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붐 세대의 리셋 버튼…'박하사탕'의 크리스마스 버전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주의 한 사립 고등학교 기숙사. 있는 집 자식들이 한데 모인 이 학교에서 갈 곳 없는 ‘외로운’ 학생과 교사, 영양사 아주머니가 기나긴 크리스마스 연휴를 함께 보내게 된다. 완고한 고집불통 교사 폴 허넘(폴 지어마티), 머리는 좋지만 반항기 심한 학생 앵거스 털리(도미닉 세사), 베트남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흑인 영양사 메리 램(데이바인 조이 랜돌프)까지. ‘외톨이’ 셋은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얼었던 마음을 조금씩 녹이며 앞으로 나아갈 채비를 한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신작은 인간에 대한 사려 깊은 태도와 세태에 대한 예리한 통찰, 유머를 적절히 곁들인 세련된 솜씨로 만든 휴먼드라마이다. 한마디로 영화 내내 미소 짓다 끝날 때쯤 펑펑 울고 싶어지는 영화다.
◆외톨이들의 상처 극복기
마음 속에 상처를 안고 있는 세 인물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연휴에 만날 사람 하나 없는 크리스마스 ‘낙오자’이자 인생의 ‘낙오자’이다.
허넘은 명문 하버드대에 입학했지만 부자 친구들 틈에서 오해를 받고, 졸업도 못한 채 모교인 바튼 아카데미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쉽게 말해 서울대 나와 동창들은 정·재·학계를 움직이며 떵떵거리는데, 자신은 시골에서 애들을 가르치는 신세인 것.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그는 낮부터 술을 찾고, 시도 때도 없이 로마사를 인용하며, 학생들을 못살게 군다. 앵거스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다. 존경했던 아빠는 정신병원에 감금됐고 부모는 이혼했다. 엄마는 부자 새아빠와 신혼 여행을 가야 한다며 크리스마스 방학을 맞은 아들을 내친다. 매번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 그에겐 친구 하나 없다. 메리 램의 사연은 더 극적이다. 바튼 아카데미에 다녔던 아들 커티스 램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 아들은 학비를 벌려고 베트남 전쟁에 지원했다 죽었다. 아들을 잃은 램의 비애감과 상실감은 헤아릴 길이 없다.
줄거리만 봐도 연상되는 영화가 여럿이다. 스승과 제자의 교감은 이 분야의 명작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오른다. 백인과 흑인이 서로를 이해한다는 이야기는 아카데미 수상작 ‘그린북’에서 봤다. 상처받은 외톨이가 인간적 연대를 통해 새로운 시작하는 휴먼드라마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절대 이들의 아류도 양산형 크리스마스 휴먼드라마도 아니다.
무슨 차이일까. 우스워 보이던 인물들은 서서히 스며들며 관객의 감정 깊숙이 자리를 남긴다. 보는 내내 미소 짓다 끝날 때쯤 펑펑 울게 될 영화라고 했던 건 이 때문이다. 통상 영화의 플롯은 굵직한 이야기 줄기를 중심으로 시·공간을 휘저으며 나가다 보니 이야기에서 뛰노는 인간을 바라볼 시간은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설처럼 인물을 제시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복합적인 정서를 지닌 인물들은 여러 에피소드를 겪으며 아주 서서히 변화해나간다. 관객들도 이들과 함께 감정이 겹겹이 쌓이다 끝내 폭발하는 저마다의 순간을 겪게 된다. 이를테면 "이쪽 눈으로 말하면 돼"라고 말하는 허넘의 얼굴이나 허넘과 앵거스가 포옹보다 애틋하고 강렬한 악수를 나누는 순간 같은. 극장 안에서 함께 웃고, 웃을 수 있는 귀중한 집단적 체험의 순간을 겪게 될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 제대로 되돌릴래"…‘다시 쓰는 유년기’
이것만으로도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지만, 1961년생인 감독이 현재 미국에 대한 개탄과 이러한 미국을 만든 자신을 포함한 베이비붐 세대를 제대로 되돌리고픈 마음으로 만든 ‘다시 쓰는 유년기’란 가설을 제시해본다. 거창하게 말하면, 베이비붐 세대와 현재 미국을 스크린 속에서라도 제대로 되돌리려는 리셋 버튼 누르기이고, 어쩌면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는 ‘박하사탕’의 크리스마스 버전이다.
몇 가지 실마리가 있다. 영화는 1970년이란 시간적 배경을 줄기차게 강조한다. 연월일이 명시적으로 제시되고, TV를 보는 메리 램을 통해 당시 인기 있던 퀴즈쇼를 보여준다. TV 방송에서 카운트다운 후 ‘해피뉴이어’가 뜨면서 1971년이 큼지막하게 화면에 뜨기도 한다.
이쯤에서 인물의 나이를 한 번 계산해보자. 교장을 가르친 적 있다는 허넘은 50대 중반 정도로 1915년 전후 생이다. 유급한 앵거스는 18세 정도로 편의상 1952~3년생일 것이다. 허넘이 속한 1911~1924년 사이에 태어난 미국인들은 미국의 초기 번영을 이끈 ‘위대한 세대’이다. 대공황을 이겨내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며 경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한 세대. 이들은 살만하니 신나게 아기를 낳았다. 바로‘ 베이비붐 세대’이다. 1946~1964년생으로 앵거스가 여기 속한다.
1970년은 미국의 격변기였다. 베트남전 실패와 맞물려 이상주의 대신 개인주의가 강조됐고, 물질적 가치가 중시됐다. 베이비붐 세대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주도했고, 그 베이비붐 세대는 오늘날 미국을 지배하는 세대이다. 소설가 톰 울프는 1970년을 ‘자기중심의 시기’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바튼 아카데미는 기부를 통해 예일대, 프린스턴대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에 예사로 가는 고급 사립학교. 영화 속 대사처럼 "미국을 이끌 애들"이다. 그런데 앵거스를 포함한 학생들은 자기 말이 맞다고 싸우고, 동양인 비하에 마마보이고, 돈으로 해결하려는 습성까지 보인다. 개인주의와 천민자본주의로 점철된 망나니들인 셈. 이들은 분명 미국의 중추가 돼 지금의 미국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영화는 ‘이럼 안 되는 거였다’란 반성적 고찰을 지니며 되돌아감기 버튼을 누른다. 그래서 후속 세대(지금의 기성세대)인 앵거스만큼이라도 변화시킨다. 이와 함께 그 이전 기성세대였던 허넘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책 쓰기란 새로운 시작을 응원한다. 동창들로부터 도태된 허넘처럼 앵거스의 친아빠도 정신병으로 사회에 도태된 존재로 둘은 비슷한 지점이 있다. 이와 대치되는 새아빠는 부자에다 앵거스를 군사학교에 보내려고 한다. 결국 개인주의도, 국가에 충성하고 사회에 헌신하는 태도 모두 영화에서 부정된다. 즉 ‘위대한 세대’식 사고나 ‘베이비붐 세대’식 사고 모두 인간이 나아갈 방향도, 미국이 가야 할 방향도 아니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에서 폴이 크게 화를 내는 순간이 딱 한 번 있다. 어떤 학생이 메리 램을 두고 "우리가 돈 주는 사람인데 왜 매번 죽상이냐고" 말하자, 폴은 식탁을 쾅 치면서 말한다. "너흰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인생은 닭장의 횃대처럼 옹색한거야. 부모 잘 만난 너희들은 책임감을 가져야 해."
여기에 더해 베트남전에서 사망한 메리 램의 아들의 사진과 유품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신파 목적이 아니다. 마음 속에 부채감을 주는 것이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미국이 있다’는 걸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방학에 여기저기 놀러갔던 다른 친구들과 달리 앵거스는 허넘, 매리 램과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성장한다. 자기 상처만 아프고, 자기 말만 맞았던 건방진 소년은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포용력 갖춘 어른으로 거듭나려 한다. 앵거스가 한쪽이 유리눈인 폴에게 "어느 쪽을 보고 얘기해야 하죠?"라고 묻는 게 변화의 징후. 방학이 끝나고, 자신과 앙숙인 친구가 허넘을 놀릴 때에도 앵거스는 그냥 넘어가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전 같았으면 그 친구와 싸웠을 텐데.
◆후일담
영화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지니면서도 굉장히 웃기고, 따스하게 다가온다. 비호감이던 허넘과 앵거스는 지지와 격려의 대상이 된다. 관객은 어느새 둘의 행동에 울컥한 자신을 보게 될 지 모른다. 그래서 머리가 아니라 마음으로 다가오는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대표 연기파 배우인 폴 지어마티는 얼굴 표정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자격지심에 빠진 외골수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따스한 남자의 변화를 100% 구현한다. ‘오펜하이머’의 킬리언 머피와 함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현실감있게 보여준 조이 랜돌프는 여우조연상 후보 1순위이다.
<제 결론은요> ‘감’(100%)
재미 ★★★★
감동 ★★★★☆
연기 ★★★★☆
마음 침투력 ★★★★★
종합점수 ★★★★☆
※브런치는 더 조잘조잘, 기사론 더 간결합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1/0002621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