지는 월화수목금토일,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상들이 전부였다. 평일에는 동료들을 만났고, 주말에는 못 본 친구들을 열심히 만나면서 내 일정에 혼자라는 틈 없이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와 함께가 아니면 모든 일에 의미가 없는 것처럼 관계 중독에 빠져버렸다.
차라리 외로움을 느낄 바에야 괴로운 게 나았고, 좋은 날씨여도 혼자 일 바에야 컴컴한 집구석에서 타인과 통화를 하는 일이 더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혼자 인 것을 참지 못하고 있을 때, 비슷한 시기에 퇴사를 한 언니가 홀로 스페인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다.
혼자? 그것도 한 달이나? 유럽 여행을 간다는 사실보다 지금은 혼자 한 달의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더 대단했다. 그렇게 엄지를 양손으로 비추자 언니가 웃는다. "너도 어린 나이에 혼자 다녀왔었잖아. 나는 여행 계획 짜면서 그때의 네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그 말에 나는 곧 생각에 잠겼다. 언니 말대로 옛날에 나는 혼자 척척 모르는 세계도 돌아다니며 즐겁게 잘 먹고 잘 지내왔는데. 오랜 기간 동안 연애를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안의 시간을 남들과의 관계로 해결한 탓에 혼자도 즐겁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 행복을 찾는 내가 참 초라해 보였다.
핸드폰을 켜고 그동안 가고 싶었던 여행지 몇 곳을 추려 보았다. 친구들과 같이 가자고 계획했지만, 무산되었던 부산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언니와 헤어지자마자 곧바로 부산 숙소를 알아보고, KTX 기차표를 끊었다. 온전히 나를 혼자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방구석에 혼자 웅크리고 있는 것보다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면서 내 취향과 생각을 발견하는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부산에 와 있다.
부산역을 도착하자마자 느꼈던 건 내 생각보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컸다. 하지만 주변 들려오는 사투리와 향기가 정겨워 서울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원래 혼자 걸으면 항상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되었는데, 부산에 도착하고부터는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이어폰을 꺼낼 일이 별로 없었다.
누가 부산에 왔으면 국밥과 밀면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혼밥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사람 많은 식당에 혼자 가 식사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조금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가 아니면 또 언제 지역 맛집을 갈까 싶어 역 근처에 밀면으로 유명한 식당을 찾아갔다. 평일이었어도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나는 그 틈 사이에서 혼자 4인용 테이블을 차지하여 밀면 한 그릇과 만두 한 판을 시켜 먹었다. 앞자리에 같이 앉는 사람이 없으니 가끔 다른 테이블 손님이랑 눈이 마주치곤 했는데, 그게 민망해 눈을 내리깔고 먹으면서도 언제가 부터는 당당하게 주변 사람들을 구경하며 먹었다. 가족과 함께 온 사람, 연인과 함께 온 사람, 또 나처럼 혼자 온 사람 등등...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함께 나와 같이 부산의 맛을 즐겼다.
첫 번째 관광 장소는 흰여울 문화 마을이었다.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 마을은 골목골목이 예쁘고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가 있었다. 이곳에서 바다를 보자마자, 드디어 내가 부산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시원한 바람 소리와 출렁거리는 파도의 물결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걷고 또 걸으면서 주변 소품샵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고, 쉬어도 갔다. 남들이랑 함께 왔었다면 아마 여행의 주목적이 '사진'이 되어 핸드폰을 놓지 않았을 텐데. 혼자 오니 나를 촬영하는 시간보다 풍경을 구경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래서 사진을 담는 것보다 기억을 남긴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잠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번 여행으로 의미 있는 한 가지를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짤막하게 찍은 영상들을 편집해 영상 일기를 남기기로 했다. 막연하게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나중에 추억을 꺼내며 볼 수 있는 자료를 만드는 것도 분명 좋은 일이니깐 말이다. 그래서 이때부터 조금씩 영상을 남기기 시작했다.
두 번째 관광장소는 해운대에 있는 해변열차를 타는 것이었다. 5-6 정거장으로 이루어진 작은 철도를 열차로 왕복해서 다녀왔다. 빼곡히 누군가와 놀러 온 사람들 틈 속에서 잠시 외로움도 느꼈지만, 내리자마자 보이는 바다 풍경이 나를 달랬다. 이제껏 나는 내가 바다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소금기 묻은 바람도 불쾌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영하는 바다는 시끄럽고 더러운 거 같아 오히려 계곡을 훨씬 좋아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막연히 혼자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보고만 있어도 좋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드 넓게 펼쳐지는 파도와 수평선 위에 둥실둥실 그림같이 떠다니는 구름이 참 예쁘다. 새로운 취향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 장소인 광안리 해수욕장에서도 또 바다를 보았다. 반짝반짝 빛나는 윤슬. 모래 묻은 돌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멍하니 풍경을 담으니 주변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홀로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지긋하고 깊어 보였다. 무슨 생각과 고민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다를 보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 같아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누군가와 함께 왔다면 이런 감정을 살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왜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일이 필요한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내 취향을 발견하고, 생각을 잠깐이나마 환기시켜 줄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 인 것 같다. 숙소 안에서 맥주 한 캔을 따고 오늘 여행을 돌이켜 보니, 생각보다 지독한 외로움을 겪지 않았다. 문득 혼자 있어 어색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순간순간 떠올랐지만 하나같이 다 의미 있는 순간들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아도 삼삼한 의미를 느끼고 곱씹는 나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됐다. 과연 다음 날에는 또 어떤 취향을 발견하게 될까. 걱정보다 기대를 더 꿈꾸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