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이 곧 경쟁력. 매거진을 만들며 느낀 한계와 커리어 지향점
에디터만큼 합법적으로 '꺼드럭'댈 수 있는 직군이 있을까?
뉴스도, PR도 아닌 중립적인 위치에서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좋아요'를 자유롭게 외칠 수 있는 사람.
예술과 상업의 경계에 있는 것만 같은 사람.
모든 것은 학과 선배와의 만남 행사에서 알게된 선배 덕분이었다.
프리랜서를 구한다는 오픈 포지션 공고가 뜨자마자
갖고 있던 글쓰기 포트폴리오를 싹싹 긁어모아서 지원해 자리를 따냈다.
그렇게 거의 1년을 근무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시는 정말 하기 나름이다.
개인 기사를 기획해서 내 이름을 떡하니 박을수도 있고, 맨 뒤 귀퉁이 '이달의 신상' 단신만 쓸 수도 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후자 쪽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던 일들을 조금 더 풀어보자면,
인터뷰 녹음본 풀기: 피처팀은 패션/뷰티를 제외하고 셀럽이나 아티스트 인터뷰를 위주로 다룬다. 시사도 다루고. 그래서 인물과 인터뷰가 많은데, 녹음본을 텍스트로 다시 바꾸는 일을 한다. 그래야 다시 텍스트의 형태로 재가공 할 수 있으니까. 와인 전문가와의 녹취록 푸는 게 어려웠는데, 보통 전문 용어가 많이 나오거나 외국인과의 대화(영어)를 풀 때는 더 공수가 많이 드는 편.
촬영 보조: 간식, 커피 심부름은 어시 몫이다. 보통 촬영장에서 포토그래퍼와 에디터가 같이 작업하는데, 필요한 물품이 있거나 소품이 있으면 어시가 갖다준다. 이전에 '와인킹' 촬영이 있을 때 동대문에서 급하게 왕관을 사갔었는데, 그 사진이 실제로 기사 지면에 실렸던 기억이 있다.
단신 쓰기: '왓츠뉴', '잇츠핫' 등 신상이나 브랜드 측에서 밀어주는 제품들을 홍보하는 짧은 기사 (2~3줄)를 쓴다. 이 때 주의할 점은 바로 '현학적인 말 쓰지 말기'다. 예를 들어 '감각적인', '세련된' 이라는 단어는 독자의 주관적인 견해가 많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애니멀 패턴', '단순한 라인' 처럼 중립적인 워딩을 써줘야 한다. 기사 배열이나 이미지도 신경써서 셀렉해줘야 한다.
온라인 기사 카피라이팅: 페이스북에 업로드할 기사에 어울리는 카피를 쓴다. 간결하고 눌러보고 싶게.
개인 기사 기획 및 발행: 해당 월이나 호에 전체적으로 어울리고 필요한 기사를 기획할 수 있다. 나는 '기하학적인 커피 기물'과 관련한 아주 짧은 기획을 한 적이 있다. 아주 어려웠다...
윤문: 기사가 실제로 인쇄되어 나가기 전에, 오탈자 교정이나 디자인 등 퀄리티 체크를 한다. 교정 쌤이 계시긴 하지만 실제 기획 의도는 어시가 더 잘 알 수도 있기 때문에 검토가 필수다. 그리고 파트 돌아가면서 크로스체크까지.
나는 다른 에디터들만큼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술도 안하고, 유흥도 크게 즐기지 않다보니 에디터라면 응당 제시해야 하는 감각의 폭이 좁다고 생각했다. 직접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감각의 수준은 간접경험과는 훨씬 다르다고 생각하기에..
또 인생에서 나는 '문제 해결자' 역할을 많이 했지, '취향 선도자'의 역할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K-장녀로서 '순간을 즐겨!' 보단 '숙제 먼저!'가 익숙했던 거다.
그래서인지 에디터라는 옷이 잘 맞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일을 하면서 명확히 알게된 점은 에디터는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과 이미지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라는 거였다.
자기만의 취향, '뭐가 좋고 왜 좋은지' 명확한 사람이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AI가 쉽게 대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10개월의 장정을 마치고, 나는 에듀테크 스타트업에 뛰어들게 됐다.
HLL 건물의 아늑하고 묘하게 중독되는 향을 벗어난 채.
새벽 마감을 뒤로 한 채.
셀럽과 인플루언서를 만날 수 있는 입장권을 포기한 채.
대신 '콘텐츠'라는 무기 하나는 챙겼다.
그리고 B2B '매출을 만드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