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밸런스다 (거의 불가능해서 그렇지)"
하마구치의 전작 ‘해피 아워’ 속 인간관계의 복합성, ‘아사코’의 독특한 리듬감, ‘드라이브 마이 카’의 휴머니즘, ‘우연과 상상’의 순간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이 모두 있습니다. 자연까지 포괄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갔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5시간 넘거나(‘해피 아워’) 3시간 가까이(‘드라이브 마이 카’)에 담겼던 그의 이야기가 2시간 내에 끝난다는 점도 놀랍습니다.(그 안에 알차게 담겼다는 게 놀랍죠.) 툭툭 던지듯한 전개가 신선한데요. 애써 꾹꾹 눌러 담는 듯한 전개 방식을 벗어났음에도, 영화의 이미지와 품고 있는 정서가 눈과 마음에 깊숙이 박힙니다. 40대 중반에 이미 칸·베니스·베를린 국제영화제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세계적인 감독이 새로운 경지를 열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물 맑은 시골 어느 마을에 도쿄 연예기획사가 글램핑장을 지으려고 합니다.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의 대표 격인 타쿠미(오미카 히토시)와 설득해야 하는 기획사 직원 타카하시(고사카 류지)·마유즈미(시부타니 아야카) 간 미묘한 충돌과 교감이 이뤄지는 가운데 충격적이지만 필연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충돌과 긴장의 문법
영화에서 서로 다른 세계는 충돌합니다. 일단 두드러지는 건 글램핑장 건설을 둘러싸고 도쿄의 기획사와 시골 마을 사이의 충돌입니다. 도시 대 시골, 자연을 파괴하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충돌이죠. 주민설명회에서 타카하시의 거만한 태도나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니, 상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마을 회장의 훈시까지 들으면 누가 봐도 도쿄 사람들이 나쁩니다.
그런데 다음 장면에 등장하는 기획사 사장, 컨설턴트와 비교하면 기획사 직원들은 인간적입니다. 주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마을로 가는 차 안에서 타카하시와 마유즈미가 나누는 대화를 듣노라면 ‘중간에서 참 안됐네’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직장인의 애환도 느껴지죠. 아 때려치우고 싶어..
참 매 장면 예술이지만 대화할 때 프레이밍이 재밌는데요. 처음엔 그들의 뒤쪽 측면에서 굳이 한 사람, 한 사람씩 비틀어 잡다가 커플 매칭 성공~~~ 앱 보고 나서 하하 웃고 나서부턴 뒤에서 둘을 한 번에 잡습니다. 그쵸. 둘이 정서적으로 가까워졌다는거죠. 이런거 하나하나가 카메라든 조명이든 사운드든 스타일에서 묻어나는 게 좋다는 겁니다.
암튼 각설하고, 그렇다면 영화는 선악의 상대성에 대해 말하는 영화일까요.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타쿠미의 말마따나 마을 주민들 역시 자연 입장에선 “외부인에 불과”하다는 점이죠.
결국 영화는 인간 대 인간을 넘어 자연과 인간의 충돌을 품고 있습니다. 글램핑장을 지으려는 장소는 사슴이 다니는 길이고, 타쿠미와 8살 딸 하나(니시카와 료)는 나무가 빽빽한 자연을 활보합니다. 더구나 하나는 마을 회장의 경고도 무시하고, 사슴이 물을 마시는 장소까지 홀로 다닙니다. 이곳은 사슴과 인간이 서로 반대편에서 마주 보는 공간으로 일종의 성역같이 느껴집니다.
“문제는 균형”이라고 말하는 타쿠미와 딸 하나조차도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세계 간 충돌은 카메라와 사운드의 활용 등 영화의 스타일에서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타쿠미가 도끼로 장작을 패고, 샘물에서 물 뜨는 장면은 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카메라 방향 전환을 통해 앞뒤, 좌우를 반전시키며 역동적으로 부딪칩니다. 의도적으로 180도 법칙을 깨고, 달리는 차의 앞모습을 보여주다가 돌연 차 뒤 방향으로 멀어지는 배경을 잡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타쿠미가 하나를 데리러 학교에 오는 장면입니다. 차 안의 타쿠미를 비치는데 그 순간 조명때문인지 좀 역광인가 푸른빛인가 이상한게 생기고, 동시에 찌잉 하는 무슨 UFO 수신하는듯한 기계음이 들려요...그리고 장면 전환, 아이들이 특정한 동작을 한 채 멈춰있는 모습을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 이동하며 담습니다. 뭐지 싶던 순간, 저 멀리 화면 후경에서 타쿠미의 차가 오는 게 보이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란 소리가 들립니다. 맞아요. 아이들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는 중이었어요. 이거 굉장히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처음 봤을 땐(두 번 봤어요.) 너무 놀랍고 좋아서 까무러칠 뻔 했던 씬이에요. (기사엔 못써서 신나게 써봤어요)
배경음악이 흐르다 돌연 멈추며 적막을 강조하는 것도 충돌을 부각합니다. 영화는 전면에 나무를, 그리고 그 뒤에 가려진 채 인물들이 다니는 모습을 자주 잡는데요. 자연이 전면일 때 흐르던 사운드는 화면에서 인간이 중심이 될 때 멈춥니다. 자연과 인간이 충돌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도록 하는 감독의 세심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또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다 한 바퀴 돌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듯한 트래킹 숏은 일상의 풍경을 생경한 이미지로 바꿔놓습니다. 이러한 충돌의 미학은 미묘한 긴장감과 불안감을 조성합니다.
◇대화 장면에 인간과 세계, 이야기를 모두 품는다
롱테이크가 많이 쓰인 영화의 호흡은 느립니다. 그렇지만 지루한 건 아닙니다. 일단 영화 속 대화 장면들은 재미있습니다. 전매특허인 이동하는 차 안 대화뿐 아니라 주민설명회조차 팽팽한 밀도로 흥미롭게 풀어냅니다.
전작들처럼 영화 속 인물들은 이야기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그 인간 자체로 존재합니다. 하마구치 감독은 연기를 번역처럼 여긴다고 합니다. 번역이란 결국 원본을 드러내는 일이죠. 그의 영화에서 배우의 대사는 결국 그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 그 사람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건 프랑스 누벨바그 거장 에릭 로메르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하마구치 감독은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 내한했을 때 봉준호 감독과 스페셜 대담에서 "로메르는 가상의 스승"이라고 했어요. 로메르가 한다면, 나도 저렇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고 있지도 않습니다. 여기서 영화의 오프닝과 끝에 반복되는 앙상한 나뭇가지 위로 슬몃슬몃 보이는 하늘 장면을 언급하고 싶은데요. 이 장면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집약적으로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나뭇가지로 대표되는 세부적 디테일과 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란 거대한 흐름, 그리고 화면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 세계 아래를 가로지를 인간까지, 영화는 모든 세계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느닷없다고? 실은 필연적인 엔딩
타쿠미가 돌연 타카하시를 공격하고, 하나는 사슴에게 공격당했음을 시사하는 결말은 느닷없지만, 실은 어쩔 수 없는 필연에 가깝습니다. 자연과 인간, 도시와 시골은 공존하기 쉽지 않으니까요. 글램핑장이 지어지면 사슴은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논리적으로 사슴이 있는 곳에 타카하시가 있어선 곤란한 거죠.
타카하시가 도시에서의 삶에 환멸감을 품고, 자연에 동화되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타쿠미와 힘을 합치는 건 영화적 환상에 불과합니다. 단 하루 만에 도시인이 타쿠미와 동일 선상에 놓일 순 없습니다. 원초적인 상황을 맞았을 때 역시 두 사람은 충돌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자연인 같은 타쿠미와 하나 역시 사슴 입장에선 외부인에 불과합니다. 자연은 아름답지만 냉혹합니다.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쉽게 손을 베이는 것처럼요. 야생 사슴은 인간을 공격하진 않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있죠. 이건 누가 악하냐, 선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세계 간에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론은요> ‘감’(100%)
순수재미 4.0
영상미학 4.5
관람후 뿌듯함 5.0
종합점수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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