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농 첫 해에 겪은 여섯번째 이야기
[감기는 다 나았나요? 일전에 이야기했던 방울토마토의 육묘를 부탁해도 되나요?]
산채마을의 송사장에게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육묘장이 없기 때문에, 토마토와 고추의 육묘를 외부에 맡겨야 했다. 대추방울 토마토를 재배하고 있는 송사장에게 토마토 육묘를 부탁했다. 육묘 경험이 없는 나였기에, 같이 키우면서 배워보고 싶었다. 물론 필요한 비용은 지불하겠다고 했다.
토마토 육묘는 보통 2개월 정도 걸린다. 육묘시설을 갖춘 비닐하우스에서 모를 길러야 한다.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병균을 막아주기 위해서, 40센티 정도 높이에 육묘판을 설치한다. 토마토 3천주를 육묘하는 데, 대략 3미터 * 12미터 정도 크기의 육묘틀이 필요하다.
토마토 씨를 모판에 뿌린 후 발아할 때까지의 적정온도는 30도 전후이고, 싹이 모종으로 자랄 때는 20~25도에 맞춰서 관리해줘야 한다. 횡성군 둔내면에서는 5월 중순쯤 토마토 정식이 이뤄지므로, 육묘는 3월 중순부터 시작된다. 이때 밤 온도는 여전히 영하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육묘틀에 이불을 덮어주고 전기열선이나 농업용 열풍기를 이용해서 온도를 올려 주어야만 한다.
발아를 하고 제대로 된 모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수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의 하루에 한번꼴로 물을 줘야 한다. 정식하기 전에 몇 차례 비료와 농약도 살포해주는 것이 좋다. 많은 수확을 위해서는 튼튼한 모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22년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여러 차례 술도 마시고 친하게 지냈던 송사장이었다. 내가 6백평의 밭을 임대해서 토마토와 고추 등 몇몇 작물을 재배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했던 그였다. 필요하면 나대신 자신이 농사를 짓겠다는 농담까지 곁들여 가면서.
토마토 육묘를 부탁하는 것이 부담이 될 지 몰라서, 문자를 보내기 한달전인 2023년 1월에는 송사장을 만나서 직접 물어봤었다. 확실하게 긍정적인 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가능해 보이는 분위기로 판단했었다. 부탁해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2월초에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송사장이 형편상 육묘가 어렵다고 하면, 둔내의 한 육묘장에 맡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답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불과 한달전까지만 해도 스스럼없이 전화할 정도로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다. 육묘 부탁이 어려우면, 힘들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관계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소통 창구를 닫아버리는 걸까?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송사장의 대화 거부는 나에게 충격이었다. 50대 초반의 송사장은 산채마을 주민들 중에서 나와 같은 50대여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었다. 내가 산채마을에 정착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송사장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만큼 귀농과정에서 많이 의지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송사장에게 육묘를 부탁했는데, 답변이 없네요. 혹시 제가 육묘를 부탁하는 것이 농촌에서는 부담스러운 일인가요?”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알고 지내던 김대표님에게 송사장 일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강원도 농촌 문화를 잘 모르는 내가 혹시나 무리한 부탁을 한 것은 아닌 지 확인하고 싶었다. 김대표님은 횡성군 둔내면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멘토 역할을 한 분이었다.
“무리한 부탁은 아닌데요. 송사장이 육묘가 가능한 상황이고, 비용도 주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답변 없는 송사장에게 더 이상 매달릴 수는 없었기에, 둔내의 다른 육묘장에 일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송사장과는 서먹한 관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농촌에서 하루중 내가 접촉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일정중에 부딪치거나 같이 일할 기회가 있는 사람이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들의 행동에 대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면, 김대표님에게 자문을 구하곤 했다.
“내 밭에 물이 넘쳐서 홍수 피해를 입었는데도, 허총무가 한번도 와보지 않더라구요. 그가 작업한 것들이 무너져 버렸는데도요.”
허총무는 포크레인 작업을 하는 마을 사람이다. 2023년 겨울 한달동안 내 밭에 마사토로 복토하여 1.5미터를 높이고, 마을 하천과의 경계지점에 대형 블록 쌓는 작업을 같이 했다. 그런데 2024년 여름 며칠동안 폭우가 쏟아지면서, 대형 블록 일부가 무너져버렸다. 대형블록 밑에 깔아놓았던 자갈들이 물로 씻겨져 버리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부실공사였다.
그런데 허총무는 한번도 내 밭에 들리지 않았다. 본인이 한 작업의 결과인데도. 아마도 책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허총무도 50대 중반이어서 산채마을에서 나와 비교적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포크레인 작업을 부탁한 이유였다. 그런 그의 무책임한 행동에 화가 난 나는, 그 뒤부터 포크레인 작업은 다른 사람과 진행하였다. 나의 질문에 대해 김대표님은 아무 말도 안했다. 그도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었다.
농촌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김대표님을 찾아가곤 했다.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마을에 내 농장이 있었기에, 더 자주 보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내가 낯설은 농촌문화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농촌에서 자란 나는 농촌에 대한 포근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내 마음안의 농촌 사람들은 모두 정다운 이웃이었고, 경사든 애사든 모든 일을 같이 하고 서로를 챙겨주었다. 멀리 사는 친척보다 훨씬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이라서 그런가?’
‘강원도는 귀농 귀촌 인구가 많아서, 이기주의적인 문화가 생긴 걸까?’
‘모든 농촌 사람들이 그런 것이 아니라 소수 일부 사람들의 성격 탓인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송사장이나 허총무의 속내를 정확히 모른다. 어쩌면 그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섭섭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들의 소통 방식은 내가 그동안 회사 생활을 하면서 경험했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동료들간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최소한 일방적으로 소통창구를 닫지는 않는다. 필요하면 소통에 대한 교육도 받는다. 그러기에 상대를 배려한 소통은 기본이었다.
농촌같은 소규모 공동체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소통에 대한 고민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잘 아는 사이라서. 그래서 그런지 자신의 의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상대편에 대한 배려의 말도 그다지 사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서로 살아온 환경이 너무 다르다 보니까, 몇 마디 말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지 모른다. 상대편을 잘 모르기에, 어떻게 배려를 해야 하는 지도 알기 어려울 것이다.
2022년 농촌에서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둔내면에서 3년째 생활하고 있다. 농촌사람들과는 case by case로 관계를 맺는 것에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다. 사람마다 만남을 가질 때 원하는 거리가 다르듯이, 이곳 사람들도 그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거리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나도 그들을 만날 때 원하는 간격이 다르다. 이제 마을 사람들 개개인별로 적당한 거리감을 찾는 일에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농촌 사람들에 적응하는 과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