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의 동양 공포 체험
원작 <주온>을 서양 인물 중심으로 번안한, 할리우드를 겨냥해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작 내용을 알고 봐서 그런지 별로 무섭지 않다. 이목구비 또렷한 서구인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데, 그들의 외모와 습성이 동양 특유의 귀신 공포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질감이 든다고 할까. 마치 동양인이 드라큘라를 찍는 느낌.
혹자는 밤에 불 끄고 혼자 보면 무섭다고 말하는데, 그가 말한대로 밤에 불 끄고 혼자 본 내 입장에서 솔직하게 말하면 이 영화는 밤에 불 끄고 혼자 봐도, 어떠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도 무섭지 않다. 왜냐하면 공포의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괴담도 나오고 귀신도 나오지만 그것을 연출하는 감독의 성찰이 어설프고 표현이 서투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감독은 공포가 무엇인지 모른다. 이는 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여름마다 양산되어 극장에 걸리는, 관객 놀래는 데 혈안이 된 공포 영화, 그리고 그걸 찍어대는 삼류 감독들에게도 마땅히 해당된다. 21세기에 공포 영화는 없다. 점프 스케어 남발하는 풍토가 호러 장르를 죽여 놨다.
1. 공포의 본질
공포는 무지(無知)에서 비롯한다. 미지의, 알지 못하는, 경험한 적 없는 것을 대면할 때 생물은 무서움을 느낀다. 알게 되는 순간, 정체가 드러나서 익숙해지면 그에 대한 무서움은 사라진다. 사람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모르는 사람이 쳐다보면 무섭다. 다음 상황이 예측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쳐다보면 무섭지 않다. 그에 대한 정보가 머릿속에 있으므로 그가 왜 쳐다보는지 다음에 무슨 행동을 할지 예측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의 본질은 모름이다. 모르는 곳에서 공포는 출발한다. 그런데 현재 감독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죄다 관객 놀래는 데 혈안이 되어 동해 번쩍 서해 번쩍 귀신 깜짝 출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그들은 공포답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 놓고 관객 비명이 들릴 때마다 속으로 킥킥댄다. 비명이 많을수록 잘된 영화라고 착각한다. 이들은 감독이 아니라, 예술가가 아니라 관객 놀래는 데 희열을 느끼는 변태 사디스트다. 이들이 만든 영화는 공포라고 해주면 안 된다. 아예 '깜놀(깜짝 놀래는)'이라는 장르를 따로 만들어 특별 처리해야 한다. 공포의 본질은 무지와 불명(不明)인데 이들은 대놓고 귀신을 노출하니 공포 영화라고 불러주는 것은 부당하다. 스스로 공포 영화 감독이라고 자부하는 것도 꼴불견이다.
이 영화는 어떠한가. 어김없이 귀신을 빵빵 터뜨려주신다. 수법도 뻔해서 나중에는 고리타분해진다. 귀신이 나올 때쯤이면 음흉한 음악이 깔리고 배우의 눈이 커진다. 그렇게 한 몇 초 끌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귀신이 뿅 나타난다. 이런 장난을 몇 번 반복한 뒤 결말에 가서는 괴상한 모습으로 작정하고 나타난다. 그런데 그 피칠갑의 특수분장과 꺾기의 몸놀림이 전혀 무섭지 않다. 대놓고 보여주는 데 무서울 리가 없다. 확실하게 밟아 죽이지 못하는 주인공의 소심함에 시청자는 아쉬움을 느낀다.
전술했듯이 공포의 본질은 무지와 불명이다. 몰라야 무섭다. 사람 놀래고 사람 놀라는 것은 공포가 아니다. 놀람은 돌연한 상황에 반응하는 본능적 반응일 뿐이다. 그것을 공포라고 착각하면 오산이다. 이 영화에서 귀신은 언제 모습을 드러내는가. 대충 전반적인 형태는 시작한 지 20분 즈음에 드러난다(카야코 귀신이 엠마를 죽일 때 카렌과 대면한다.). 그 얘기는 이 영화가 20분짜리 공포 영화라는 뜻이다. 20분만 공포고 나머지는 '깜놀'의 연속일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초장에 귀신을 보여줬으니 관객은 더 이상 그것에 무서움과 경계심을 느끼지 않는다. 단지, 동해 번쩍 서해 번쩍 출몰하는 수작에 놀랄 뿐.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결말까지 관객의 숨통과 호기심을 쥐고 있어야 그게 공포인데, 감독은 성급한 결단을 내리고 만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를 <인시디어스>에서 보았는데, 거기서 지옥에 대해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직접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과 그림으로 간접 제시하는데, 거기까지는 관객이 지옥에 무지하고 나름대로 상상만 하므로 공포감이 유지된다. 그런데 후반에 지옥의 모습이 직접 제시되는 순간 영화가 코미디로 돌변한다. 지옥을 지키는 빨간 얼굴의 문지기 악마가 있는데, 관객이 영화 속에 들어가서 팰 수 있을 정도로 안 무섭다. 왜냐? 감독이 공포의 대상을 직접 보여줬기 때문이다. 공포는 언제나 상상에 머무를 때만 유효하다. 현실에 인식되는 순간 그 유효함은 익숙함의 권태와 가소로움의 코미디로 전환된다. 그래서 감독은 공포의 대상을 감출 수 있을 때까지 감추는 편이 좋다.
공포를 가장 잘 구현한 영화는 <블레어 윗치>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끝까지 귀신(마녀)을 보여주지 않는다.
2. 표현
그 집에 들어가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모두 죽는다. 영화의 설정이 그렇다. 저주 때문에 모두 죽는다. 그래서 영화에는 그러한 설정을 영상으로 표현한 부분이 많다. 집에 원한의 저주가 있고 그것에 걸리면 죽음을 맞이하니 집은 일종의 감옥과 같다. 한번 걸리면 벗어나지 못하는 곳. 영화는 저주 걸린 그 집을 감옥으로 묘사한다.
집 안 곳곳에 감옥의 창살을 연상시키는 격자무늬가 많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 안에 사람을 가두고 비춘다. 그들은 집에 있지만 사실 감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저주에 걸린 처지이므로 언젠가 죄수처럼 형벌(카야코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받게 될 것이다.
명색이 공포 영화답게 기본 연출에 신경 쓴 부분이 보인다. 앞서 말한 감옥 장면도 공포 영화는 물론이고 여타 영화에서도 심리적 압박이나 암울한 운명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이는 기법이다. 흔히 긴장감과 음침함을 표현할 때는 전경에 사물을 걸치고 찍는 방법이 사용된다. 주된 인물과 사물을 속 시원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처럼 앞에 무엇을 두고 찍는 방법이다. 그럼 관객은 거치적거리는 장애물 때문에 불쾌한 기운을 느끼고 시선을 방해받음으로써 긴장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그 기법이 많이 쓰였다.
장애물 없이 주된 상황을 온전히 보여주는 경우가 드물다. 항상 전경에 무엇을 걸침으로써 공포영화의 긴장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귀신이 언제 닥칠지 모른다는 설정 덕분에, 저렇게 전경에 장애물을 두고 찍은 장면은 마치 귀신의 시선인 것 같은, 귀신이 숨어서 엿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해서 긴장감을 배가한다.
3. 줄거리
상업용 공포영화이므로 철학적 논제나 작가의 사상은 찾아볼 수 없다. 관객은 그저 귀신을 보고 놀라면 된다. 극장을 나오면 생각도 끝나는 그런 영화다. 내용상 분석하거나 고민할 건더기가 없지만 아리송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귀신에게 죽임 당한 순서다. 이야기 전개가 순차적이지 않기 때문에 얼핏 보면 누가 언제 죽었는지 헛갈린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 같지만 이것을 풀다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기에 한번 풀어보겠다.
우선 희생자 명단을 파악해 보자. 피터, 더그, 엠마, 매튜, 제니퍼, 수잔, 요코, 알렉스, 나카가와. 피터는 3년 전에 그 집을 처음 방문하고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기에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이 맞다. 영화 처음에 피터가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3년 전 첫 죽음이다. 그 후로 매튜의 가족이 저주 걸린 집으로 이사 오고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매튜는 제니퍼가 침대에서 죽는 모습을 본 뒤 자신도 바로 죽으므로 제니퍼 다음이다. 그리고 엠마는 카렌이 자원봉사 하러 왔을 때 죽으므로 매튜 다음이고(카렌은 요코가 죽은 뒤에 왔고, 매튜와 제니퍼는 죽어서 다락에 처박힌 상태), 수잔은 카렌이 엠마와 함께 있을 때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퇴근 후 본인 집에서 죽으므로 엠마 다음이다. 여기까지 죽은 순서를 순차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피터, 제니퍼, 매튜, 엠마, 수잔. 그 후로, 알렉스는 피칠갑이 되어 긴 혀를 과시하는 요코를 본 뒤 죽고(더그가 음성 메시지로 카렌에게 알렉스의 죽음을 알린다.) 나카가와는 집을 불태울 생각으로 휘발유 통을 들고 갔다가 귀신한테 속아 욕조에서 질식사한다. 더그는 그 뒤에 당도하여 카렌 옆에서 죽으므로 가장 마지막이 된다. 그러니까 앞서 정리한 (피터, 제니퍼, 매튜, 엠마, 수잔) 순서 뒤를 이어보면 알렉스, 나카가와, 더그 차례가 된다. 종합해 보면 피터, 제니퍼, 매튜, 엠마, 수잔, 알렉스, 나카가와, 더그 순서대로 죽는다. 그렇다면 요코는 언제 죽는가. 그녀는 언제 죽었을까. 요코가 죽는 장면은 오프닝 크레딧 다음에 나오므로, 즉 초반에 등장하므로 언제 죽었는지 가늠하기가 힘들다. 더구나 그 후로 진행되는 사건도 현재와 과거가 섞여 있으므로 요코의 사망 시기를 알기는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확실한 점은 그녀가 피터 다음으로, 그리고 엠마보다 먼저 죽었다는 사실이다. 피터는 3년 전에 처음으로 죽은 사람이므로 요코가 그보다 앞설 수 없다. 엠마는 카렌과 함께 있을 때 죽고, 또 카렌은 요코 대신 자원봉사 하러 온 것이므로, 그리고 카렌이 수잔의 메시지를 받을 때 수화기가 보이지 않으므로(그 수화기는 요코가 들고 있다가 죽을 때 떨어뜨린다.) 요코가 카렌 옆에서 죽은 엠마보다 나중에 죽은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요코의 죽음 순서는 피터와 엠마 사이에 끼어야 한다.
이제 문제는, 그렇다면 요코가 제니퍼 - 매튜보다 이전에 죽었는지 이후에 죽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요코가 제니퍼와 매튜 사이에 죽었을 리는 없다. 매튜가 퇴근 후 귀가했을 때 집 안 상태는 제니퍼가 죽기 직전의 상태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면발과 국물이 쏟아진 컵라면이 그 증거다. 요코는 죽기 전에 엠마를 돌보면서 집을 깨끗이 치우는데, 만약 요코가 제니퍼와 매튜 사이에 죽었다면 요코가 치운 집을 누가 매튜 귀가 전에 제니퍼가 죽었을 때와 동일하게 어질러 놓았다는 뜻인데, 그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고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엠마와 토시오밖에 없는데 영화 전개상 그것은 부자연스럽다. 그러므로 가능성은 두 가지뿐이다. 제니퍼 - 매튜보다 먼저 죽었거나 그들 다음으로 죽었거나.
먼저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요코가 집에 당도했을 때 "Out for a walk, back later."라고 쓴 제니퍼의 쪽지를 발견하는데, 이 쪽지는 서명에 의하면 제니퍼가 쓴 것이므로, 그리고 그녀는 잠깐 외출한 것이므로 요코가 그녀보다 먼저 죽었음을 입증하는 단서가 된다. 그러니까 쪽지가 사실이라면 요코는 제니퍼가 잠깐 나간 사이에 죽은 것이 된다. 아마 제니퍼가 컵라면을 사러 갔을 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요코가 제니퍼 생전에 죽은 것이라면 수화기가 실종된 상태여야 하고(수화기는 경찰이 수색할 때 나카가와가 다락에서 발견한다.) 요코가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집 앞에 놓여 있었어야 한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제니퍼가 이 점을 수상하게 여겼여야 한다는 뜻이다. 요코가 그녀보다 먼저 죽은 것이라면 제니퍼가 요코가 죽은 뒤 집에 당도했을 때 수화기가 사라진 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찾아다니거나 집 앞에 왜 요코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지 궁금해하는 장면이 한 번쯤 나왔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제니퍼는 컵라면 사오고 소파에서 잘 잔다. 그러므로 가능성은 요코가 제니퍼와 매튜 다음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데 쏠린다.
여기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엠마의 테이프와 반창고다. 카렌이 엠마를 찾아갔을 때 엠마는 왼손 엄지에 반창고를 하고 있다. 카렌이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자 엠마는 싫다는 듯이 손을 거둔다. 만약 요코가 제니퍼보다 먼저 죽은 것이라면 엠마의 그 반창고는 제니퍼 혹은 매튜가 붙인 것이 틀림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요코가 엠마의 상처 난 손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반창고를 안 붙인 상태였고,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엠마는 혼자서 반창고를 붙일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추론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치매 걸린 노인이 반창고 정도는 간단히 붙일 사람이었다면 요코가 그녀의 손을 발견하기 전에, 즉 피 흘리고 나서 스스로 붙여 놓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노인이 혼자 붙였을 리도 없고, 요코가 발견했을 때도 반창고가 없었으니 카렌이 발견했을 때 붙여 있던 그 반창고는 매튜 혹은 제니퍼가 붙여준 것이 틀림없다는 소리가 된다(만약 요코가 그들보다 먼저 죽었다면). 그런데 그들은 엠마에게 반창고를 붙여준 적이 없다. 제니퍼가 죽기 전에, 그러니까 2층에 올라가기 전에 엠마도 토시오의 발소리를 듣고 잠을 깨는데 그때 엠마의 손가락에 반창고가 없고, 또 매튜는 귀가하자마자 바로 제니퍼를 찾아 올라간다. 그러니까 카렌이 발견한 그 반창고를 매튜 혹은 제니퍼가 붙여줬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말이 되려면 매튜와 제니퍼가 죽은 다음에 누가 와서 붙여줬다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사람은 요코밖에 없다. 그에 대한 단서로 요코가 엠마의 피 흘린 엄지를 발견하는 클로즈업 장면을 들 수 있다. 클로즈업은 중요성을 부각할 때 사용되는 화면이다. 요코의 시선으로 엠마의 피 흘린 엄지를 확대했다는 것은 굳이 나중 장면을 보여주지 않아도 요코가 엠마의 엄지에 반창고를 붙여줬을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까지 전개된 논리를 정리하면 요코는 절대로 제니퍼 - 매튜보다 전에 죽은 것이 아니게 된다. 요코는 그들 다음으로 죽은 것이 맞다. 매튜와 제니퍼가 죽었으므로 엠마는 귀신이 무서워 그것이 다락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테이프를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요코가 발견한 것이고, 요코마저 죽자 엠마는 다락을 봉쇄해버리려고 문에 테이프를 붙인 것이다. 그것을 발견한 사람은 카렌이 된다. 그래서 카렌이 다락을 열 때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요코가 제니퍼 - 매튜 다음으로 죽은 것이 되면 이야기 전개상 아무 문제가 없다. 제니퍼 서명으로 쓰인 그 쪽지는 귀신의 장난으로 밝혀지게 되는 셈이다. 수잔이 죽을 때 귀신이 매튜 흉내를 내는데 제니퍼 글씨라고 흉내 내지 못할 바 없다. 정말 이렇게 되면(요코의 죽음이 제니퍼 - 매튜 다음이 되면) 얘기가 깔끔하게 정리되는데, 아귀가 안 맞는 장면이 두 개 있다.
카렌이 거실 미닫이문을 열고 카렌을 처음 발견할 때 컵라면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 그리고 카렌이 엠마를 씻고 눕힐 때 거실 탁자 옆에 가방이 놓여 있다. 컵라면은 제니퍼가 죽을 당시에 쏟아진 것이고, 가방은 매튜가 죽을 당시에 놓아둔 것이다. 만약 요코가 제니퍼 - 매튜 다음으로 죽는 것이 맞다면 저 장면에서 컵라면과 가방은 저기에 없어야 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요코는 엠마를 방문했을 때 집을 깨끗이 청소하기 때문이다. 청소했는데 컵라면이 그대로 쏟아지고 가방이 그대로 놓여 있다고? 토시오의 장난이라고도 볼 수 없는 이유가, 쓰레기로 어지러운 방 모습(上)이 제니퍼 죽을 당시의 모습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코가 제니퍼 - 매튜보다 먼저 죽었다고 결론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이야기 전개상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나는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요코가 제니퍼 - 매튜 다음으로 죽은 것이 내용상 확실한데 저 장면은 감독의 실수라는 것이다. 내가 왜 감독의 실수라고 확신했느냐 하면 저 장면 외에도 비슷하게 실수한 부분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카렌이 경찰 조사를 받고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서 샤워할 때 카메라가 집 안을 훑는 장면이 있다. 또, 카렌이 더그의 메시지를 확인하기 전에 자기가 출력한 문서를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이게 왜 문제시되느냐 하면, 이 두 장면도 아까 앞에서 제시한 두 장면처럼 감독의 실수가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카렌이 출력한 문서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파란 바탕의 표제 출력물은 카렌이 그 집에 관한 사건을 인터넷에서 검색한 뒤 뽑아 놓은 것인데, 그러니까 카렌이 인터넷으로 검색하는 장면 뒤에 책상에 놓여 있어야 할 소품인데, 그것이 카렌이 인터넷으로 검색하기도 전인 시점(샤워할 때는 인터넷 검색하기 전이다.)에 버젓이 놓여 있다. 나중에 나와야 할 소품이 왜 그 전에 있느냐 하는 말이다. 이것은 감독의, 스태프의, 스크립터의 실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대충 찍었으니까 이런 실수가 발생하는 것이다. 감독이 디테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앞서 제시한 컵라면과 가방도 실수이자 오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두 부분 다 소품 가지고 실수했으니 이에 대한 반박은 허용되기 힘들다.
정리하면, 죽은 차례는 피터, 요코, 제니퍼, 매튜, 엠마, 수잔, 알렉스, 나카가와, 더그순이고 여기에 감독의 실수가 존재해 순서의 논리적 구성이 매끄럽게 되지 못했다.
사실 이것 말고도 이상한 장면이 몇 개 더 있다. 그것도 실수라고 확신하기에 괜히 말하지 않겠다.
4. 기타
카렌과 더그가 위령소에서 참배하는 일본인을 바라보며 얘기할 때 더그가 담배를 피우는데, 왜 신성한 곳에서 불경하게 담배를 피운 것일까? 나는 처음에 그 장면 보고 동양의 비과학적 미신 문화를 서양이 비웃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후반부에 그 집에서 귀신과 싸울 때 카렌이 집을 태우려고 더그의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는데 그걸 보고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결말 부분에 사건 해결용으로 라이터를 쓰기 위해 초반에 복선을 깔아 놓은 것이다. 그 중요한 도구가 막판에 갑자기 나타난다면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연극에도 그러한 법칙이 있다. 주인공이 막판에 권총으로 악당을 쏘아 죽인다면 1막에 권총이 반드시 등장해야 한다. 모든 창작물에 난데없이 출몰하는 것은 없다.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게 창작이기 때문이다.
더그가 담배를 피울 때 카렌은 참배하는 일본인을 바라보며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나 봐."라고 말한다. 이것도 난데없이 나온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카렌과 더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단서다. 결말에 더그가 죽음으로써 카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
단서를 주는 대사는 또 등장한다. 카렌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나카가와 형사가 와서 몇 가지 물어보는데, 그때 이런 말을 한다. "노부인 아들과 며느리 시체가 다락에서 발견됐어요.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자살한 것 같아요." 이것은 매튜와 제니퍼 살해 사건에 관한 나카가와의 추측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 집에 얽힌 사건에 대한 실마리를 주는 단서다. 카야코의 남편이 아내 카야코를 죽이고 자살했다는 사실에 대한 감독의 의도적인 암시인 셈이다.
카렌이 자원봉사 하러 그 집에 처음 갈 때 지하철을 타고 길에서 행인에게 지리를 물어보는데, 지하철 안에서 아이가 울고 길을 알려주는 행인의 어린 딸이 카렌의 눈빛을 피해 엄마 뒤로 숨는다. 이는 카렌의 미래가 불길할 것이라는 징조다.
수잔이 직장 건물에서 귀신에게 쫓긴 뒤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 장면에서, 택시 유리창에 보면 'Welcome to Tokyo'라고 쓰인 스티커가 보인다. 이는 고도의 반어법이다. 수잔은 일본에서 환영받는 게 아니라 귀신에게 위협받고 있다.
카렌이 사건 수사 때문에 나카가와를 찾아갈 때 그는 옥상에 있다. 왜 사무실이 아니라 옥상에 있었을까.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고? 내용상 따지면 별 이유 없이 바람 쐬려고 올라간 게 맞지만 이것도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의도가 담긴 설정이다. 피터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는가. 그는 영화 처음에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서 있다가 떨어져 자살한다. 감독은 이것을 노린 것이다. 나카가와도 귀신에 시달리는 입장인데(CCTV로 확인된 귀신의 정체, 휘발유 통을 가지고 집을 태우려고 한 점.) 피터처럼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법 없다. 물론 내용상 그는 자살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럼 이야기가 이상해진다. 분명 바람 쐬러 옥상에 올라간 것이 맞는데, 피터의 죽음을 연상시키고 나카가와도 귀신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을 암시하기 위해 그를 옥상에 있도록 설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