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진 볼 수 있다
1. 감상
주온에 대해 얘기할 때 가장 궁금하고 중요한 점은, 그래서 무서우냐 무섭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주온은 공포 영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아니, 척도였다. 주온이 처음 개봉됐을 때는 입소문을 타고 너도나도 자신의 담력을 시험해 보려고 관례처럼 봤다. 밤에 집에서 혼자 불 끄고 주온을 봤다면 강심장으로 인정받는 시절이 있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주온을 본 것이 하나의 무용담으로 여겨지곤 했다. 그때부터 어떤 공포 영화를 논할 때 주온만큼 무서우냐 무섭지 않으냐 하는 것이 일종의 관습으로 굳어졌다. 주온만큼 무서우면 그 영화는 대단히 무서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별로 무섭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누구도 주온을 들먹이지 않는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주온도 이제는 시리즈를 거치면서 퇴색하고 변질되어 더 이상 공포 영화로서 관객을 모으고 놀래는 역할을 상실한 상태다. 2017년 즈음에 주온은 카야코와 사다코가 대결하는 기괴한 혼종 때문에 공포가 아닌 코미디로 전락했다. 그래서 요즘은 공포 영화를 논할 때 주온이 아닌 다른 영화가 (예전에는 컨저링?) 거론된다.
어쨌든, 무서우냐 무섭지 않으냐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섭지 않다는 것이다. 비디오판 2편에서 카야코 귀신의 잦은 노출로 인한 허점이 발견되었고 그에 대한 내성이 생긴 탓에 그때 이후로, 비디오판 1편을 제외한 나머지 연작 이후로 주온은 더 이상 무섭지 않다. 깜짝 놀래는 기술도 전작과 비슷하여 영화가 순탄하게 넘어간다. 비디오판 1편의 음산하고 불쾌한 분위기는 이 극장판 2편에서는 느낄 수 없다. 오히려 공포 영화답지 않게 슬프다. 전반적으로 슬픈 드라마 같은 느낌이 있다. 카야코 귀신과 저주 걸린 집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저주의 원혼 때문에 사별하고 해체되는 인물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전작들과 차별화된 감독의 시도로서 이 영화가 무섭지 않아도 그리 간단하게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이 극장판 2편은 이전(비디오판 두 편과 극장판 1편)의 형식에서 탈피하여 귀신보다 그에게 희생당하는 인간에 더 관심을 둔다. 전작에서 주요 공간은 저주 걸린 카야코의 집이었다. 이야기가 집에서 시작되어 집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그 집은 별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전개상 어쩔 수 없이 저주에 걸려야 하므로 희생자들이 잠깐 들를 뿐, 전작처럼 그 집에 이사 와 사는 사람도 없고 카야코가 계단을 기어 내려와 대미를 장식하는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집은 그저 경로일 뿐이다. 주요 공간은 사람의 일상적 환경이고, 이야기는 귀신의 집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직장과 거주지에서 진행된다. 계속 집을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면 기존의 주온과 다를 바 없으므로, 그래서 이 영화를 단순한 후속작으로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비디오판 2편도 귀신의 집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벗어나 인간의 일상에서 전개되지만 인간관계보다 귀신의 활약에 초점을 두므로 극장판 2편만큼 진화한 형식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집에서 벗어나 인간 세상으로 확장되는, 귀신의 원한보다 그로 인해 파괴되는 인간관계에 집중한 이 형식은 주온의 세계관과 주제 의식을 철학적으로 보강한다. 그것은 쿄코의 딸로 태어난 카야코가 쿄코를 육교에서 떨어뜨린 뒤 아무렇지 않게 도시를 걷는 장면으로 상징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겠다.
기존의 주온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깊고 새롭게 발전시켰으므로 무섭지 않더라도 괜찮게 봐 줄 수 있는 영화다, 라는 게 필자의 총평이다. 물론 비디오판 1편이 훨씬 무섭고 극장판 1편이 주온답게 잘 만들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카야코가 머리카락으로 사람 목을 휘감아 교살하는 장면, 즉 카야코가 사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이는지 처음 보여줬기 때문에, 그만큼 감독이 색다른 주온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므로 서포모어 징크스에 걸린 흔한 후속작으로 평가하고 싶지 않다. 극장판 2까지는 괜찮다.
2. 줄거리
이번에도 줄거리를 한 번에 파악하기 힘들게 뒤섞어 놨다. 영화는 쿄코, 토모카, 메구미, 마사시, 치하루, 카야코순으로 전개되지만 실제 시간순은 토모카, 메구미, 쿄코, 치하루, 마사시, 카야코다. 그리고 쿄코와 치하루 편은 같은 시간대에 일어나는 사건이므로 전후를 가름하기보다 한 덩어리로 파악하는 편이 좋다.
방송국 직원들이 촬영을 위해 귀신의 집에 찾아가기 전, 토모카가 자신의 집에서 대본 연습을 하다가 불길한 징조를 경험한다. 쿵쿵. 벽에서 정체 모를 소리가 나는 것. 아직 카야코 집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았는데 귀신이 예지를 발휘해 미리 죽음을 예고한 것이다. 카야코는 전지전능하므로 영화 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누가 자신의 집을 찾아올지 아는 것쯤이야 귀신의 힘으로 못 할 바 아니다.
카야코 집에서 촬영을 준비할 때 메구미가 쿄코를 분장해 주면서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모두 보았다고 말하는데, 한 여자가 장(캐비닛)에 들어 있던 영화에 대해 거론한다("The one where there's an old lady in the neighbor's cabinet."). 그 영화는 단순히 작품 내에서 쿄코가 출연했던 영화만 뜻하는 게 아니라 주온 영화 자체도 암시하는 것이다. 한 여자가 캐비닛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 그 단서다. 카야코는 남편에게 살해당한 뒤 수납장 문으로 연결된 다락에 유폐된다. 극장판 1편의 주인공 리카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장에 들어 있다는 설정은 카야코의 죽음과 연관돼 주온 영화 자체를 넌지시 의미하고, 뜬금없이 무관한 영화를 얘기하는 것보다 이렇게 연관된 얘기를 함으로써 작품의 내적 구조를 탄탄하게 만든다. 감독이 영화를 대충 만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영화든 문학이든 대사를 보면 그 작품의 수준이 드러나는데, 이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B급 영화의 등장인물은 충동적이고 감정적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대사에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분장을 마치고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카야코의 방에 있던 세 사람(쿄코, 메구미, 케이스케)이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에서 천장에 달린 등이 미세하게 흔들리는데, 그것은 귀신이 집에 존재함을 나타낸다. 높은 곳에 위치한 등을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귀신밖에 없다.
메구미가 보고 불쾌감을 느낀, 카야코 방 바닥에 있던 까만 자국은 카야코가 죽어갈 때 남긴 핏자국으로서 귀신의 저주를 상징하는 소재라고 할 수 있다. 잔을 쏟아 토모카의 대본에 묻은 음료 자국, 그때 귀신의 장난 때문에 대본이 잠깐 카야코 일기장으로 둔갑되는데 거기에 묻은 핏자국, 그리고 촬영 휴식 시간에 쿄코가 실수로 컵을 떨어뜨려 바닥에 흘린 음료 자국, 마사시와 함께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에 고양이를 쳐서 그 사체가 흘린 핏자국.
이 자국들은 카야코가 죽어갈 때 남긴 까만 자국의 변주로서 희생자들의 일상에 나타나 그들이 귀신의 저주에 걸려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귀신과 연관된 소재가 극장판 1편에서는 손으로 눈을 가리는 행위였다. 일종의 영매적 행위인데 1편의 등장인물은 눈 가리는 행위를 통해 귀신과 접하고 놀라서 죽었다. 2편에서는 그게 자국으로 바뀐 것이다.
촬영을 마친 뒤 차를 타고 귀가하던 중 쿄코와 마사시는 고양이 한 마리를 친다. 그것은 일반 고양이가 아니라 토시오가 생전에 키웠던 고양이 마(Mar, マー)다. 물론 살아 있던 고양이를 친 게 아니라 이미 죽어서 귀신이 된 고양이를 친 것이다. 귀신의 저주가 그런 연출 상황을 만든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집에 돌아온 쿄코는 엄마에게, 자기에게 어렸을 적 죽은 형제가 없었느냐고 묻는다. 운전대를 잡아 운전을 방해했던, 마사시의 병실에서 자신의 배를 치고 사라졌던 토시오를 그녀는, 오래전에 죽어서 자기가 모르고 있던 형제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어렸을 적 죽은 형제가 오래 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귀신으로 나타나, 새로 태어날 자기(쿄코)의 아이를 유산시킨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엄마는 그녀에게 형제가 없었고 외동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친척들도 여자 형제만 있으니 유전적 내력으로 그녀(쿄코)의 아이도 딸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쿄코는 토시오가 자신의 형제가 아님을 엄마의 말을 통해 확인했으므로 그를 자신이 임신했던, 유산하지 않았다면 정상적으로 낳았을 자기 아이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자기 아이는 딸이 아니라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치하루는 극장판 1편에 등장한 이즈미의 친구, 그 치하루가 맞다. 1편과 2편에 나온 치하루가 동일인임을 증명하는 장면이 있다.
1편과 2편에서 치하루가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장면을 보면 등굣길 장소와 교복 모양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즈미가 귀신의 집이라고 소문난 그 집에 다녀온 뒤로 저주에 걸려 죽게 된 것임을 알고 본인도 호기심에 그 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무서운 줄 알면서도 계속 보고 싶어지는 공포 영화에 대한 심리와 같다. 치하루도 이즈미처럼 그 집에 발을 들여놓은 뒤 저주에 걸려 악몽에 시달리게 된다. 치하루 편에서 맨 처음, 흐리고 몽환적인 화면으로 카메라 시점이 하늘을 날다가 카야코 집에 도착하는데 그렇게 화질이 일반 장면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치하루의 악몽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치하루가 그 집에서 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장면은 모두 꿈속의 일이다. 그녀는 엑스트라로 영화 촬영에 참여했다가 쿄코의 배에 손을 댄 토시오를 보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차에서 자다가 악몽을 꾸고, 더 이상 참지 못해서 화장실로 피신했다가 천장에 매달린 카야코 귀신을 보고, 역시 놀라서 뛰쳐나가다 토시오로 의심되는 꼬마와 부딪혀 쓰러져서 죽게 된다. 엑스트라로 영화에 참여했던 그날이 그녀의 사망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망일에 꾸었던 악몽 속, 그녀의 꿈속에 얼핏 나타난 케이스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그와 일면식도 없는데 말이다. 히로미야 원래 알던 친구고 악몽을 꿀 때 옆에서 자기를 깨워줬으니까, 즉 함께 있었으니까 충분히 꿈에 나올 법하지만 케이스케는 그녀와 서로 아예 모르는 사이라서 그의 등장은 생뚱맞다. 또, 훗날 케이스케가 카야코 집을 조사하러 다시 방문했을 때 대문에서 히로미와 마주치는데(카야코 편의 맨 처음), 이렇게 되면 그 둘이 마주친 사건이 치하루의 꿈속에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현실의 케이스케와 꿈속의 히로미가 중첩된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만약 후자가 맞다면 현재 시간의 현실 속 케이스케가 과거 시간(케이스케가 그 집을 찾아간 때는 치하루가 죽은 뒤이므로 케이스케의 입장에서는 치하루의 꿈이 이전 시간이 된다.)의 꿈속 히로미와 조우했다는 것인데, 둘의 만남은 같은 시공간에서 일어난 일처럼 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집에 갇힌 치하루, 그녀를 구하지 못하고 도망 간 히로미, 그녀와 마주친 케이스케. 한 공간에서 일어난 이 세 사람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극장판 1편에서 토오야마와 이즈미가 카야코의 집에서 동시에 만난 사건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토오야마는 그 집에 불을 지르려고 찾아갔는데 미래의 자기 딸, 커서 키도 커지고 중고등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은 이즈미와 조우한다. 토오야마가 불을 지르러 간 때에 당시 이즈미는 어린 초등학생인데 그 집에서는 훌쩍 큰 미래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토오야마 입장에서는 미래의 딸을 만난 것이고, 이즈미 입장에서는 과거의 아빠를 만난 셈이다. 한 공간에 두 시간 차원이 중첩된 이 기이한 현상은 카야코 귀신의 저주가 다재다능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되지 못할 바 없다. 카야코는 슈퍼맨만큼 전지전능하니까.
이번 2편에서는 시간의 차원뿐 아니라 꿈과 현실의 질적으로 상이한 세계적 차원까지 섞어버린다.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말하면, 그 집이라는 한 공간에 치하루가 과거에(히로미와 케이스케 입장에서는 치하루의 꿈이 과거) 꾸었던 꿈의 세계와, 히로미와 케이스케가 집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직접 찾아갔던, 그래서 둘이 대문에서 마주쳤던 미래의(치하루 입장에서는 그들의 일이 미래) 현실 세계가 중첩된 것이다. 그러니까 치하루는 꿈을 통해 미래에 히로미가, 자신이 이즈미의 죽음 때문에 그 집이 궁금해서 찾아갔던 것처럼 그녀도 호기심을 못 참고 그 집에 갈 것임을 미리 본 것이다. 열리지 않는 문을 사이에 두고 현재 꿈속의 치하루가 미래 현실의 히로미를 만난 것이며 현재 현실의 히로미가 과거 꿈속의 치하루를 만난 것이다. 케이스케는 현실에서 카야코 집을 찾아갔다가 자기보다 조금 먼저 그 집에 와서 과거 꿈속의 치하루와 대면한 히로미를 목격한 것이고. 대문에서 일어난 둘의 마주침이, 그래서, 같은 현실에서 발생했으므로 물리적으로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쉽게 정리하면 이렇다. 치하루는 이즈미의 죽음이 그 집과 연관돼 있음을 알고 호기심 때문에 직접 그 집을 방문한다. 이 정보는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그녀가 극장판 1편에서 이즈미의 친구였던 치하루와 동일하다는 확증을 통해, 그녀가 이즈미의 죽음 이후 그 집에 찾아가 보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저주에 걸려 악몽에 시달린 것이다. 꿈속에서 자기를 구해 주려고 한 히로미는 꿈속 가상의 인물도 아니고 꿈을 꿨던 그 시간대, 영화 촬영장에 함께 있었던 그때의 히로미도 아니다. 교복과 목걸이가 그 증거다. 만약 히로미가 꿈속 가상의 인물이라면 케이스케와 마주친 일이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고(그렇다면 케이스케가 치하루 꿈속의 히로미와 현실에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마주친 셈이 되니까, 또 치하루 입장에서 얼굴도 모르는 케이스케가 꿈에 잠깐 비친 것은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미래 일어날 현실에 대한 예지라고 판단함이 지당하다.), 히로미가 영화 촬영장에서 치하루와 함께 있던 그 시간대의 히로미라면 꿈속에서 치하루가 목걸이를 당겨 뜯었을 때, 꿈을 깬 후 히로미 목에 목걸이가 없었어야 함이 옳다. 그러나 목걸이는 히로미 목에도 있고 치하루 손에도 있다. 치하루가 손에 든 것은 미래에 카야코 집을 찾아가서 꿈속의 치하루를 만날 미래의 히로미가 목에 걸고 있던 것이다. 그걸 꿈을 통해 미리 먼저 손에 쥔 것이다. 그리고 교복을 통해서도 히로미가 그때의, 치하루가 악몽을 꾸었던 때의 히로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꿈속에 나타난 히로미는 본래 현실에서 입었던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 영화 촬영장에서 입고 있던 세라복이 아니다. 악몽을 꾸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히로미가 꿈속에 반영된 것이라면 세라복을 입고 나타났어야 함이 옳다.
치하루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본 히로미는 그 죽음이 카야코 집과 연관돼 있음을 깨닫고(치하루가 악몽을 꾼 뒤 그 집에 대해 횡설수설 말했으므로) 호기심에 본인도 찾아가 본다. 그녀가 오기 전 쿄코는 조금 더 일찍 도착해서 그 집에 대한 의문을 풀려고 집 안을 둘러보던 중, 극장판 1편에서 서로 다른 차원의 이즈미와 토오야마가 조우했듯이 과거의 악몽 속 치하루를 목격한다. 그때 치하루는 닫힌 문을 열어 달라고 히로미에게 울면서 부탁하고 있다. 쿄코가 그 집에 당도한 뒤 바로 조금 뒤에 히로미도 그곳을 찾았다가 문 앞에서 꿈속의 치하루를 만난 것이다. 히로미는 그게 꿈속의 치하루인지 몰랐을 것이다. 죽은 치하루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집에 살아 있음을 목도하고 일단 빨리 그녀를 구출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과 동시에 쿄코는 계단에서 기어 내려오는 카야코를 보고 놀라 기절하고, 때마침 케이스케도 그 집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와봤다가 문 앞에서 히로미와 마주친다. 한 공간에 세 사람(쿄코, 히로미, 케이스케)의 차원(현실)과 한 사람(치하루)의 차원(꿈)이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이제 그 전의 쿄코 얘기를 하자면, 그녀는 영화 촬영장에서 치하루가 자신의 배를 주시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부인과를 찾는다. 교통사고로 유산한 줄 알았는데 임신 중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녀는 놀람과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집에 와서, 이 사실을 엄마에게 말할지 말지를 두고 머뭇하다가 그냥 자기 방으로 올라간다. 책상에 앉아 잠깐 졸았는데 "쿄코."라고 자기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잠을 깬다. 그 목소리는 엄마의 영혼이 낸 것이다. 쿄코가 꿈에서 들은 소리도 아니고 카야코 귀신이 변조한 소리도 아니다. 나중에 쿄코가 거실에서 엎드려 자고 있을 때 죽은 엄마의 영혼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깨워 귀신한테 끌려가지 못하도록 도와주는데 그때도 "쿄코."라고 똑같은 음성이 들린다. 엄마 본인도 잠을 자다가 귀신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쿄코가 방에서 졸고 있을 때와 거실에서 엎드려 자고 있을 때 귀신이 해치지 못하도록 그녀의 이름을 불러 잠을 깨운 것이다.
병실에서, 떨어진 부적 주머니를 주우려고 할 때 혼수상태에 있는 마사시가 그녀의 팔을 잡은 이유는, 귀신의 저주로 교통사고를 당해 몸은 움직일 수 없지만 선한 혼령(영혼)의 의지가 발동하여, 그녀의 출산을 막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부적 주머니는 순산을 기원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자가 자기 여자의 출산을 막으려고 하는 일은 없다. 하지만,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 있는 마사시는 그녀 배 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순산을 기원하는 부적 주머니를 줍지 못하게 팔을 붙잡은 것이다. 일종의 경고 메시지다. 부적의 기원대로 아이를 낳게 되면 잉태된 귀신이 세상 밖으로 나오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테니까.
혼수상태에 있는 사람이 뭘 어떻게 알고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느냐, 라고 의구심이 들 수 있지만 쿄코가 집에 엎드려 자고 있을 때 까만 자국에서 귀신 메구미가 올라와 그녀를 저세상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데 엄마의 혼령이 쿄코의 팔을 잡아 깨운 것을 보면, 마사시도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충분히 할 수 있음을 납득할 수 있다. 똑같이 팔을 잡는 행위이므로 논리적으로 연관성도 있다.
병원 옥상에서 쿄코가 마사시의 손을 자기 배에 가져다 댔을 때 그가 몸을 떨었던 것도. 배 속의 아이가 귀신이라서 악의 기운 때문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쿄코 집에 나타난 메구미는 생전의 메구미도 아니고 사후 귀신이 된 메구미도 아니다. 그녀는 카야코가 둔갑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둔갑이나 변신보다 귀신의 장난이라고 보는 편이 낫겠다. 카야코는 전지전능하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비디오판 2편에서는 쿄코(부동산 중개업자 타츠야의 동생)로 나타나 홀연히 사라지기도 했다.
쿄코와 케이스케는 귀신 메구미가 떨어뜨리고 간 일기장을 통해 그 집과 관련된 사건을 조사하고 본인들에게 일어났던 안 좋은 일들이 우연이 아님을 깨닫는다. 의문과 저주를 풀기 위해 다시 집을 찾는데, 쿄코가 먼저 가고 곧 뒤이어, 친구(치하루)의 죽음 때문에 자기도 그 집에 궁금증이 있던 히로미가 도착해 문 사이로 다른 차원(꿈)의 치하루와 대면하고, 마지막에 케이스케가 와서 대문에서 히로미와 마주치고 집 안에 들어가 쓰러진 쿄코를 발견한다.
쿄코가 출산할 때 마사시는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다가 죽는다. 배 속에 잉태된 귀신과 본래 태아의 아빠였던 마사시는 대립 관계다. 결국 쿄코는 출산했고 귀신은 세상에 나왔으므로 마사시는 패한 것이다. 그의 영혼은 카야코의 출생을 견디지 못하고 육체와 함께 파멸된다.
쿄코의 딸로 환생한 카야코는 <링>의 사다코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틀린 말이지만 감독이 그런 열린 결말의 해석을 의도했음은 분명하다. 긴 머리로 얼굴을 감추고 한쪽 눈을 부릅뜬 카야코의 클로즈업은 <링>의 사다코 클로즈업과 거의 동일하다. 이것은 오마주가 확실하지만, 본래 머리로 얼굴을 가리지 않는 카야코가 다시 태어났을 때 얼굴을 가렸고 클로즈업 장면까지 사다코와 동일하게 찍은 것으로 보아, 어린 딸 카야코가 엄마를 죽이고 그 길로 커서 <링>의 사다코가 됨을, 그렇게도 해석해 볼 수 있음을 감독이 의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주제
주온을 한 번 보면 주제 의식 없는 단순한 공포 영화라고 생각하기 쉽다. 원한을 품은 귀신이 무작위로 살인하기에 그럴싸한 연쇄 살인마 하나 만들어서 도륙 과정의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서양 B급 공포물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사람들은 카야코의 출현과 무서움의 정도로만 주온을 평가하는데, 주온의 진가는 그것이 현대 사회의 가족 붕괴와 현대인의 원자화를 제대로 집어냈다는 데 있다. 그루지(The Grudge)를 포함한 주온 시리즈의 바탕에는 '가족'과 '고독'의 문제가 깔려 있다. 귀신의 저주 때문에 가족은 와해하고, 가장 곁에서 돌봐 줄 가족이 없으니 혼자가 된 개인들은 홀로 공포에 떨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모든 작품에서 카야코 귀신에 의해 등장인물의 가족이 사망하고 희생자들이 실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혼자 남겨진 뒤 고독사를 맞이한다. 카야코가 살인할 때 물리적 위해나 고통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 것도, 그냥 저세상으로 함께 사라지는 것도(극장판 1편의 히토미와 이즈미의 경우처럼) 현대인의 고독사를 적절하게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친구 없는 사회다. 심지어 가족까지 남이 되는 세상이다. 우리는 살면서 점점 혼자가 된다. 옛 친구의 존재는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그들의 생사는 나에게 실종 상태로 여겨질 뿐이다. 이제 서로 관심이 없으므로, 남이 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그들은 나에게 실종된 것이다. 그들도 나 모르게 죽고 나도 그들 모르게 죽는다. 주온은 이러한 가족 붕괴와 현대인의 원자화를, 일본 사회의 어둡고 삭막한 풍경을 귀신의 저주로 빗대어 표현한 셈이다.
정리하면, 카야코의 저주는 가족 해체, 원자화, 고독사가 진행되는 현대 사회의 세기말적 풍경에 대한 비유고, 그런 음울하고 삭막한 상황을 귀신의 저주로 표현한 것이고, 그 저주 때문에 죽어 나가는 등장인물은 고독사에 내몰린 외로운 현대인을 상징한다. 언뜻 보면, 이러한 사회 문제의 해결책으로 '결국 가족밖에 없다'는, 전통적 가족 제도에 대한 보수와 회귀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쿄코가 귀신에게 끌려가지 못하게 엄마의 영혼이 그녀의 팔을 잡아 깨운다. 귀신의 저주 때문에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마사시도 그의 엄마가 보살핀다.) 마지막에 쿄코가 카야코를 출산함으로써 '가족'에 대한 희망은 산산조각이 난다. 과거의 전통적 가족은,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원자화와 고독사를 방지해 일본 사회를 밝고 명랑하게 만들 수 있겠으나 현재는, 어린 카야코가 쿄코를 육교에서 밀쳐 죽였듯이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는 시대다. 일본도 그렇고 우리나라에서도 존속살해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 가족이 유일한 해결책인데 카야코의 저주는, 가족 해체와 원자화와 고독사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라는 듯이 결말에 자기를 낳아준 엄마를 죽임으로써 가족에 대한 희망을 일축한다. 육교에서 떨어진 쿄코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중에도 모성애를 발휘해 자기 딸 카야코에게 목도리를 건넨다. 목도리는 혈육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는 소재로써 '가족'의 의미를 끝까지 지키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카야코는 목도리를 받지 않고 무심하게 그녀를 떠난다. 그리고 사람들 있는 도시의 거리로 태연하게 향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현대 사회에 가족의 의미는 완전히 파괴됐고 개인의 원자화와 고독사는 막을 수 없는 숙명처럼 진행될 것임이다. 목도리를 받지 않음으로써 가족은 끝났고, 사람들 있는 도시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저주는 계속된다. 어린 카야코는 전처럼 무고한 사람들을 무작위로 살해할 것이다. 이런 무자비함은 귀신의 저주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의 원자화와 고독사가 일본의 천재지변처럼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임을 뜻한다. 가족의 의미로도 해결할 수 없는 시대의 숙명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한(恨)의 정서가 지배하므로 귀신이 나쁜 사람에게 복수하거나 한을 풀면 승천하고 거기서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나 일본은 똑같이 원한을 품고 귀신이 되어도 계속 이승을 떠돌며 무고한 사람까지 괴롭힌다. 이는 일본의 공포가 한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천재지변 같은 자연적 재앙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일본에 비해 지진이 덜하므로 사람 죽고 죽이는 일은 주로 인간관계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 벌을 받지 않는다, 나쁜 짓 하면 귀신이 잡아간다, 라는 말이 내려온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귀신은 나쁜 사람만 건드린다. 반면에 일본은 지리적 특성상 자연재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착하게 산다고 안 죽고 나쁘게 산다고 반드시 죽는 것 아니었다. 천재지변은 선악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무작위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즉 공포를 선악 초월한 자연의 섭리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귀신은 아무나 이유 없이 건드린다. 일본 귀신은 자연적 재앙에 대한 인간의 공포가 반영된 결과이므로 무자비한 것이다.
쿄코의 출산을 통해 환생한 카야코는 전처럼 계속 저주를 퍼뜨리며 사람들을 죽여 나갈 것이다. 엄마를 살해해 놓고서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도시의 길을 걷는 마지막 장면은, 가족 해체와 원자화와 고독사가 귀신의 저주처럼 퍼져 나가 만연해질 것임을, 일본 사회가 그렇게 삭막하고 음울한 시대를 맞이할 것임을 예견한 것이다.
간략하게, 작품 속 주제 의식을 분석하면 이렇다.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지닌 두 관념이 대립하는데, 전자는 가족이고 후자는 고독이다. '가족'은 현대 사회의 원자화와 고독사를 막을 수 있는 희망적 가치다. '고독'은 가족 해체로 혼자 되고 홀로 죽는 절망적 상황이다. '가족' 관념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는 교통사고 당한 쿄코와 마사시의 부모, 신혼부부로 추정되는 토모카와 그의 남편, 그리고 쿄코 집 거실에 걸려 있는 조상 사진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유독 액자 속 조상들 사진을 많이 비추는데, 가족의 의미를 부각하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가족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주제 의식의 한 축이 구성된다. 결말에 쿄코가 카야코에게 내민 목도리도 가족의 따듯함을 의미하는 소재다. 물론 카야코는 '고독'의 전도사이므로 목도리를 받지 않는다. 귀신의 저주 때문에 가족과 사별하고, 친구와 동료를 잃고, 사람들이 실종되는 것은 '고독'의 관념을 드러낸 것이다. 가족이 선의 축이라면 고독은 악의 축이다. 두 관념의 대립이 이 영화의 기본 틀이다. 맨 처음 장면, 쿄코와 마사시가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하는 장면에서 '오키나와에 여행을 갔는데 고적했다(I went to Okinawa on a trip recently, and no one can imagine how desolate it was.).'라는 얘기가 나온다. 카야코의 저주 때문에, 가족 해체로 원자화하고 고독사해서 오키나와가 황량해졌다는 뜻이다. 라디오에서 들리는 사소한 얘기 같지만 이것도 '고독'의 관념, 주제 의식을 구성하는 유의미한 대사다. 이렇게 영화 맨 처음에 주제와 관련된 장면이나 대사가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영화 처음을 느긋한 자세가 아니라 주의 집중하는 자세로 볼 필요가 있다.
메구미가 쿄코에게 선물한 부적 주머니에는 수천궁(水天宮)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다른 면에는 순산을 기원하는 다른 문구가 있는데 그건 중요하지 않고 수천궁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다. 영화에서 수천궁 글자는 쿄코가 메구미의 핸드폰을 들어 올릴 때, 그때 딱 한 번 나온다. 감독이 일부러 한 번만 나오게 연출한 것이다. 그 글자가 주제와 관련 있는 어떤, 영화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해결해 주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빤히 드러내고 여러 번 보여주면 영화가 시시해지니까, 감독 본인의 연출력도 낮게 평가되니까 일부러 수수께끼처럼 어렵게 힌트를 한 번만 흘린 것이다.
수천궁은 임신과 순산을 기원하는 장소다. 실제로 일본에 있는 신사 이름이다. 물이 생명과 관련 있기 때문에 물 수(水) 자가 들어 갔다. 아이를 낳는 것은 '가족'을 생산하는 것이므로 임신과 순산을 상징하는 물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고독'이 아닌 '가족'의 한 축을 구성하는 개념이다. 물론 쿄코가 귀신을 잉태했을 때는 출산 자체가 귀신을 낳는 행위이기에 부정적 의미를 가지므로, 떨어진 부적 주머니를 잡지 못하게 마사시가 쿄코를 붙잡은 것이다. 어쨌든, 물의 이미지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한다.
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던 토모카의 방을 보면 바다 사진의 액자가 바닥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그런 것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소하고 일상적인 장면이다. 왜 액자를 바닥에 놓은 것일까? 액자는 벽에 걸려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소품 담당이 저 사진을 구해서 벽에 걸지 않고 바닥에 놓은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의미한 소품이고 무의미한 연출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것은 영화고 창작물이므로 바다 사진이 벽에 걸려 있지 않고 바닥에 있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앞서 물이 임신과 순산을 의미하고 수천궁 주머니가 그것을 대표한다고 했는데, 물(水)의 하늘(天)은 곧 바다다. 그러므로 토모카 방에 있던 바다 사진은 임신과 순산, 즉 '가족'의 주제 관념에 해당하는 소재로 볼 수 있다. 아이를 낳는 것은 가족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것이 왜, 벽에 걸려 있어야 할 사진이 왜 바닥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토모카와 그의 남편이 죽을 때 목매달린 채로 벽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카야코의 저주 때문에 사체가 되어 그들의 죽음이 표출된 장소가 벽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의미를 갖는 바다 사진이 제 역할대로 벽에 걸릴 수 없는 것이다. 바다의 개념은 출산과 가족으로 이어지고 벽의 개념은 죽음과 가족 파멸로 이어진다.
4. 표현
카메라를 들고 찍는 핸드헬드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것의 목적은 시청자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다. 사람이 들고 찍기 때문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는 슬픈 상황에서 슬픔을, 다급한 상황에서 다급함을, 무서운 상황에서 무서움을 조성한다. 흔들리는 화면이 인간의 떨리는 감정을 모방해 그런 효과를 자아내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쿄코가 병실에 누워 있는 마사시의 심장 박동기를 바라볼 때 핸드헬드를 사용했다. 떨리는 화면은 그녀의 슬픈 감정을 대변한다. 분장실 커튼 속에서 이상한 기운을 느낀 메구미를 찍을 때도 핸드헬드를 통해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뿐만 아니라 귀신의 시선을 표현할 때도 그것이 쓰였다는 건데, 다른 영화에서도 특히 살인마가 나오는 서양 공포물의 경우 살인마가 희생자들을 몰래 지켜보는 장면을 핸드헬드로 나타내곤 하는데, 귀신 카야코의 시선도 그렇게 나타났음은 물론이고, 중요한 것은 방송 촬영 중 쿄코의 마이크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직전에 촬영하는 그들을 위층에서 바라보는 시점이 핸드헬드 장면으로 나오는데 그것도 귀신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핸드헬드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보면, 영화 속 보통 화면이라고 대충 넘어가기 쉬우나 후에 메구미가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다시 집에 들어갔다가 케이스케와 불을 끄고 나가는 장면과 비교해 보면 두 장면 다 같은 위치에서 핸드헬드로 찍혔고 하나는 확실하게 귀신의 시점임이 드러나므로(케이스케가 불 끄고 나간 뒤 화면이 아래로 스르륵 움직인다.) 나머지도(촬영하는 그들을 위층에서 바라보는 장면도) 귀신의 시점임을 추론할 수 있다. 그렇게 그들을 위에서 보고 있다가 쿄코의 마이크에 꺼어억 하는 소리를 낸 것이다.
쿄코의 엄마가 자다 죽었을 때 화면이 슬퍼하는 쿄코를 비춘 뒤 오른쪽 위로 움직이다가 끊기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데, 처음에 이것을 엄마의 영혼이 승천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치하루도 죽을 때 하늘로 올라가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은 엄마가 죽기 바로 직전 창문에 비친 토시오를(쿄코는 창문을 닫으려다가 유리에 비친 토시오를 보고 놀란다.) 다시 보여주려다가, 왜냐하면 귀신 토시오가 방금 전까지 엄마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엄마의 죽음이 그 때문임이 분명하니까, 그렇게 창에 비친 그를 다시 보여주려다가 직접 보여주면 오히려 공포감이 떨어질 수 있으니까 보여주는 척 카메라를 이동하다가 중간에 끊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 것이다.
영화 처음, 쿄코와 마사시가 운전하며 귀가할 때 화면 색감이 하나로 통일된 것이 아니라 두 개로 나뉘어 번갈아 진행된다. 하나는 따뜻한 노란빛이고 다른 하나는 창백한 파란빛이다. 본능적으로 노란빛은 인간 현실의 보통 시선이고 파란빛은 귀신 세계의 시선임을 알 수 있다. 파란 색감의 화면은 두 남녀가 탄 차를 마치 귀신이 하늘을 날아오듯 쫓아가며, 그들이 고양이를 치고 다시 출발할 때 또 파란 화면은 사라진 고양이가(고양이 사체가 사라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흘린 핏자국에서 출발하여 그들을 추격하다가 차 안으로 들어간다. 실제로 카메라의 시선이 차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 토시오가 운전석 밑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파란 색감의 이러한 경로와 움직임을 통해 그것이 귀신의 시선임이 증명된다. 토시오가 운전대를 잡은 장면에서 파란색 토시오가 마사시의 색감과 대비되는 것도 파란빛이 귀신의 시선임을 나타내는 증거다.
전경에 장애물을 두어 시야를 가리는 장면은 공포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연출이다. 주온 시리즈에서도 단골로 등장한다. 그렇게 화면 앞을 가리면 시청자는 무의식적으로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느낀다. 그게 영화 보는 내내 쌓이고 쌓여서 공포감과 더불어 불쾌감까지 일으킨다. 또한 그렇게 인물 앞을 가림으로써 공포 영화 속 등장인물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위치가 아니라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위치로 전락시킨다. 공포 영화의 인물은 극적으로 당연히 당하는 입장이므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느낌을 줘야 한다. 공포의 대상과 공포의 분위기에 항상 눌려 있어야 하므로, 시야를 전면 개방해 인물이 당당하게 드러나고 주동적으로 행동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전면의 시야를 일부분 가려 인물의 영향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인물을 틀 안에 가두는 구도도 전경에 장애물을 배치한 장면과 마찬가지로 인물의 능동성과 적극성을 감소시켜 인물이 어떤 상황에 갇혀 있고 속박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틀은 일종의 감옥과 같다. 벗어날 수 없는 주온의 저주를 형상화했다고도 볼 수 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쿄코가 마사시의 병실 문을 열었을 때 토시오가 그녀의 배를 밀고 사라지는데, 그때 화면에 잡힌, 병실에 누워 있는 마사시는 각종 의료 장비와 기계에 가려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게 처리됐다. 마치 '마사시는 물건처럼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한 것 같다. 사물에 가리고 덮인 마사시의 모습을 통해 그의 생사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쿄코가 휠체어 탄 마사시와 옥상에 함께 있을 때 둘이 클로즈업으로 나란히 잡히는 장면이 있는데, 링거액을 달아 놓은 휠체어 기둥이 화면 앞에서 시야를 방해한다. 쿄코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마사시에게 자신의 복잡한 심정, 애 아빠가 정상이 아닌 상황에서 홀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임부의 심정을 얘기하는데 그 시야를 가린 휠체어 기둥이 그들의 미래가 밝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화면 앞이나 사람 사이에 장애물 혹은 경계선이 있는 것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특히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그런 것이 있다면 영화에서 그들은 싸우거나 헤어진다. 쿄코와 마사시도 당연히 불행한 결말을 맞이한다.
사선 구도는 인물의 심리가 불안정하거나 상황이 비정상적일 때 사용된다. 비뚤어진 화각은 그만큼 무언가 일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뜻이다. 무탈한 장면이었다면 정상적으로 안정된 구도를 보여줬을 것이다. 케이스케가 카야코의 일기를 복사할 때 복사기가 카야코 특유의 신음 소리를 내며 그녀의 얼굴을 복사하는데, 그만큼 무섭고 불안한 상황이므로 사선 구도로 표현된 것이다.
쿄코가 교통사고로 유산할 때와 병실에서 카야코를 낳을 때 피가 흐르는 발 장면이 수미상관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