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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Jun 02. 2024

그루지 3

원정 저주의 마지막 똥꼬쇼

그루지 시리즈를 다 보았다. 간략한 평가를 내리자면 1편이 그나마 낫고, 2편은 우스꽝스럽고, 3편은 수준 낮다. 잘 만든 순서로 서열을 매기자면 1편, 3편, 2편. 3편은 그래도 공포영화로서 기본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보이지만 2편은 아예 공포가 아니라 코미디다. 줄거리에도 억지 설정이 많다.

시리즈를 낼수록 작품이 저하하는 까닭은 공포 대상(귀신)에 대한 노출이 잦아지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이미 카야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왜 죽었는지, 언제 출몰하는지 다 꿰고 있다. 전작을 통해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상태다. 공포의 본질은 무지(無知)인데, 낯설어야 무서운 법인데 카야코는 익숙한 대상으로 관객에게 각인되었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무섭지 않다. 온 관절을 꺾어도 안 무섭다. 시리즈를 통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루지 시리즈의 연패는 예정된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여기서 끝냈으면 좋겠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원정까지 했으니 그만하면 할 일 다한 거다. 새로운 귀신이 나타나야 할 때다. 카야코의 저주를 재탕하는 짓은 코미디와 다를 바 없다.

작품에 대해 한 얘기 하자면, 토시오가 등장할 때 배꼽 빠지게 웃었다. 이 영화의 명장면은 토시오가 "토시오." 하면서 계단 난간에 나타나는 장면이다. 그루지 시리즈 중 역대급으로 웃긴 장면인데(2편에서 앨리슨의 선생과 친구들이 좀비로 변한 장면도 웃김.) 그새 성장한 토시오의 모습은 이질감이 들 정도로 징그럽다. 무서워서 징그러운 것이 아니라 애가 어른처럼 성장해서 징그럽다. 귀신도 나이를 먹는다는 설정은 영화의 장르를 공포에서 코미디로 갑자기 전환시킨다. 감독은 무섭게 하려고 그렇게 한 것 같은데 엉뚱한 발상이 역효과를 일으킨 셈이다.

영화 막바지에 맥스가 나오코를 죽이는 장면에서 그는 카야코 남편에 빙의된 것처럼 비슷한 행동을 보이는데, 그때 영화는 맥스와 남편을 병렬 편집으로 함께 보여준다. 맥스의 광기와 분노가 저주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인데, 둘을 함께 보여주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이미 관객은 시리즈를 통해서, 오프닝 타이틀에 나온 남편의 살해 장면(카야코의 피살 장면)을 통해서 그의 행동을 본 상태다. 그루지 시리즈를 보면 흑백 처리된 그 장면을 수도 없이 만난다. 굳이, 관객에게 무언가 알려주듯이, 그렇게 의도를 드러내면서 맥스와 남편을 병치할 이유가 있었을까. 영화 연출은 절제할수록 멋들어진다. 이것은 영화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모든 예술에 통용되는 원칙이다. 미(美)는 과잉이 아니라 절제다. 그런데 감독은 맥스와 남편의 유사성을 굳이 강조함으로써, 강조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절로 알아차렸을 텐데, 아무튼 그렇게 자랑하듯이 밝힘으로써 스스로 작품의 격을 낮추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몇 가지 영상 표현을 설명한 뒤 글을 마치겠다.

나뭇가지는 저주를 뜻한다. 2편에서도 동일한 상징으로 쓰였다. 카야코의 옛 집을 휘감고 있는 나뭇가지를 보라. 실핏줄처럼 뻗친 모양이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다. 가옥에 나뭇가지가 걸려 있다는 것은 그 집이 저주에 걸렸다는 뜻과 동일하다. 그래서 영화는 시카고의 연립주택을 보여줄 때 항상 나뭇가지를 함께 비춘다.

시카고에서 제이크가 (저주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을 나오코가 접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창 블라인드를 통해 그녀를 비춘다. 나오코는 언니의 저주를 풀기 위해 시카고행을 결정한다.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떠난다. 관객은 블라인드 장면을 통해 그녀가 시카고로 떠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그녀는 갇혀 있기 때문이다. 창의 블라인드가 만든 격자무늬는 감옥을 연상시킨다. 그녀는 감옥에, 그 사건에 갇혀 있다. 절대 벗어날 수 없음을, 관객은 느낄 수 있다. 후에 나오코가 죽는 것으로 미루어 감옥은 비극적 최후를 상징하기도 한다.

맥스가 전구를 고치다가 망가져서 낙담하는 장면에서 사선 구도가 쓰인다. 그렇게 불균형한 각도는 불안한 감정과 불길한 기운을 상징한다. 화각을 살짝 비틀면 대상과 배경이 안정을 잃고 비뚤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뒤쪽에 있는 쇠창살과 벽면에 비친 그물 문양이 감옥을 연상케 해 인물이 처한 곤혹스러움을 증폭한다.

리사와 로즈가 경찰에 의해 구조되고 사건은 종결된다. 이 장면에서 화면 앞을 가르고 있는 안전띠가 보이는데, 우리는 이것을 통해 저주가 끝나지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다. 일단 전경에 무엇이 놓여 있다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다. 대부분 불길함을 상징한다. 해피엔딩이라면 확 트인 롱숏으로 보여줘야 함이 옳다. 그러나 리사와 로즈는 안전띠 안에 있다. 아직도 안에 머물러 있다. 저주가 끝나고 사건이 종결되었다면 안전띠 밖에 있어야 함이 맞는데(상식적으로, 위험한 요소 주변에 안전띠를 두른다. 안전띠는 안전과 불안전의 경계인데, 그 안이 불안전이고 그 밖이 안전이다.) 그들은 안에 있다. 이는 저주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그들이 여전히 저주에 걸려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그들은 구출되었는데 왜 경찰은 그들을 안으로 몰아 안전띠를 친 것일까. 결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리사에게 안긴 로즈는 카야코로 돌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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