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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Oct 31. 2023

열다섯, 약사가 되기로 결심하다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나는 지금 성공한 사람일까?

어릴 적의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컷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 슬픔과 기쁨, 설렘과 아쉬움을 마음껏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작가. 책 읽는 것도 좋아해서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내가 만들어보고 싶은 욕망도 컸다. 종이를 직사각형으로 잘라 반 접어 책 모양을 만들고 표지에 그림을 그리고 내용을 적어 손바닥만한 얇은 책을 몇 권 만들기도 했다. 유치원 때부터 미래의 내 모습 그리기 같은 수업이 많았는데 글쓰는 모습, 이젤에 그림 그리는 모습을 그리는 게 재미없을 때면 엄마의 직업인 간호사를 그린 적도 있다.(남의 엉덩이에 웃는 얼굴로 주사를 놓는 간호사를 그린 그 그림은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그림이다) 하지만 간호사를 꿈꾼 적은 없었다. 정말로 내가 꿈꾸었던 것들은 시인, 드라마 작가, 소설가였다.


나의 장래희망이 무엇인지, 집에서 책을 얼마나 빨리 많이 읽는지, 일기를 얼마나 집중해서 쓰는지 잘 알고 있던 엄마는 당연히 내가 문과쪽으로 진학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나와 동생이 글을 잘 쓸 수 있도록 수필가 선생님께 글쓰기 수업도 보내셨다. 그래서일까, 국어 과목은 늘 좋아했다. 특히 이야기 읽는 걸 좋아해서 문제 푸는 것보다 지문 읽는 걸 좋아했다. 문제를 풀면서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과 같은 질문에서 아주 헷갈리는 답안 두 가지가 있을 때면 항상 '이 문제를 만든 사람은 작가랑 이야기를 해본거야? 말하고자 하는 바가 1일 수도 있고 2일 수도 있지!'같은 반항심이 강하게 들곤 했다. 나의 생각은 그랬다. 문학을 포함한 예술이라는 분야는 보는 사람,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답이 다 다를 수 있는데 이렇게 획일화된 답변을 요구하는 문제형식은 틀린 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입식 교육을 따라가야만 했다. 그게 학생이 해야 할 일이니까. 여전히 국어 공부를 잘 하는 것과 재능있는 작가는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머리가 커 가며 여러 과목을 공부하게 되면서 나는 수학과 과학을 사회나 역사보다 좋아했고 성적도 더 잘 받았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데다 공부를 할 때 손이 게으른 습관을 가진 나에게는 온당한 결과였다. 쓰고 읽기를 반복해 내용을 외워야 하는 과목은 암기가 다 되어 있어야만 다섯 개의 답안 중 정확한 답을 고를 수 있었다. 나는 늘 암기를 제대로 못해서 꼭 두 가지 답안 중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하곤 했다. 모든 문제가 겹치는 내용 없이 다 다른 내용을 외우고 있어야만 풀 수 있었다. 하지만 수학, 과학은? 공식 한 두 가지만 가지고도 응용 문제가 여러 개 나왔다. 하나만 외워도 여러 문제를 풀 수 있다니 나처럼 암기가 젬병인 학생은 선호할 수 밖에 없는 과목이었다.


수학, 과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여전히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좋아하는 일을 꿈꾸었고 그래서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와 키가 얼추 비슷해지면서부터 내가 문예창작과에 가고 싶다고 할 때마다 엄마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 글을 쓰는 것이 주 직업이어서는 전국에서 1, 2등으로 잘 쓰는 것이 아니면 먹고 살기가 힘들다, 글 쓰는 것은 어디까지나 취미활동이어야 한다... 엄마의 그런 말이, 잔소리가 너무 싫었다. 엄마는 내가 교대나 사범대를 가서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 안정적이고 퇴근이 이르고 방학이 있고 임신, 출산 휴직이 용이하다며 귀가 따가울 정도로 나를 설득했다. 애초에 남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데다 학교 선생님들이 일하는 모습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보면서 나는 절대 교사는 되고 싶지 않았다. 시켜준다 해도 잘 해낼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글을 쓰는 데에 '소재'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에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신선한 소재로 글을 쓰기가 더 편하다는 것을 안다. 특히 나처럼 사회, 역사 과목에 취약한 사람들은 가지고 있는 배경지식이 약하기 때문에 직업과 관련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는 편이 글을 쓰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의사나 교사와 같은 직업을 가지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자기가 일을 하며 겪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이야기에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 읽어보며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나는 말을 잘 듣는 아이였고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학원에서 보내게 되면서 자연스레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여가 시간이 있어도 책을 읽지 글을 쓰게 되지는 않았다. 마치 먹는 게 요리하는 것보다 더 쉽고 더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자연스럽게 꿈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었다. 다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도 내 점수에 맞춰서 어느 대학의 어느 과에 가게 되겠지, 그러고 나면 나중에 할 일도 정해지겠지. 막연하게만 생각했다. 열심히 학교, 학원, 영어과외 수업을 들으며 살았다. 꿈에서도 학교나 학원이 나올 정도로. 나에게 영어 개인과외를 해 주시던 선생님은 과외를 전문으로 하시는 30대 후반의 여성분이었다. 나는 남들보다 늦게,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영어 사교육을 시작했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아서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개인과외를 선택했다. 내 동생보다 조금 더 어렸던 아들을 하나 키우시는 워킹맘이셨다. 인간적인 분이셔서 수업 중 옆길로 새서 다른 이야기도 가끔 하시고 내 생활에 관심도 가지셨고 친근하셨다. 그 분이 나에게 그랬다. 너는 공부를 잘 하고 문과보다는 이과 과목을 더 잘 하고 좋아하니 약사, 아니면 치과의사를 생각해 보라고. 의사는 너무 고생길인데다 여자 의사는 결혼하기 힘들어. 약사나 치과의사가 되어서 의사랑 결혼하면 딱이야. 


이 분이 내 친구에게도 직업 추천을 하신 적이 있다. 나는 이 친구와 어울리면서 단 한 번도 이 친구가 미래에 뭐가 될 지, 뭐가 어울리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과외 선생님께서는 나를 픽업하시며 이 친구를 우리 집 근처까지 태워다 주시면서 처음 보시고는 대뜸 하신 말씀이 '얘, 너는 나중에 모델하면 되겠다'였다. 그 친구는 떨떠름해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웃는 얼굴로 '네? 제가요?'라는 반응이었다. 친구의 옆에 앉았던 나는 선생님의 안목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친구는 서른 명이 조금 넘는 반에서 항상 시험 점수가 30등을 넘길 정도로 공부를 잘 못했지만 얼굴이 아주 작고 몸이 마른 편이었다. 특히나 교복 치마 아래로 쭉 뻗은 다리가 정말 예뻤고 쌍커풀이 없고 끝이 위로 쭉 올라간 눈은 잡지에 등장하는 멋진 언니들의 강렬한 눈과 비슷했다. 키가 눈에 띄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평균 이상은 됐다. 친구와 모델이라는 직업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멋진 직업이기도 하고. 고등학교를 다른 곳으로 진학하게 되어 그 이후 연락이 끊긴 친구이지만 그 친구도 선생님의 제안을 한 번 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나는 선생님의 추천을 진지하게 곱씹어보며 생각했다. 중학생인 나는 미래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미래를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그런데 어떤 미래? 그냥 남들이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는 미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가 좇아야 할 나만의 미래를 그려야 했다. 그게 참 어려웠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 중에서도 무엇을 잘 할 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나보다 인생을 더 오래 살았고 많은 학생들을 만나본 선생님의 말씀이 일리있게 다가왔다. 2000년 대 당시만 하더라도 '결혼' 또한 대학을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필수 단계로 생각되는 것이었고 대학은 스카이, 결혼은 의사와 하는 것이 성공의 척도였다. 나는 연애조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으면서 훌륭한 신붓감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의사와 치과의사보다는 의사와 약사가 함께 하는 삶을 상상했을 때 더 안정적이고 어울려 보였다. 남편이 운영하는 병원 아래에서 약국을 하면 상부상조 아닐까. 


그렇게 결심했다. 나의 진로를 정했다.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약사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의사와 결혼해야겠다. 내 약국을 열고 일하다가 여유가 있을 땐 책을 읽어야지. 아이들을 키울 땐 파트약사를 쓰거나, 남편이 잘 벌면, 일을 안해도 되겠다! 우리 엄마가 고개를 깊이 끄덕이며 좋아할 생각이었다. 엄마는 내가 의사 남편을 둔, 겨울 코트가 여러 벌 있고 백화점을 제 안방처럼 들락거리는,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아줌마들처럼 살기를 바랐다. 그 아줌마들은 백화점 직원들에게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고 주변 다른 아줌마들에게서는 부러움을 샀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게 좋은건지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우리 아빠랑 살았으니 그런 게 좋아보이는 게 당연하다. 삭막한 집, 돈도 애정도 없을 바에야, 돈이라도 있어서 행복을 살 수 있는 게 얼마나 좋니.


내가 입시를 치르는 해부터 약학대학이 4년제에서 6년제로, 편입제로 바뀌는 바람에 나는 바로 약대로 진학을 할 수 없었다. 2년을 다른 과에서 보내고 와야 했다. 약대의 내 동기들도 마찬가지였고 아예 다른 과를 졸업하고 편입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각자 약대에 오게 된 동기가 다양한 가운데 나는 중2 때부터 약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면 다들 신기해했다. 부모님이 약사인 약수저도 아니면서 그렇게 이른 나이에? 다른 전공과 직장을 돌고 돌아 온 사람들은 특히 나의 이른 목표설정을 부러워했다. 2년 간 공부했던 공대에서 나 말고도 다른 친구들이 뒤늦게 약대 진학을 했는데 나에게 어떻게 공대를 버리고 약대를 갈 생각을 했냐며 자기네들도 진작에 왔어야 했는데 몇 년을 허비하고 말았다며 가슴을 쳤다. 그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 인간인지 느꼈다. 선생님은 우리 엄마처럼 나를 설득하려 하신 것도 아니고 딱 한 번 지나가듯이 말씀하신 것 뿐인데 거기에서 내 미래에 대한 힌트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사실 이 모든게 아무런 굴곡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약대 입시 준비 학원에서 첫 상담을 할 때 고급반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공대에서 생물학을 듣지 않았던 나는 생물학 기초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일반반을 선택하고 말았고 중간에 반을 바꿀 수가 없어 끝까지 일반반에 머물러야 했다. 그 선택만큼은 아직까지도 후회하는 선택이다. 더 어렵더라도, 내가 부족하더라도 고급반에 붙어있어야 내 실력을 그만큼 끌어올릴 수 있었을텐데. 그랬더라면 시험 성적도 더 잘 받았을텐데.


엄마와의 갈등도 있었다. 엄마는 내게 학원비와 강남 거주비 등 돈이 많이 들어 절대 재수를 시켜줄 수 없으니 꼭 한 번에 붙으라고 했다. 내가 너무나 지원하고 싶은 학교와 내가 2년을 다니고 중퇴한 학교가 같은 군에 속해서 두 군데를 모두 지원할 수가 없었다. 엄마는 아무래도 전적대를 지원하는 것이 면접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고 합격률이 높지 않겠냐고 했다. 엄마와 이 문제로 언쟁을 벌였지만,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 지원해서 떨어질 경우와 엄마가 지원하라고 시킨 학교에 지원해서 떨어질 경우를 비교해보면 후자가 마음이 편했다. 엄마 말대로 그 쪽이 합격할 확률이 더 높기도 하고... 결국 나는 말 그대로 펑펑 울면서 전적대에 지원을 하고 엄마와 몇 개월 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합격을 하고 약대생이 됨으로서 엄마와 화해를 하게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마음이 정말 힘들었고 많이 울었다. 가고 싶은 학교에 지원조차 하지 못해서. 대학교의 이름이라는 게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고 내가 진학한 곳에서 정말 멋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에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었다. 


종국에 나는 열다섯 때 꾼 꿈을 이루었다. 약사를 꿈꾸는 사람들의 이유는 다양하다. 약이 좋아서, 약학이 흥미로워서와 같은 학구적 이유, 면허가 철밥통이라고 생각해서, 벌이가 나쁘지 않아서, 전문직이라서와 같은 현실적 이유. 내가 약사를 꿈꾸었던 이유는 오래된 만큼이나 많이 낡았다. 과학 중에서 화학을 제일 좋아했고, 의사 남편을 갖고 싶었고. 몇 년 전 일했던 병원 약제팀의 동료가 꼭 의사와 결혼할 거라며 꾸준히 의사들과 소개팅을 해서 결국 의사와의 결혼에 성공한 것을 보면, 나만 그런 이유로 약사가 된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다만 지금의 나는 열다섯의 나와 다른 사람일 뿐이다. 멀쩡한 직장도 가지고, 고양이도 두 마리 부양하는 어른의 시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니 나는 의사와 결혼할 필요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어렸을 땐 약사가 되어서 의사와 결혼하는 것이 내 인생을 완성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현재의 나로서, 약사 일을 하는 나 자신으로서 오롯이 완전함을 느낀다. 30대가 되며 건강이 조금 나빠졌는데 평일에 매일, 게다가 토요일까지 격주나 다달이 일을 해야 하는 정규직이 힘들어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다. 나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수입이 부족하지 않음에 감사하다. 복약지도를 하고, 약 상담을 하는 일은 해보기 전에는 두려웠는데 하다보니 나의 성격과도 잘 맞는 일이라 감사하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사람의 역할을 나 혼자의 힘으로 해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여전히 엄마, 이모를 포함한 친척 어른들은 그들의 기준에 반쯤 완성되어 보이는 나에게 의사 남편 만들어주기를 포기하지 않은 것 같다. 금전적으로 누군가에게 기대면 더 편한 삶을, 비싼 것들을 더 많이 누리고 살 수 있다며 나를 설득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50대, 60대가 되면 나의 관점이 또 바뀔까? 그 나이가 되면 다시 열다섯으로 돌아간 것 마냥 의사 남편을 원하게 될까? 내가 그 때 의사 남편을 갖고 싶었던 건, 그게 결혼 시장에서의 성공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공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 대학도, 직업도, 결혼도 모두 성공적으로 해내고 싶었다. 인생이 성적표라면 못해도 A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결혼을 '잘' 할 필요도 없고 굳이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나도 변했다. 지금의 내 인생이 B+이건, B이건 더이상 내게 중요치 않다. 내가 매일 하는 일에 만족하고 그거면 됐다. 누군가 행복하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네, 라고 대답할 수 있다. 지금의 나에겐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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