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옷'보다 '맞는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
"유네스코에서 인턴해" 하면 한결같이 "오~" 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솔직히 들어갈 땐 잘 몰랐다.
이곳이 누군가는 몇 년을 공부해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들어오는 '꿈의 직장'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의' 꿈의 직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도.
돌이켜보면 학교 연계 인턴십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렇다 할 스펙이 많지 않았다.
4점대 학점과 (영어 수업 학점이 좋았음), 학과 대표 활동을 어필했고
교육 봉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는 점을 자소서에 녹였다.
하필 코로나가 겹쳐 비대면으로 힘겹게 영어 면접을 본 뒤에야 합격 소식을 들었다.
(첫 출근길에 긴장해서 덜덜 떨면서 갔던 기억이 난다.. ㅋㅋ)
첫 인턴, 2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감사하게도 꽤나 다양한 일을 주셨다.
크게 4가지 분류로 나눠보자면 아래와 같다.
리서치 및 데이터 분석: ESD(지속가능발전교육) 관련 국내외 연구 트렌드를 파악하고, SDG 4 워킹그룹의 연구 내역을 조사했다. RISS와 구글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정보의 바다에서 유의미한 소스를 건져 올리는 법을 익혔다. (무려 GPT를 안 쓰던 시절!)
DB 구축 및 프로세스 최적화: 유네스코 학교 리스트를 raw data로 DB를 만들고, 연간 보고서들을 '코드북(Codebook)' 기준에 맞춰 구조화했다. 오류 없는 DB를 보면 괜히 뿌듯해졌던 기억이 난다.
콘텐츠 기획 및 제작: '취학 전 교육권' 영문 보고서를 번역, 요약해 카드뉴스를 만들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뉴스 낭독을 위해 녹음실에 가기도 하고, 브이로그 인터뷰까지 하며 유네스코 여기저기에 내 흔적을 남겼다.
운영 지원 및 협업: 주 1회 팀 회의와 인턴 교육, 한영 번역, GNLC 행사 보조까지. 국제기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거대한 톱니바퀴를 아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다.
내가 속한 교육부는 동계 시즌에는 정적인 활동이 많았다. 동적인 이벤트는 하계에 많았던 편!
유네스코는 '문화유산'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교육부'의 힘이 굉장히 크다. (나도 몰랐다..)
논문도 뒤져보고, 윤문 작업도 하면서 유네스코가 얼마나 교육에 진심인지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활동은 '취학 전 교육권' 카드뉴스 작업이다.
내가 먼저 '이거 해 봐도 될까요?'하고 제안했던 작업이라 그렇다.
당시 코로나 때문에 미취학 아동들의 교육권이 잘 지켜지지 못했고,
해당 이슈를 지적하는 영문 보고서를 공식 한위 인스타에 올릴 수 있어 뿌듯했다.
PPT로 한 땀 한 땀 만들어서 퀄리티는 별로였지만.. 성취감 있었다 ㅎㅎ
교육부 팀원 분들도 정말 따뜻했다.
동문이셨던 팀원 분께서는 커리어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해주셨고
퇴사 날에는 팀장님이 귀여운 만화책과 선물을 챙겨주셨다.
우선, 유네스코의 KPI가 와닿지 않았다.
나는 목표/성과 지향적인 사람인데 UN 소책자나 다른 국제기구 소책자들을 읽어보면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목표가 많았다. (월드뱅크나 경제조직 제외)
'이걸 어떻게 측정하지?', '이걸 어떻게 개선하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고,
그렇다 보니 과업 자체에 몰입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다.
둘째로, 업무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졌다.
연구 과제와 함께 진행해야 하거나, 타 부서/국가와 협의가 필요한 경우 타임라인이 꽤 긴 업무들이 있었다.
물론 인턴에게 급한 업무를 주시지 않아서 여유롭게 느껴졌을 수 있지만,
더 빠르게 성과를 내고 눈에 보이는 성장을 내는 조직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작은 요소지만 취업이 너무 어렵다는 점도 있었다.
재직하시는 분들의 스펙이 정말 어마어마했는데
나 같이 연계 인턴이 아닌 경우에는 석사는 기본이었고
재직하시는 분들 중 박사 학위가 있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분은 대학에 출강까지 가심...)
정말 뜻이 있지 않은 한, 들어가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커리어를 숫자 야구로 치자면 유네스코 인턴은 내게 '아웃'이었다.
정답을 모르겠으면 소거법이 좋은 거 아닌가?
여하튼 첫 시작으로 '아닌 것'을 알았다는 데 큰 의의가 있었다.
따뜻하고, 주도적으로 내 의견을 낼 수 있던 팀
리서치/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를 수 있던 업무
무엇보다.. 집 근처!
직장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두 달간의 인턴십을 마치고 나는 다시 '학교'라는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험난한 수강신청을 뚫고 돌아온 캠퍼스에서 나는 평범한 경영학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나는 정말 사기업형 인재가 맞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검증해 보기로 했다.
무작정 수제잼을 만들어 팔아보는 실험부터, 그 경험을 발판 삼아 도전했던 또 다른 인턴십까지.
멋진 옷을 과감히 벗어던진 뒤에야,
비로소 나에게 맞는 핏을 찾아가는 진짜 선택을 시작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