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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May 24. 2024

악마와의 토크쇼

오랜만에 볼 만한 수작 공포영화

근자에 본 영화 중 최고. 개인적 리스트에서 1·2위를 다툰다. 나는 이 영화의 형식적 스타일이 좋다. 70년대 미국 토크쇼를 그대로 표현해 냈는데 그때 태어난 내가 아님에도 그 시절의 향수를 느낄 수 있었다. 적은 예산으로 기발한 아이디어와 색다른 연출력을 드러낸 영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부류다.

무서움의 정도는 약하다. 이 영화는 공포의 소재를 다뤘지만 무섭지는 않다. 공포의 느낌을 기대하고 본다면 실망할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호평하는 이유는 앞서 말한 형식적 측면과 디테일로 교묘하게 감춰진 주제 때문이다. 이 영화를 한 번 보고 스토리(내막까지 포함한)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감독이 사실과 허구를 분간하기 힘들게 연출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사연, 세트장 소품들의 디테일, 상황마다 달라지는 화면 비율(총 3개). 이런 것들이 영화 내에서 한데 뒤섞여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구별하기 힘들게 한다. 악마가 정말 소녀 몸에 강림한 것인가? 매들린의 영혼이 악마인 척 소녀 몸에 들어온 건 아니었을까? 마지막에 악마가 나타난 모습은 진짜였을까? 최면에 걸려 모두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이 토크쇼의 영상 자체가 후대에 부분적으로 조작되진 않았을까? 눈썰미 있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에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아서 줄거리를 단순하게, 시청률에 환장한 진행자가 악마에 빙의된 소녀를 토크쇼에 출연시켜 재수 없게 참극으로 끝난 것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 정도로 단순한 작품이 아니다. 보면 볼수록 새롭고 충격적인 것들이 발견될 것 같은데 극장에서 한 번만 봐서 아쉬울 따름이다.


미디어 조작을 비판하는 게 주제다. 거짓(꿈)에 속지 말자는 것이다. 4 대 3 화면비로 과거의 토크쇼를 보여주지만 OTT와 유튜브에 빠져 있는 현대인이 메시지의 대상이다. 방송의 '주작'은 70년대뿐 아니라 지금도 횡행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현대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아주 교묘한 트릭 하나를 심어 놨다. 70년대 토크쇼에도 주작이 있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영화에도 주작이 있다는 건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냈을까?

초능력 사냥꾼(카마이클)이 준 박사와 릴리의 악마 소환을 보고 저건 거짓이라 말하고 자기도 최면을 사용할 줄 아니 보여주겠다고 나선다. 준 박사와 릴리처럼 마주 보고 앉는 카마이클과 거스. 회중시계를 꺼내 빙빙 도는 소용돌이 무늬를 보여주자 거스가 최면에 걸리고 옷을 벗더니 애벌레를 목에서 뽑아낸다. 최면을 건 카마이클은 자기 눈에도 애벌레가 보여서 당황하며 최면을 중단하지만 거스는 갈라진 배에서 애벌레를 쏟아 내고 결국 쓰러진다. 다행히 그 후에 모두의 최면이 풀려 안심하고 거스도 옷을 챙겨 입는데, 이건 토크쇼에 함께 있던 악마의 장난임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최면을 건 카마이클도 애벌레를 보고 당황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최면을 건 사람은 환각을 보지 않아야 하는 게 맞다. 근데 그 또한 환시를 경험했다는 건 악마가 토크쇼 공간에 있는 모두에게 최면을 걸었다는 뜻이 된다. 문제는 그 환각 장면을 영화관의 관객도 보았다는 것이다. 전 세계 모든 관객이 애벌레가 몸에서 나오는 장면을 똑같이 봤을 것이다. 근데 이상하지 않은가? 이 영화는 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 형식이다. 70년대 토크쇼의 원본이 발견되어 그걸 지금의 관객에게 보여준다는 설정이다. 그럼 관객들은 애벌레를 보지 않았어야 함이 맞다. 왜냐하면 현재의 관객은 70년대 카메라가 기록한 방송을 보는 거지, 타임머신 타고 당시로 돌아가 토크쇼 현장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잭(진행자)이 환각 체험을 믿지 못하겠다며 카메라를 돌려 보자고 했을 때 그 녹화 영상에는 애벌레 장면이 없었다(카메라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카메라 기록을 보는 우리(관객)에게도 애벌레 장면이 나오지 않았어야 한다. 근데 우리는 그걸 왜 봤을까? 70년대 토크쇼 현장에서 최면을 걸었던 악마가 지금 영화를 보는 우리 곁에도 함께 있어서 그때처럼 관객에게 최면을 걸었다는 걸 이 영화는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을 때 악마도 함께했다는, 그런 트릭 같은 무서움을 연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걸 증명하듯이 영화 마지막쯤 화면이 블랙으로 꺼지고 지지직거릴 때 악마의 모습이 잠깐 나타난다, 관객을 비웃는 표정으로. 어쨌든 그런 연출로 인해 현대의 영상물(극장 영화, OTT, 유튜브, 틱톡, 릴스 등)도 악령에 의한 것이든 창작자의 속임수에 의한 것이든 주작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우리는 거짓에 속지 않도록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제도 드러난다.


내가 지금까지 종합한 바에 따르면, 한 번 보았기 때문에 당연히 틀렸을 수 있다, 그럼에도 대강의 줄거리를 파헤쳐 보자면 다음과 같다. 주의. 스포일러 있음.

토크쇼 진행자 잭은 악마를 숭배하는 사교 클럽 '그로브'의 회원이다. 그 단체는 악마에게 희생하는 대가로 회원들의 사회적 성공을 보장한다. 잭은 그로브를 상징하는 올빼미를 이름으로 하는 쇼(Night Owls)를 진행하고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싶어 한다. 그가 악마에게 바친 것은 자기 아내(매들린)의 목숨. 그녀가 유명 배우였기에 공식적인 사인은 폐암으로 알려지지만 사실 그녀는 비흡연자였다. 아마 잭이 방송국(UBC) 계약에는 아내의 건강을 악마에게 바치고, 이번 시청률 1위를 위해서는 아내의 목숨을 바친 듯. 방송국 소유주가 "그는 아직 가장 소중한 것을 희생하지 못했다."라고 한 것을 통해 알 수 있음.

초심리학자 준도 그로브의 회원이다. 그녀는 다른 사이비 집단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릴리를 심리 치료라는 명분으로 도맡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 어린 소녀에게 한 짓은 하급 악마를 소녀의 몸에 주입한 것. 그로브가 섬기는 악마는 아브락사스고 릴리의 몸에 든 악마(Mr. Wriggles)는 그보다 서열이 낮은 존재다. 토크쇼에서 준이 릴리에게 강령 의식을 시행할 때 "아브락사스에 준하는 대악마는 아니고 그런 존재를 섬기는 악마"라고 말한다. 아마 준은 릴리의 몸에 악마를 넣은 대가로 그로브로부터 사회적 보상을 받고 출판을 통해 경제적 이득도 얻었을 것이다. '꿈틀 씨'라고 불리는, 릴리 몸속의 악마는 토크쇼에서 잭을 알아보고 큰 나무들 사이에서 만난 적 있다고 말한다. 그로브의 의식이 숲에서 이루어지므로 회원인 잭과 준은 그 하급 악마를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잭은 악마의 존재를 모른다며 부정하지만 악마는 잭과 준의 은밀한 관계를 방송에서 까발린다. 방송 초반의 휴식 시간에 준이 잭을 불러 얘기를 나누는데 얼굴 거리가 가까운 것으로 미루어 그들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예전의 인기를 되찾고 시청률 1위를 꿈꾸는 잭은 앞서 말한 대로 아내의 목숨을 그로브의 악마에게 바친다. 영화 마지막에 그가 침대에 누워 있는 아내에게 칼을 박는 장면이 나온다. 그로브의 고위 간부들은 핼러윈 데이 방송에 잭을 1위로 만들어주기 위해 가면 등으로 분장한 회원들을 방청객로 심어 놓고 방송 자체를 하나의 의식처럼 조성한다. 그러니까 그날 방송이 악마를 위한 그로브의 의식 행위였던 것. 해골 복장의 방청객이 나중에 그로브의 회원이었다는 게 밝혀진다(심지어 해골 뒤에 수녀 복장의 방청객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도 그로브 회원임이 나타남.).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악마(꿈틀 씨)가 죽인 세 사람(거스, 준, 카마이클)은 아브락사스에 바치는 재물. 잭이 죽인 릴리도 그러하다.

토크쇼 1부의 게스트인 크리스투는 영매이자 사기꾼이다. 허술하고 교묘한 속임수로 방청객 주변의 영혼과 대화하는 연기를 선보인다. 근데 진짜로 영혼이 나타났고 그를 통해 '미니'라는 이름과 손가락에 반지를 낀 남자를 언급하게 한다. 크리스투가 진짜로 두통에 시달리는 모습은 그가 실제 영혼을 받아들였음을 나타낸다. 그 영혼의 정체는 잭의 아내 매들린. 그녀는 2부에서 릴리의 목소리를 통해 가끔 잭에게 말을 건다. 그러니까 토크쇼에 두 귀신이 등장하는 것이다. 꿈틀 씨와 매들린.

크리스투를 검증하기 위해 초대된 인물, 카마이클은 회의론자이자 초능력 사냥꾼이지만 세속적 성공을 열망하고 잭이 몸담고 있는 그로브에 가입하기를 희망한다. 어찌 보면 영화에서 가장 모순적인 인물.

2부의 게스트는 준 박사와 그녀가 돌보는 릴리.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이 진행되고 릴리를 통해 드러난 악마는 말썽을 부리다가 준에게 제압당한다. 그때 준이 악마에게 내보이는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부엉이 모양의 목걸이다. 준이 그로브의 회원임이 여기서 드러난다. 대악마 아브락사스를 섬기는 그로브의 상징물을 보임으로써 하급 악마에게 기강을 잡으려고 한 것.

결국 이 쇼는 그로브의 의식을 위한 연출이었으니까 악마가 실제로 등장하고 아수라장을 만든 뒤 끝이 난다. 머리 가르고 나오는 악마가 최면에 의한 환각이라는 설이 있는데 거스와 준과 카마이클의 죽음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들다. 악마를 통해 막장 결말을 낸 이유는 주제 의식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다. 악마가 드러나야 잭이 정말 사탄교를 신봉하는 나쁜 진행자였고 그의 방송이 거짓투성이었음이 밝혀진다. 악마 같은 건 없다며 모두 최면의 효과일 뿐이라고 주장했던 카마이클의 마지막 행동을 보라. 악마에게 무릎을 꿇고 복종을 맹세한다. 회의론자이자 초능력 사냥꾼이었던 그의 방송 모습도 사기에 가까운 것이었던 거다(방송 휴식 때 잭에게 그로브에 데려가 달라고 했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크리스투도 사기꾼, 준도 사실은 악마 숭배자. 방송의 이미지는 모두 믿을 것이 못 된다. 방송이란 것 자체가 하나의 최면이다. 토크쇼 제목인 'NIGHT OWLS'의 모양이 최면 회전판처럼 여러 줄로 디자인돼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릴리의 머리를 가르고 나온 악마는 혹시 매들린이나 아브락사스가 아닐까? 아니다. 꿈틀 씨가 맞다. 릴리가 인터뷰할 때 그 사람(악마)은 내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다가 빠져나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몇 번 더 봐서 제대로 된 평론을 쓰고 싶은 영화. 이거 보고 <파묘>를 떠올려 보니까 <파묘>는 정말 못 만든 게 맞다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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