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한 홍상수의 오도송
홍상수의 영화를 오랜만에 봤다. 가장 최근에 본 것이 <강변호텔>이었다. 한때 느슨하고 즉흥적인 내러티브로 찍었던 작품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데(북촌방향,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우리 선희 등) <강변호텔>은 수작은 아니지만 지난 영화들보다 발전한 느낌이 있어서 꽤 좋아했고, 홍상수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강변호텔>을 봤을 때 나는 '죽음'이란 테마를 느꼈다. 초기작의 하찮은 군상에 대한 조롱, 성욕과 위선으로 얼룩진 우리의 삶, 도덕적 가르침 없는 냉소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엄밀히 말하면 그것들이 세련되게 다듬어져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게 처리된 것이라 하는 게 맞다.) 중기작의 즉흥성과 느슨함이 여전하지만 실험하듯이 대놓고 막 찍은, 그러니까 영화를 진짜로 우연에 맡겨버리는 무책임함도 없고 초기작과 중기작의 장점들이 합쳐져 새로운 단계로 발전한 모습이 보이는데, 그것 때문에 감독이 '죽음'이라는 철학적인 주제도 영화에 담을 수 있던 것이라 생각한다. <극장전>에서 남자 주인공이 섹스 후 죽고 싶다 말하지만 그건 인간의 허세와 보잘것없음을 비웃는 측면이 강하다. <강변호텔>의 죽음은 그보다 철학적이고 종교적이다. 맞다. 종교적 느낌. 그래서 나는 홍상수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번에 본 <여행자의 필요>는 굉장히 불교적이다. 영화 곳곳에서 선종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언어를 걷어치우고 실체에 집중하는 태도, 돌에 새긴 문자를 숭배하지 않지 않고 냉소적으로 보는 시선, 외국어를 가르치는 데 교과서(경전)를 사용하지 않고 질문(선문답)을 통해 학생 내면(명상)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방식. 게다가 이리스와 해순과 원주가 작은 폭포가 떨어지는 사찰 같은 곳에서 쉬는 장면도 나온다. 그곳에서 이리스는 낮잠을 자고 원주는 폭포 소리를 들으며 명상하듯 앉아 있고 해순은 물속의 물고기를 바라본다. 이것은 정말 불교 자체라 할 수 있다. 해순이 바라본 물고기는 속세(업)에 갇혀 있는 중생에 대한 은유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분석해보자. 이리스는 정체불명의 여성이다. 불란서에서 왔다고 하지만 확실한 신상은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난데없이 한국에 나타나 공원에서 어린애 피리를 불고 있다 인국을 만났다. 피리라는 소재가 뜬금없지만 이건 불교적 영화이기 때문에 조금만 생각해보면 쉽게 납득할 수 있다. 바로 십우도의 기우귀가(騎牛歸家)를 나타낸 것이므로 피리가 등장한 것이다. 길든 소의 등을 타고 피리를 불며 귀가한 동자가 이리스인 것이다. 십우도의 주인공이 어린이이므로 영화는 이리스가 '어린애' 피리를 불고 있었다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리스는 어디서 깨달음을 얻고 지구(한국)로 여행 온 고차원 존재쯤 되는 것이다. 인국을 만났을 때가 기우귀가의 상태였으니까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영화 속 시점에서는, 세상으로 나가 중생을 제도하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녀가 여러 학생을 만나며 새로운 방식의 불어를 가르친 것이다.
성욕과 허위로 점철되었던, 초기작의 홍상수식 사랑은 이 영화에 아예 없다. 남자가 여자를 따라다니고 여자가 내숭을 부리다 결국 술과 함께 둘이 모텔 가는 이야기는 홍상수 개인의 성장과 그의 예술적 발전에 따라 탈수되어버렸다. 남녀의 세속적 사랑이 유치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이 든 홍상수의 깨달음이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경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그의 영화에 노골적인 정사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잠자리가 있었다면 그걸 암시할 뿐 직접 보여주는 건 없다. 홍상수는 더 심오한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이제 남녀 등장인물이 벗지 않는 것이다.
이리스의 첫 학생은 자신의 아빠가 자신을 매우 사랑했다고 말한다. 좀 심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녀는 아빠를 그리워한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아빠를 헤어진 남자 친구만큼 이성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해순과 원주는 분명 부부 사이로 보이는데, 아니면 적어도 사귀는 관계, 근데 해순은 자신이 원주에게 고용된 입장이라 말하며 상하 관계를 드러낸다. 원주는 술 마시고 싶어 하는 해순을 다그치고 이리스와 완전히 헤어졌을 때 둘만 남은 상황에서 마치 엄마처럼, 오늘 술 많이 마신 것 같다고 하면서 그를 달랜다. 인국의 엄마는 아들 집에서 이리스의 옷을 발견하고 노발대발하고 평균적인 한국 엄마의 집착과 잔소리를 보여준다.
이렇게 영화 속 사랑이 남자-여자와 부모-자식을 구분하지 않는 까닭은, 아마 홍상수가 속세의 사랑은 아무리 치장해도 본질적으로 대등할 수 없는 상하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영화에서 정답처럼 비춰지는 인국와 이리스의 관계는 다른 남녀와 다르게 꽤 수평적이다. 인국의 엄마가 어렸을 적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저런 나이 든 여자(이리스)와 사귀는 거냐고 인국에게 묻자 그는 아니라고 답한다. 이리스가 불어 과외로 돈을 벌어와도 인국은 받지 않는다. 남녀의 사랑은 부모-자식의 관계처럼 일방적으로 벌어다 주는 게 아닌 것이다. 마지막 대화가 압권이다. 막걸리에 취해 산에서 자고 있는 이리스를 인국이 발견해 깨우고 집에 가자 한다. 이리스는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인국은 그렇다 답하고 '친구로서'라는 말을 붙인다. 친구로서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이다. 자기와 동거하는 여자한테 친구로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여자 입장에서 들었을 때 심히 문제가 있다. '여자로서'가 아닌 '친구로서'란 말은 사실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격으로 보인다. 근데 이리스는 그 말을 듣고 좋아한다. 원하는 대답을 얻었다는 표정이다. 이는 그들의 관계가 이성적 끌림은 아니라는 게 아니라 홍상수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남녀 관계가 그만큼 수평적이고 대등하다는 뜻이다. 인국의 '친구' 발언은 '수평'과 '대등'을 함축하고 암시하는 장치였던 셈. 그리고 '여자로서(혹은 '남자로서')' 사랑하지 않고 '친구로서'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한 육체적 결합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감정의 충족에 머무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그걸 뛰어넘어 상대를 나와 같이 이 고된 삶을 살아가는 도반으로서 응원하고 존중한다는 뜻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친구로서' 사랑하는 게 더 성숙하고 위대한 마음이자 관계인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여자'로 보고 몸을 탐하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그녀의 존재와 삶을 응원할 것이다. 역시 여자가 남자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남자'로 보고 돈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그의 존재와 삶을 응원할 것이다.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며 '책상다움'과 '술잔다움'이란 말을 사용하자 디오게네스가 자신의 눈엔 책상과 술잔은 보이지만 '책상다움'과 '술잔다움'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일화를 꺼낸 까닭은 언젠가 인터뷰 자리에서 홍상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당신의 영화에서 보이는 남자들의 짐승 같은 욕망과 그런 저속함을 표현함에도 그들로부터 인간사에 대한 유의미한 무엇을 탐구하는 정신적 태도가 어떻게 결합하느냐는 물음에 자신은 항상 자유롭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 행한 방법이 사물을 있는 대로 바라보는 것이었다고 답했다. 어떤 관념이나 선입견에 지배당하지 않고 외부 세계를 진실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면 결국 답을 찾을 수 있고 그로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 없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그런 유의 이야기에 가깝다. '할'을 외치고 다녔던 임제나 계율을 어겨도 떳떳했던 경허가 떠오른다. 인구는 이리스를 속세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라고 엄마에게 소개하는데 그 이리스는 홍상수의 페르소나나 다름없다. 영화를 통해 도를 닦고 있는 게 지금의 홍상수인 것이다.
세계를 있는 대로 인식하려는 이리스는 맨발로 땅을 걷고, 아무도 밟지 않는 시내에 발을 담그고, 돌 위에 멍하니 앉아 있고, 막걸리를 마시며 인생을 음미한다. 일체의 지식이나 선입견 없이 자신의 감관으로 자연을 인식하는 그녀의 태도는 아웃포커스로 희미하게 처리된 산의 장면으로 대변된다. 기하학 형태만 남은 그 모습은 대상의 변하지 않는 본질을 그리려고 했던 세잔의 생빅투아르산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녀가 돌 위에 앉아 관망하던 자세는 아테네 학당의 디오게네스와 매우 흡사하다. 끝이 아니다. 원주 집 마당에 있던, 카메라에 대고 마치 인간을 깔보는 듯한 시선을 준 그 집 개도 디오게네스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지구로 깨달음을 전파하려고 온 여행자 이리스에게 이름과 신분과 직업, 즉 현대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것들은 언어로 된 포장일 뿐이지 본질이 아니다. 원주가 건물 옥상에서 이리스를 보고 그녀의 이름을 잘못 불렀을 때 이리스는 자신이 어떻게 불려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이리스든 아이리스든 그녀의 존재는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집 안으로 초대 받은 그녀는 해순과 원주와 함께 막걸리를 마신다. 생막걸리에는 미생물(효모균과 유산균)이 살아 있는데 그걸 외국으로 수출하려면 살균 처리를 해야 해서 막걸리의 참맛은 한국에서밖에 느낄 수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건 형식적인 외국어 교육에 대한 비판과 번역된 언어에 대한 씁쓸한 조롱이다. 외국어를 습득할 때 살균된 단어와 문장에 집착하지 말고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그 마음(미생물)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리스의 교육 방식이 그러하다. 그녀는 기타를 연주한 원주에게 무엇을 느꼈는지 집요하게 묻는다. 원주의 딸은 엄마인 원주로부터 이리스가 정말 불어를 잘하는지 보게 네가 학교에서 배운 불어를 말해 보라고 요구받는데 그녀는 하지 못하는 건지, 일부러 안 하는 건지 아무튼 불어를 내뱉지 않는다. 만약 하지 못한 거라면 이건 살균 막걸리처럼 본질(미생물)을 잃어버린 한국 교육에 대한 비판이 맞다. 이리스는 원주에게 딸이 현재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 원주는 백수인 딸이 부끄럽다는 듯이 아무것도 안 한다고 답한다. 그러나 신분과 직업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시선과 다르게, 옥상에서 보여주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카메라가 몰래 비추는 그녀의 무용(발레?) 실력은 꽤나 아름답다. 그녀는 잠시 백수여도 춤이라는 자신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살균 막걸리에는 미생물이 없다고 했다. 번역된 언어에 원작자의 진심이 없는 것과 같다. 다른 나라에 수출하려고 살균하는 것이므로 그런 막걸리는 다른 나라에 읽히려고 번역된 언어와 같다. 언어의 빈약함과 한계성을 지적한 이 설정은 이리스가 휴관한 도서관 앞에서 한 여성을 만나 시를 번역해 들려줄 때 다시 드러난다. 여성은 불어로 시를 듣고 싶다 하면서, 단순히 불어가 아름답게 들린다는 이유로, 핸드폰 번역기를 사용해줄 것을 제안한다. 이리스는 그 청을 들어주고 핸드폰 화면을 보며 불어로 치환된 단어를 읊는데,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의 느낌이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차 지나다니는 소리가 끼어들어 그녀의 낭송을 방해한다. 시어는 번역되는 순간 의미(본질)를 상실한다는 홍상수의 메시지다. 돌에 새겨진 언어(첫 학생의 아빠 이름, 해순이 절한 윤동주의 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그걸 별 의미 있게 보지 않는다. 해순은 비석 앞에 갑자기 절을 하는, 좀 낯 뜨거운 행동을 하는데 원주는 그의 감동 받은 내면 상태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냉소적으로 풀이한다. 홍상수 영화를 좀 본 관객이라면 그 장면에서 <해변의 여인>의 김승우(김중래)가 자연 풍경 앞에서 절하는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영화에서 중래는 제 딴에 겸허하고 숭고한 행동을 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그는 한 번 자고 싫증이 난 여자한테 여느 남자와 다를 바 없는 비열한 모습을 드러낸다. 진실에 기반하지 않은 허위의 감정을 홍상수는 조롱하는 것이다.
막걸리 얘기를 다시 해보자. 영화에 초록색이 자주 등장한다. 이리스가 첫 번째 학생의 집에서 자기 펜에 붙인 초록색 테이프, 그녀가 입은 초록색 카디건, 카메라가 종종 비추는 초록색 산, 그리고 원주의 집에서 마신 초록색 띠의 막걸리(장수 막걸리). 왜 그 색이고 그것은 무엇을 뜻할까?
초록색 띠의 막걸리가 생막걸리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생막걸리는 살균 막걸리와 다르게 미생물(본질)을 포함하고 있다. 즉 초록색은 세상과 대상에 숨어 있는, 세잔(홍상수)이 그토록 그리고 싶어 했던 본질, 진실, 참됨을 뜻한다. 그래서 득도한 이리스가 초록색 옷을 입었던 것이다.
여름이 다가오는 5월에 보기 좋은 영화다. 작품 속 세상과 우리의 실제 세상이 매우 닮았다. 적당히 더운 온도, 녹음을 준비하는 수풀, 그 속에서 느껴지는 나른함. 영화관을 나와 집으로 걸으며 이 영화가 무엇일지 계속 생각했다. 깨달은 홍상수에게 화두를 받은 것처럼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영화를 곱씹었다. 글을 쓰고 나니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대충 알 것 같다. 현재 이 영화는 전국에서 5천 명 넘게 보았는데 그 숫자를 보니 그가 세간에 잊힐 것 같아서 씁쓸함이 든다. 작가주의 영화가 잘 안 팔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 그러나 깨달아버린 홍상수가 나는 좋기 때문에 다음 오도송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