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금'을 지키기 위해서

by 지세훈 변호사

사람들이 변호사를 찾아오는 순간은 대부분 이미 많이 지친 뒤입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고 몇 달을 기다렸고, 배우자와 갈등을 겪으며 수없이 대화를 시도했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이 정도는 내가 참으면 되겠지”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버텨 왔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쓰다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을 때 비로소 변호사 사무실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상담을 하다 보면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분이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적어도 이 정도까지는 지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호사를 찾아오는 것을 ‘문제를 더 키우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일 때도 많습니다. 변호사를 만나는 것은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행동이 아니라, 이미 내 삶을 조금씩 잠식하고 있는 문제를 멈추게 하려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건 기록에서 매일 보는 것은 결국 ‘시간이 무너지는 과정’입니다. 소송 기록에는 날짜가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언제 돈을 빌려주었는지, 언제 연락을 했는지, 언제 약속이 어겨졌는지, 언제 갈등이 시작되었는지 같은 것들입니다. 그 기록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건의 본질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누군가의 인생에서 몇 달, 몇 년이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돈을 돌려받지 못해 끊임없이 연락을 해야 했던 시간, 배우자와 관계가 무너져 가는 것을 붙잡으려고 밤마다 고민했던 시간, 해결되지 않는 갈등 때문에 머릿속이 계속 그 문제에 붙잡혀 있던 시간. 법률문제는 겉으로 보면 돈이나 권리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의 ‘지금’이라는 시간을 빼앗아 가는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많은 분들이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겠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은 이해가 됩니다. 인간관계는 계산기로 간단하게 정리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친구에게 빌려준 돈이라면 더 그렇고, 가족 사이의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주 반복되는 패턴이 하나 있습니다. 기다림이 해결책이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기다리는 동안 문제는 조용히 커지고, 그 사이에 사람의 마음은 점점 더 지칩니다.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계속 개인적인 감정의 영역에서 붙잡고 있으면, 결국 그 문제는 삶의 여러 시간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일을 하는 시간에도,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순간에도, 심지어 쉬는 시간에도 그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런 비유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아직 링에도 올라가지 않았는데 이미 싸움을 시작해 버립니다.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로 설득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고, 스스로 법을 찾아보며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이미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실제 소송이라는 링 위에 올라가 보면 그 싸움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법에는 규칙이 있고, 증거가 필요하고, 절차가 있습니다. 그 링은 감정이 아니라 기록과 논리로 싸우는 곳입니다. 문제는 많은 분들이 그 링 밖에서 너무 오래 싸우다가 이미 지쳐 버린 상태로 링 위에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건을 보다 보면 또 하나 반복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문제를 오래 혼자 붙잡고 있던 사람일수록 자신의 시간을 많이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는 점입니다. 몇 년 동안 돈 문제로 마음을 끓였지만 결국 소송을 통해 해결되는 경우도 있고, 관계가 이미 무너졌는데도 계속 버티다가 결국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많은 분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걸 조금만 더 빨리 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말은 사건의 결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시점이 늦어질수록 본인 인생의 ‘지금’이 계속 사라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곧바로 소송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관계에는 여전히 대화가 필요하고, 때로는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습니다. 어떤 문제들은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 훨씬 빨리 방향이 정리된다는 점입니다. 변호사를 만난다는 것은 곧바로 소송을 시작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많은 경우 상담을 통해 지금 상황을 정리하고,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앞으로 시간을 어디에 써야 할지 판단하는 과정이 됩니다. 그 과정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많이 가벼워집니다.


제가 여러 종류의 사건을 오래 다루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이것입니다. 사람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돈도, 체면도, 심지어 승패도 아닐 때가 많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시간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는 시간, 일에 집중하는 시간, 아이와 웃는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쉬는 시간. 그런데 어떤 문제들은 그 시간을 조금씩 갉아먹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삶을 지키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변호사를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법률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내 인생의 ‘지금’을 더 이상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심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결심이 조금 더 빨리 이루어질수록, 본인의 시간을 조금 더 오래 지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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