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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공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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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Jun 02. 2024

고멘나사이

아이돌 걸그룹을 위한 팬서비스 영화

저예산 일본 공포영화. 'Buono!'라는 여가수 그룹이 주연을 맡았다. 아이돌 가수임에도 연기력이 괜찮아서 몰입감이 좋았다. 다만, 저예산 영화이다 보니 서툰 구석이 눈에 띄고 그로 인해 공포 영화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아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는 게 단점.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무더위 여름을 날려줄 공포 영화는 아니니 기대하는 것은 금물.


1. 구조

이 영화는 모큐멘터리와 페이크 다큐처럼 내용의 진실성을 두고 관객을 속이는 영화다. 차이가 있다면 앞의 두 장르는 다큐를 표방해 진실인 척 가장하다 이후에 허구임을 터뜨려 관객을 골린다는 것이고, 이 영화는 영화를 표방해 관객이 뻔히 허구임을 아는데 끝까지 진실인 척 어거지를 피운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누구나 영화라는 장르가 각본과 연출이 있는 허구라는 것을 아는데 이 영화는 영화 내용과 영화 자체까지 실제라고 강변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삼류영화의 술수에 넘어가 이를 진실이라고 믿을 관객은 없다. 일류영화라 해도 관객은 극장을 나오는 순간 영화를 잊고 현실로 돌아온다. 눈여겨볼 점은 이것의 진위 여부가 아니라 허구의 영화를 진실처럼 가장하기 위해 쓰인 기법이다.

영화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맨 처음과 영화 끝난 뒤 나오는 출연자 인터뷰. 이를 A라 하자. 출연자가 연기한 실제 알맹이 영화. 이를 B라 하자. 그리고 결말 이후 맨 마지막에 나오는 깜짝 영상. 이를 C라 하자. 이렇게 영화는 각기 다른 세 형식으로 조합돼 있고, 그 순서는 A - B - A - C, 그리고 허구인 영화를 실제처럼 꾸미는 부분이 A와 C다. 그러니까 앞 단락에서 말한 '허구의 영화를 진실처럼 가장하기 위해 쓰인 기법'이 바로 출연자 인터뷰 A와 깜짝 영상 C다. 영화는 이 두 가지 수법으로 쿠로하네의 저주가 실제임을 주장하며 관객을 공갈한다.

이해하기 쉽게 영화의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Buono!의 멤버 스즈키 아이리(영화 주인공, 히다카 유카)가 인터넷에 게시된 히다카 유카의 소설(쿠로하네의 저주가 걸린 소설)을 읽게 된다. 소설을 읽고 저주에 걸린 아이리는 히다카 유카가 그랬듯이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퍼뜨리기 위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영화로 개봉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러면 자신이 죽을 확률도 낮아지니까. 그래서 Buono! 멤버와 상의하고 PD와 감독에게 영화로 만들 것을 부탁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영화가, 쿠로하네의 문자가 삽입된 이 전체 영화의 알맹이 B다. 그러니까 찍은 순서는 B가 가장 먼저다.

영화 촬영을 마치고 포스터와 공식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구석에서 큰소리가 들린다. 카메라가 나츠야키 미야비(얼굴 긴 애, 쿠로하네 히나코)의 인터뷰를 찍다가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본다. 츠구나가 모모코(키 작은 애, 소노다 시오리)가 아이리에게 화를 내며 다그치고 있다. 아이리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않는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걸까? 모모코는 팬들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을 통해 아이리의 속사정, 즉 저주를 퍼뜨리기 위해 영화를 찍은 아이리의 속셈을 모모코가 간파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모모코는 그래서 화가 난 것이다. 영화가 개봉되면 쿠로하네의 문자가 삽입된 영화를 팬들이 보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들도 저주에 걸리게 되니까. 모모코가 아이리를 윽박지르는 이 신은 C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찍은 영화는 개봉되어야 하므로 공개하되 아이리의 사과 영상을 끼워 넣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영화 처음과 끝에 Buono! 멤버가 의자에 앉아,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a1) 저주 걸린 쿠로하네의 문자를 첫머리에 공개한 점을 사과하는(a2)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A(a1 + a2)다. 영상을 자세히 보면 뒤에 포스터가 있는데 포스터는 C에서 찍었으므로 시간상 C가 A에 우선함이 당연하다. 또 C에서 쿠로하네 역에 대한 인터뷰를 했으므로 C 이전에 B를 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를 찍었으니까 그 역할에 대한 소감도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진행된 순서는 B - C - A, 편집된 순서는 a1 - B - a2 - C다. 여기서 A와 C는 B가 영화임에도 불구하도 이것이 허구가 아니라 실제임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기능을 한다. B만 뚝 보여주면 관객은 당연히 안 믿으니까 A와 막판에 깜짝 영상으로 C까지 덧붙인 것이다. 포스터에도 그러한 의도가 드러나 있다.

Buono! 멤버가 앉아 있고 그 아래로 그들이 모습이 비친다. 그런데 셋 다 비친 모습이 실제 모습과 다르다. 이미지를 위아래로 나눈다면 위는 영화 속 모습이고 아래는 영화 밖 모습이다. 영화 맨 마지막 깜짝 영상 C에서 포스터를 찍을 때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왼쪽에 있는 여자는 두 이미지가 같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자세히 보면 턱을 괸 손 모양이 다르다. 위는 손가락을 펴고 있고 아래는 주먹을 쥐고 있다. 아무튼 왜 유리에 비친 모습이 다른 걸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가 실제성을 표방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목적은 단순히 쿠로하네의 저주에 관한 이야기(B)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B로만 승부를 걸었다면 관객은 당연히 허구임을 간파하고 웃어 넘겼을 것이다. 이 영화가 진정한 공포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허구 형식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A와 C가 필요했다. 즉, 일본에서 실제 활동하는 여가수 그룹 Buono!의 아이리가 영화 밖에서도, 실제로, 쿠로하네의 저주에 걸려 그 때문에 영화(B)를 찍게 됐다는 설정이 있어야 관객에게 공포를 줄 수 있다는 얘기다. 관객은 영화(B)를 통해 쿠로하네의 저주 걸린 문자를 보았으니 실제 현실의 아이리가 저주에 걸려 죽을 것이라면 관객 자신도 저주에 걸려 죽을 것임은 상식으로 알 수 있다. 이것이 영화가 노리는 공포의 정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영화 속과 영화 밖을 일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실제성을 입증해야 관객이 쿠로하네의 저주를 영화 속 얘기로만 치부하지 않고 영화 밖에서도 통용되는 진실이라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 포스터에서 영화 속 모습(위) 아래 영화 밖 모습(아래)이 비친다는 것은, 그리고 영화 밖 모습에도 교복이 착용돼 있다는 것은 영화 속 그들의 처지와, 즉 쿠로하네의 저주에 시달리는 영화 속 그들의 처지와 영화 밖의 처지, 즉 Buono!로 활동하는 영화 밖 그들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영화 속에서 저주에 걸렸는데 영화 밖에서도 저주에 걸렸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쿠로하네의 저주는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는 것이다.

유리에 비친 대상의 동일성은 그들이 영화 밖에서도 저주에 걸렸음을, 영화 속 쿠로하네의 저주가 실제임을 입증하는 성질로 작용한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고멘나사이', 우리말로 '미안합니다'인 것이다. 영화가 허구인 줄 알았는데 진짜여서, 쿠로하네의 저주가 영화 밖에서도 실제 적용되므로 관객을 죽음의 운명에 빠뜨려서 그게 미안하다는 것이다.


2. 동일성

쿠로하네는 저주를 통해 영생하기 위해 히다카에게 문자를 보낸다. 마치 저주를 퍼뜨릴 후계자를 임명하듯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문자를 보낸 뒤 죽어버린다. 쿠로하네는 자신이 살해당하면 저주에 관한 소문이 무성하게 퍼져 많은 이의 궁긍즘을 자극하리라 예상한 것이다. 실제로 히다카가 3학년이 된 후 저주에 관한 소문을 들은 친구들이 그 문자를 보여 달라고 조른다. 히다카는 뜻하지 않게 쿠로하네의 저주를 전달하는 사자가 된다. 그리고 막판에 본인이 죽지 않기 위해, 저주를 퍼뜨리기 위해 쿠로하네의 문자를 이용해 인터넷 소설을 작성한다. 여기서 히다카와 쿠로하네의 유사성을 추론할 수 있다. 저주의 문자를 뿌린다는 점에서 그들은 유사하다. 영화는 그들의 유사성을 여러 가지로 암시한다.

왼쪽은 히다카의 방이고 오른쪽은 쿠로하네의 방이다. 가구 배치가 정확히 일치한다. 책상이 북쪽이라면 침대는 동쪽이다.

3학년이 된 히다카는 새로운 학급에서 창가 쪽 맨 앞자리에 앉는데 이러한 설정도 둘의 유사성을 입증하는 근거다. 왜냐하면 창가 쪽 맨 앞자리는 2학년 때 쿠로하네가 앉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저주를 전달하는 후계자가 된 히다카는 쿠로하네가 앉았던 자리와 동일한 위치에 앉는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히다카와 쿠로하네는 유사한 인물임이 틀림없다.

또한 사랑받지 못하는 그들 처지도 서로 비슷하다. 히다카는 문예부 선생에게 인정받기 원하지만 선생은 쿠로하네에게 관심이 많다. 그는 쿠로하네가 문예부에 가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소식에 아쉬워하며 히다카가 쓴 소설에 대해서는 건성의 태도를 보인다. 또 쿠로하네가 교내 문화제에서 연극 각본을 쓴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히다카가 콩쿠르 준비 때문에 각본 쓰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역시 건성의 태도를 보인다.

그가 히다카와 대화를 나눈 뒤 문을 닫고 들어가는 장면인데, 닫힌 문은 관심을 갈구하는 히다카의 슬픈 눈과 대비된다. 모자이크 처리되어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는 문은 히다카에게 무관심한 선생의 마음을 상징한다. 

쿠로하네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공부 잘하는 우수한 딸이지만 부모는 동생을 더 사랑한다. 아니, 동생만 편애한다. 선물을 해도 동생 것만 좋아하고 쿠로하네의 것은 쓰지 않고 어디에 넣어 둔다. 동생이 죽었을 때 부모는 오열하지만 쿠로하네가 죽었을 때 부모는 미소 짓는다. 쿠로하네는 관심과 사랑을 바랐지만 부모는 그녀에게 무관심했다. 아니, 속으로 혐오했다.

영화 후반, 히다카가 쿠로하네의 저주를 피하려고 인터넷에 소설을 작성할 때, 묶었던 자신의 머리를 풀어 생머리로 만드는데 이런 행동과 모습도 히다카와 쿠로하네의 유사성을 증명하는 근거다. 풀어 놓은 히다카의 생머리는 쿠로하네의 머리 모양과 흡사하다. 히다카의 머리 모양은 영화에서 이때 딱 한 번 변하는데, 저주를 퍼뜨릴 것을 결심하면서 머리 모양을 바꾸었다는 것은 영화가 두 사람의 유사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3. 미장센

쿠로하네는 외톨이다. 그녀는 누구와 어울리기를 거부한다. 그녀의 외톨이 성격을 표현하는 장면이 몇 개 있다.

영화(B) 첫 장면이자 쿠로하네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인데, 대개 인물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그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곤 한다. 그래서 관객과 비평가는 언제나 첫 장면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이 장면을 통해 쿠로하네가 외톨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녀는 맨 앞자리에 앉았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 창밖에 서 있는 두 학생은 홀로 앉은 쿠로하네와 대비된다. 또한 뒷모습만 보임으로써 그녀의 고독은 한층 부각된다.

모두 춘추복을 입었는데 혼자 동복을 입은 쿠로하네. 의상을 통해서도 그녀가 외톨이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모두 선생의 말에 집중하고 있는데 쿠로하네 혼자 고개를 숙이고 각본을 쓰고 있다. 그녀의 창작 욕구는 급우의 죽음 소식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쿠로하네는 집에서도 외톨이다. 그녀는 가족과 한집에 살지만 한 공간에 어울리는 법이 없다. 항상 문 밖에서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문은 그녀와 가족 사이에 놓인 장애물이자 경계선이다. 심지어 그녀는 여동생이 죽는 순간에도 문 밖에 서 있기만 할 뿐 거실로 넘어오지 않는다. 거실은 오로지 가족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그녀는 방에만 있을 뿐, 혹은 가끔 거실 문에 서서 안을 염탐할 뿐 가족과 함께 거실에 있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사방이 꽉 막힌 답답한 이 구도는 쿠로하네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녀는 부모의 무관심과 여동생의 시기심에 질려 마음을 닫고 장벽을 쌓은 상태다. 그녀는 층층이 뚫린 계단을 통해 방으로 이동하는데 계단 모양이 감옥의 철창을 연상시킨다. 이런 장면은 확실히 앙각으로 찍어야 효과가 산다. 부감으로 찍으면 관객이 내려다보는 우월한 입장이 되므로 복잡하고 답답한 형세를 초월하는 듯한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는 두 사람이 대립하듯 양쪽으로 떨어져 있다. 공간을 비우고 거리를 벌렸다는 것은 두 사람이 반목 관계라는 뜻이다. 사이가 좋았다면 이렇게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이런 구도는 모든 영화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기법이다. 그렇다면 정말 두 사람은 반목 관계인가? 전술했듯이 둘은 유사성이 존재하지만 저주 거는 사람과 저주 걸린 사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분명히 반목 관계다. 또 이때는 히다카가 쿠로하네의 저주를 알아채고 그녀가 급우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는 부분이다. 쿠로하네는 저주를 걸려고 하고 히다카는 저주를 막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색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인물 성격에 맞게 색이 사용되었다. 쿠로하네는 어두운 성격이라 칙칙한 단색을 착용하고 나온다. 그녀가 입는 옷은 주로 회색이고, 초등학생 때 신었던 신발은 검은색, 저주의 각본을 쓸 때 사용한 펜은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이다. 엄마에게 줄 선물을 살 때도 그녀는 알록달록 무늬가 섞인 컵이 아니라 단조로운 흑백 문양의 컵을 고른다.

그런데 신기한 점은 쿠로하네가 선택하지 않은 그 컵이 여동생이 입은 옷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의도한 것처럼 닮았다. 우연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다. 또한 여동생이 저 옷을 입고 나오는 장면은 엄마에게 선물을 주는 장면이므로 쿠로하네가 컵을 사는 장면과 연결된다. 나는 감독이 이를 의도하고 컵과 비슷한 옷을 골라 입혔거나 옷과 비슷한 컵을 찾아서 갖다 놓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쿠로하네는 어두운 성격이므로 반드시 흑백 문양의 컵을 골라야 하고, 여동생은 그녀와 대립하는 입장이므로 알록달록 채색된 옷을 입어야 한다. 이것은 연출이 아니라면 납득 불가한 일이다.

쿠로하네와 다르게 히다카는 여성스러운 색을 많이 입는다. 주로 분홍색이 많다. 필통도 분홍, 휴대전화도 분홍, 집에서 입는 옷에도 분홍이 곁들어 있다. 전형적인 여학생 캐릭터이므로 당연한 현상이다. 쿠로하네가 밝은 색을 가까이하는 경우나 히다카가 어두운 색을 가까이하는 경우는 영화에서 절대 없다. 색 또한 연출이므로 감독의 의도대로 인물 성격을 따른다.


4. 기타

쿠로하네의 일기 부분은 핸드헬드로만 찍혔다. 핸드헬드는 불안한 상황, 인물의 시선이나 심리, 사건의 현장감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인다. 이 영화에서는 쿠로하네의 암울한 사연과 그녀의 불안정한 심리를 나타내는 데 핸드헬드가 사용되었다.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Deep Mind>라는 곡은 영화 주제가로서 단순히 영화 끝을 장식하는 노래가 아니라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 장치다. 가사를 음미하며 들어보라. Buono!가 관객에게 '우리는 쿠로하네의 저주에 걸린 동지니까' 죽지 말고 함께 잘살아 보자며 격려를 보낸다. 영화에서 문예부 선생이 수업할 때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납득할 것이다. "이건 보기 드문 2인칭 소설이다. 모두 '당신'이나 '너' 같은 형식으로 얘기를 들려주듯이 쓰여 있지. 너희도 노래 가사 같은 데서 들어서 익숙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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