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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원 Nov 28. 2023

<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부당한 죽음을 겪은 자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상상

어렸을 땐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는 웹사이트의 전형적인 비밀번호 찾기 질문에 항상 바람이라고 답을 적곤 했다. 날아다니고 싶은 건 아니었다. 자유의지를 가진 새와 다르게 의지 없이, 이끌리는대로 흘러가듯 다니고 싶었다. 가볍게 땅을 스치고 세차게 나뭇가지와 부딪혀보고 싶었다. 낙엽을 주워올렸다가 다시 흩뿌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넘기고 싶었다. 학교에서 바람에 대해 기압차에 의해 생기는 공기의 흐름이라는 걸 배우고 나서는 바람이 되고 싶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조금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다음 생에 무언가가 될 수 있다면 바람같은 무언가가 되고 싶다. 공기 중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질소가 된다면 세상을 맘껏 떠다닐 수 있지 않을까? 어찌되었건 내 몸에는 이미 질소 원자가 셀 수 없이 많지 않은가? 언젠가 내 몸이 해체되고 나면 결국에 나는 어딘가로 흘러가게 되지 않을까? 공기 중이건, 땅 속이건. 결국에 나의 일부는 바람이 되고, 일부는 물이 되고, 나머지는 흙이 될 것이다. 어릴 적 나의 염원이 언젠가 이루어질 거라는데 기쁘지는 않네.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일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이 소설에서는 죽은 자들이 서로를 볼 수 있는 형태는 갖추었지만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며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데 바람이 지나갈 수 없는 벽이나 장애물도 마치 와이파이 전파가 통과하듯 통과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가고 싶은 장소에 원하는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귀를 기울였을 때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곳으로 가게 된다. 마치 내가 어릴 적 꿈꾸었던 그런 것과 흡사한 모습이라 반가웠다. 작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해 봤구나, 싶어서. 귀신, 혹은 이 세상에 우리가 감지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무언가가 '파동'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죽은 영혼들이 행동가능한 범위에 대한 설정이 꽤 그럴듯했다. 영혼들은 줄을 서서 전생의 정보를 알려주는 귀 검사를 받고 일곱 번의 밤, 즉 일곱 개의 달이 지나기 전까지 빛 너머로 갈 수 있다. 빛 너머로 가기 전 까지는 이름이 불리는 곳에서, 바람에 실려간 곳에서 인간들, 악귀들, 억울한 영혼들을 마주치며 내가 죽고 나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말리가 영혼이 되어 눈을 떴을 때, 자신이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머리를 세게 맞으면 그 충격으로 기억을 잃듯이, 말리도 죽음이라는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듯했다. 자신이 못다한 일을 끝내기 위해 영혼의 몸으로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결국에는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짧았던 삶의 의미도 찾고 자신의 삶이 어떻게 끝나게 되었는지도 알게 된다. 독자는 말리의 영혼을 따라다니며 말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 사람이 살았던 스리랑카라는 나라는 어떤 곳인지,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게 된다.


책에서 그런 구절이 있었다. 폭탄은 공평하다고. 눈앞에 던져진 폭탄 앞에서는 제 아무리 대통령이든 부자든 몸이 산산조각나고 그 어떤 돈과 지위도 그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과연 폭탄은 공평한가? 2020년대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폭탄을 어디에 떨어트릴 지 결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폭탄이 떨어지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생각하면 폭탄은 절대 공평하지 않다.


나 자신도 대한민국이라는 휴전국가에 살고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 국민들은 전쟁의 참상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총과 몽둥이에 민간인들이 맞아죽던 때가 분명히 있었고 역사책을 넘겨보면 그 때가 그다지 먼 과거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를 직접 겪지 않은 우리 세대는 그 상처를 짐작만 할 뿐이다. 반면 나의 남자친구는 여전히 전쟁이 진행중인 우크라이나에서 왔다. 아버지는 폴란드, 어머니는 네덜란드, 자신은 한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여동생만 고향에 남았다. 전쟁 중에는 취업이 어려우니 경제활동을 위해 부모님께서 해외로 나가셨다고 한다. 혼자 남은 여동생을 위해 남자친구가 이따금 이것저것 택배를 보내주는데 여동생은 잘 받았다는 의미로 택배를 뜯는 모습을 영상으로 찍어서 보내준다. 초반에는 신이 나서 들뜬 모습으로 박스를 뜯다가 항상 마지막은 오빠가 보고 싶다, 우리 가족이 다함께 있던 시간이 그립다며 우는 모습으로 영상이 마무리된다.


스무 살 여자애가 가족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누가 봐도 마음이 아플 것이다. 전쟁은 가족을 찢어놓고 무고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건강을 위협하고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항상 욕심 때문이다. 크름반도를 갖겠다는 욕심, 타밀족을 내몰고 싱할라족만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욕심. 타밀족과 싱할라족의 갈등은 영국이 스리랑카를 지배하면서 불을 붙인 것이다. 식민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영국의 입장에서는 아주 뛰어난 전략이었다. 스리랑카 땅을 통째로 지배했던 영국을 미워하는 대신, 타밀족은 싱할라족을, 싱할라족은 타밀족을 미워한다. 영국은 지배했던 당시나 지금이나 그들로부터 미움이나 배상요구를 덜 받는다. 똑똑하고 치사하고 더럽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수많은 전쟁의 원인에 영국이 끼어있다. 그럼에도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민족은 같은 유럽 동네에 사는 아일랜드인, 프랑스인 밖에 없다. 호주에서 태어났지만 아일랜드계 뿌리를 가진 친구가 영국을 정말 싫어하는데, 스리랑카 사람들도 합심해서 영국을 싫어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전을 멈추고,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서있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도를 찾아가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역사, 정치를 어려워 하는 나에게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책 속으로 이끌려 들어가서 시간을 보냈다. 말리의 영혼을 따라 이 곳, 저 곳을 다니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행간에 시선을 멈추고 상상을 했다. 왜냐하면 지금도 지구 어디에선가 책 속의 일과 거의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 지금 순간에도 누군가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시체를 태울 테니까.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태어나고 단 한 번도 온 세상이 평화로운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인간은, 인류는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정의와 선이 부당과 악보다 항상 강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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