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흙의 무대에 대리석의 박수를 보내다
"내 연기가 볼만했소? 마음에 들었다면 박수를 쳐주시오!"
생의 마지막 커튼콜 앞에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물었다. 이 말은 인생이란 결국 스스로 완수해야 할 한 편의 장엄한 연극무대임을 일깨워준다.
훌륭한 배우에게는 그를 알아봐 줄 훌륭한 관객이 필요한 법이다.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그 관객은 당대 최고의 영웅 카이사르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영민했으나 전장을 누빌 군사적 재능은 부족했다. 이를 간파한 카이사르는 그에게 아그리파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붙여주었다. 배우의 결핍을 채워 무대를 완성시킨 것은 관객 카이사르의 안목이었다. 아그리파는 평생의 벗이자 가장 충직한 파트너로서 친구를 지중해의 권력자로 만들었고, 카이사르의 통찰은 그렇게 로마의 기틀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체제는 ‘공화정이라는 정교한 분장을 한 제정’이었다. 그는 정치 심리 조작의 천재였으며, 대중이 자발적으로 절대 권력을 바치도록 유도하는 세심한 연출가였다. 정치를 단판 승부의 ‘주사위 놀이’가 아닌 주도면밀한 ‘체스 놀이’로 보았던 그는, 극적인 승리 대신 계산된 승리의 사다리를 묵묵히 밟아 올라갔다. 카이사르가 영웅의 이름을 남겼다면,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라는 거대한 유산을 남긴 셈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카이사르 같은 관객이 되어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무대엔 오랫동안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내가 누군가의 ‘탁월한 관객’이 되어주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이 일었다. 주변의 숨은 재능을 찾아 무대를 빛내주고 싶던 그때, 함께 일하는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변화는, 아주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출근한 그녀의 모습은 비 온 뒤 질척거리는 로마의 진흙탕 같았다. 조명은 꺼지고 소품들은 제멋대로 흩어진, 폐허가 된 무대 위에 홀로 선 배우의 얼굴이었다.
중1 아들의 일탈과 고3 딸의 좌절이 뒤엉킨 하소연은 어디서부터 길을 내야 할지 모를 혼돈 그 자체였다. 카이사르와 아그리파의 협력처럼, 나는 그녀의 무대를 재건할 ‘관객’이 되기로 했다. 우선 무대 위의 소음인 ‘질책’을 음소거(Mute)시키고, 그 자리에 ‘사랑’과 ‘관찰’이라는 배경음악을 깔아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 대사를 읊을 수 있도록 ‘책’이라는 대본을 건넸다.
“함께 책장을 펼치고, 책 속의 문장을 징검다리 삼아 아이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첫 발을 떼어보세요.”
변화는 정물화 같던 거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아들과 나란히 앉아 숨죽이며 책장을 넘겼다. 낱말 하나, 문장 한 줄을 징검다리 삼아 건널 때마다 서먹했던 모자의 눈길이 허공에서 수줍게 맞부딪혔다. 날 선 비난이 오가던 식탁에 ‘책’이라는 지도가 놓이자, 차갑게 식어있던 공기가 유순해지기 시작했다.
교실 구석에서 입을 굳게 닫고 있던 아들은 처음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누르며 책에서 읽은 문장을 내뱉었을 때, 아이는 비로소 지루한 관찰자가 아닌 주인공의 성취감을 맛보았다. 침묵과 고함뿐이던 집안에 비로소 다정한 말들이 음악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의 무대 장치도 세심하게 챙겼다. 꿈을 설계할 책상을 사주고, 독서실 이용권을 선물하며, 주말에는 치킨과 과일로 배경을 풍성하게 채웠다. 너희를 응원하는 관객이 늘 곁에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8개월 뒤, 그녀의 가정은 햇살에 빛나는 평화를 되찾았다. 큰딸은 다시 장학금을 받았고, 작은딸은 꿈꾸던 물리치료 전공으로 대학에 합격했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로마의 광장을 비추는 햇살처럼 환해졌다. 그 눈물은 더 이상 슬픔의 잔해가 아니라, 평화로운 왕국의 시민이 누리는 안도감이었다.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 위 아우구스투스의 저택 유적에는 그가 썼던 수많은 가면이 벽화로 남아 있다. 그는 그렇게, 평화를 완성했다.
“내가 발견한 로마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지만, 내가 남기는 로마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을 것이오.”
황제의 열정은 이제 나의 삶으로 흐른다. 누군가의 진흙 같은 하루를 대리석처럼 빛나는 인생으로 바꾸어주는 일. 그 찬란한 무대를 향해 나는 오늘도 박수를 보낸다.
"당신이 가장 빛날 그 순간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