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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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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Jun 12. 2024

까르네

감독이 미쳤음

1. 감상

영화사에서 가장 강렬한 처녀작이 아닐까. 이 영화를 보면 감독이 누구인지 안 찾아볼 수가 없다. 도대체 이런 영화를 누가 만들었을까. 궁금해서 견딜 수 없다. 그만큼 인상적이다. 너무나 현실적인 주제 의식과 금기를 후벼 파는 감독의 통찰력, 그리고 여느 영화에서 볼 수 없는 파격적인 표현 형식까지 영화 전체가 놀라움의 연속이다. 경적 소리 같은 효과음과 함께 뜨는 자막은 과해 보이지만 전혀 촌스럽지 않다. 감독은 이 자막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마구 날리는데, 영화가 본래 노골적인 스타일이어서 위화감 들지 않고 오히려 시청자에게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솔직히 감독이 이렇게 주제를 대놓고 드러내는 영화는 처음 봤다. 보편적이고 정석적인 관점에서 주제의 노출은 창작자의 무능력으로 여겨져 혹평 받지만(고수는 이야기 속에 주제를 깊숙이 숨긴다.)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주제의 노출이 호평을 이끈다.

가스파 노에는 이 첫 영화로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했다. '나는 앞으로 이런 영화를 만들 테니 잘 봐 둬.'라는 전언이 영화 곳곳에서 느껴진다.


2. 세계관

영화 제목 'carne'는 질이 좋지 않거나 질긴 고기를 뜻한다. 이것은 속되고 천박한 세상살이에 대한 비유다. 만약 제목이 맛있고 품질 좋은 꽃등심이나 차돌박이를 뜻했다면 영화에 우아한 상류층의 삶이 나왔겠지만, 그와 반대의 뜻이므로 비루하고 형편없는 하층민의 삶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고아 출신의 푸주한이다. 그의 아내는 딸을 버리고 도망했다. 딸 신시아는 벙어리다. 그들이 사는 집은 좁고 허름하다. 동네는 황량해서 거리에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 쓸쓸한 거리를 혼자 걷고 카메라는 그것을 롱숏으로 보여준다. 알고 지내는 동네 주민이 몇몇 있지만 주인공은 그들을 얼간이라 생각하고, 그들 또한 주인공이 길에서 인사하자 뒤에서 얼간이라고 흉본다. 서로가 서로를 마음속으로 깔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자기 딸을 돌봐주는 가정부도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녀는 약간 모자라 보인다. 배우가 연기를 엄청 잘했다는 증거인데, 무미건조한 표정과 생기 없는 목소리는 그녀와 그녀의 인생이 보잘것없음을 알게 한다. 영화에서 그나마 정상적으로 보이는 인물이 변호사인데 주인공의 무죄와 감형을 위해 열렬히 변호하는 게 아니라 합의와 보상을 권하는 것으로 보아 일을 귀찮아하는 국선변호인일 가능성이 높다. 신시아를 희롱한 이슬람 노동자, 또 주인공에게 폭행당한 이슬람 노동자, 그리고 주인공이 감옥에서 만난 게이, 제라드. 이들도 비주류로서 하층의 희망 없는 삶을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색감이 붉은색이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붉은색이 등장한다. 붉은색은 위험, 경고, 정지 등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내므로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달가운 색이 아니다. 영화 초반에 주의(ATTENTION) 자막과 함께 도살자가 말을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말의 몸에서 콸콸 쏟아지는 피는 영화에서 붉은색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피는 결국 우리 삶의 잔인함이다. 말을 죽여서 그 고기를 임신한 아내가 먹는다. 주인공은 아내에게 임신했으니 건강을 위해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고기를 먹고 딸이 탄생한다. 이는 하나의 생존을 위해 하나의 죽음이 필요한, 강자가 약자를 먹고 사는 약육강식에 대한 비유다. 주인공이 이슬람 노동자를 폭행할 때도 고아원의 어린 시절을 상기하며 폭력이 필요악임을 얘기한다. 살기 위해서는 피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붉은색이 영화 전체를 물들였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이 잔혹하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라디오에서 'Ti Amo(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노래를 듣고 신문에서 '행복해지는 법'이라는 기사를 읽으며 사랑과 행복을 찾지만 현실에 그런 것은 없다. 가정부는 성교 체위를 연상시키는 몸짓으로 식탁을 닦고, 신시아는 자살을 생각하듯 창밖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주인공은 피 묻은 도마를 닦아낸다. 그리고 감방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누드 사진, 썰매에 면도날을 달아 아이 엉덩이를 베었다는 범죄 기사, 눈알 파고 수족 절단하는 장면을 여과 없이 방영하는 텔레비전, 여자들이 아이를 갖는 이유가 늙어서 보호받기 위함이라는 주장, 그래서 출산 직후 아들인지 딸인지 물어보고 딸은 필요 없다며 도망간 아내. 이렇게 현실은 사랑과 행복이 아니라 비열하고 잔혹한 욕망과 본성으로 점철돼 있다. 주인공의 독백처럼 세상은 이기적이다. 착하고 인심 좋아봤자 소용없다. 더러운 놈이 늘 이기게 돼 있다. 사람들은 인생에 살아남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런 희망과 믿음을 산산조각 내버린다.

구원의 빛이 당신 피부 아래에 있고 그 빛이 터널의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텔레비전 속 목사의 말은 근친상간을 긍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금기를 가르치고 강요해야 할 종교가 오히려 금기를 깨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조차 타락해서 구원을 줄 수 없음을 뜻한다. 주인공은 딸에 대한 정욕을 인정하고 그것에 갈등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과 세상이 그렇게 더럽다.

첫 장면에 호텔에서 성교하는 내용의 자막이 나오는데, 아내는 동정녀라 피를 흘린다. 딸을 출산하는 장면에서는 피 묻은 아이가 질에서 나오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공개된다. 이것은 인간의 탄생이 피와 함께 시작함을, 그래서 피의 잔인한 속성을 거부할 수 없음을 뜻한다. 피는 인간의 원류고 따라서 세상은 잔혹하다. 주인공은 정육점을 운영하며 나름 열심히 살지만 초경 때문에 딸의 옷에 묻은 피를 이슬람 노동자한테 성폭행 당한 혈흔으로 오인하여 복수심에 범죄를 저지른다. 결국 감옥에 가고, 재산과 가게를 처분하고, 딸과 이별한다. 피로 인하여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출소한 뒤 카페 여사장과 잘돼 프랑스를 떠나는 과정에서 언젠가 딸을 다시 데려오겠다는 계획을 품지만,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만 관객은 그것이 불행한 결말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탄 차가 붉은빛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터널을 나오는 장면 없이 그 속에서 막이 내린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핏빛 세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3. 루시퍼 대 고다이바

피(붉은색)와 말고기가 삶의 잔인함과 천박함을 상징하고 주인공이 그것을 대변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딸 신시아는 그와 반대의 영역에 위치한 인물이다. 물론 그녀의 태도는 소극적이다. 그래서 더럽고 잔혹한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영화의 주제가 공고해지지만, 긍정적인 이미지로 영화의 부정적 요소와 대립각을 만드는 그녀의 역할은 꽤나 논리적으로 구성돼 있다.

아내는 말고기의 맛이 이상하고 뱃속에서 아이가 움직였는데 아팠다고 말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말고기는 부정적인 의미다. 신시아는 긍정적인 의미를 대표하므로 뱃속에 있을 때 말고기를 거부하고 엄마(아내)에게 고통을 준 것이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주인공이 고기를 권할 때도 그녀는 거부의 의미로 고개를 젓는다. 주인공이 직접 잘라 먹여주지만 씹기만 할 뿐 더는 먹지 않는다. 신시아는 긍정적인 의미이므로 부정적 의미인 말고기를 좋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은 복면을 쓴 텔레비전 속 영웅 까르네의 말로 대변된다. 신시아가 벙어리이므로 까르네가 그녀의 말을 대신하는 것이다. 말고기 먹는 그 식사 장면에서 텔레비전 속 까르네는 칼을 들고, 루시퍼의 목을 자를 것이라고 말한다. 루시퍼는 악마다. 본래 천사였는데 신에게 대항했다가 지옥으로 추방되었다. 루시퍼가 언급된 이유는 인간의 삶을 지옥으로 묘사하기 위함이다. 까르네가 그를 죽이겠다고 말한 것은 신시아가 그런 지옥 같은 삶과, 그런 부정적인 의미와 대립한다는 뜻이다. 주인공이 그녀에게 말고기를, 지옥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말고기를 먹이는 행위는 그녀를 부정적인 요소로 만드는 것과 같은데 그녀는 긍정적 의미의 대변자이므로 말고기를 거부하고 까르네를 내세워 부정적 의미의 상징인 루시퍼를 죽이겠다고 말한 것이다.

복면영웅 까르네가 신시아의 페르소나인 근거는, 첫째 그녀의 침대 곁에 그의 그림이 있다는 사실이고, 둘째 그녀는 벙어리여서 말을 못 하는데 그녀의 심정이 텔레비전 속 까르네를 통해 전달된다는 점 때문이다. 주인공이 신시아에게 이별을 고한 후 그녀는 침대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데 까르네가 도끼로 참수형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까르네의 최후는 그녀의 최후와 같다. 피붙이로서 그녀를 유일하게 돌봐주던 아빠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가 없이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목욕시켜주고, 속옷 입혀주고, 가정부를 고용해 대신 돌봐주게 했던 것도 그다. 아빠와 이별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지옥 같은 세상에 홀로 남겨짐을 뜻한다. 까르네는 지옥의 문이 열렸다, 악마가 모든 곳에 있다, 나를 도와 달라고 외친다. 이것은 아빠 잃은 신시아의 절규나 마찬가지다. 아빠의 사랑과 보살핌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이제 그것이 사라졌으니 지옥의 문이 열리고 악마가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도와달라고 외치지만 벙어리라서 말할 수 없고 주변에 혈육 없이 혼자라서 도움 받을 수 없다. 까르네의 참수형은 그녀의 죽음과 같다.

피, 말고기, 루시퍼가 지옥 같은 현실, 즉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 부녀의 사랑은 긍정적인 의미로 작용한다. 여기서 사랑은 당연히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이 아니라 가족간의 정신적 사랑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신시아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아빠의 애정과 보살핌이므로 그녀는 그것을 바라고, 그렇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긍정적 의미를 획득한다. 아빠인 주인공은 어렸을 적부터 신시아에게 목마를 태워주는데, 목마 놀이기구는 딸에 대한 아빠의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장치로서 역시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목마가 정말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의문과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영화에서 말 타는 행위가 성교를 연상시키듯 표현됐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어린 신시아에게 목마를 태우는 장면인데, 각도가 성교 체위를 연상시킨다. 주인공의 성기 부위와 신시아가 탄 말의 엉덩이 부위가 닿을 듯 말 듯하다. 또한 신시아가 가정부 손에 이끌려 목마 근처를 지나갈 때 목마 타는 남자아이가 허리를 매우 노골적으로 움직인다. 주인공이 카페 여사장을 유산시킬 목적으로 뒤에서 범할 때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목마가 등장한다. 이러한 것들은 목마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근친상간을 겨냥한 부정적인 의미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엄밀히 말하면 목마는 긍정과 부정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교를 상징하나 신시아에게는 부성애를 뜻한다. 부성애는 긍정적인 의미다. 따라서 목마는 신시아에게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장면도 물론 있다.

신시아가 목욕을 끝내고 나올 때 벽 중앙에 걸린 액자에 나체로 말 타는 여인의 그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여인은 레이디 고다이바(Lady Godiva)다. 11세기경 영국 코벤트리 지역 영주의 부인이었다. 과도한 세금 부담 때문에 농민들이 힘들어하자 그녀는 영주인 남편에게 세금 경감을 부탁한다. 남편은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녀는 실제로 옷을 벗은 채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았다. 그래서 약속대로 세금이 경감되었고 농민들은 그녀에게 감사해했다. 대충 이런 이야기인데 어쨌든 고다이바가 상징하는 것은 순수함과 숭고함이다. 그녀가 옷을 벗고 말을 탄 것은 속되고 음흉한 목적 때문이 아니다. 노출증 환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순수하고 숭고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고다이바의 그림이 신시아가 자는 침대 공간에 걸려 있다는 것은 신시아가 고다이바와 동일시됨을, 고다이바가 선한 의도로 말을 탔듯이 신시아도 부성애를 느끼고 싶은 순수한 의도로 말을 탐을, 그래서 목마가 신시아에게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긍정적인 의미임을 증명한다.

영화의 골격을 이루는 긍정과 부정의 대립 관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긍정적인 것은 신시아, 까르네, 목마다. 부정적인 것은 피, 말고기, 루시퍼다. 부정적인 것은 속되고, 천박하고, 잔인하고, 비열한, 지옥 같은 세상을 의미하고 긍정적인 것은 그 속에서 그나마 순수한 부성애(사랑)를 의미한다. 이 둘의 대립은 루시퍼에 대항하던 까르네가 참수형 당함으로써, 주인공이 딸 신시아에게 이별을 고함으로써, 주인공이 카페 여사장과 성교할 때 신시아를 상상함으로써, 영화의 마지막이 붉은빛의 터널에서 끝남으로써 부정의 승리로 귀결된다.

참고로, 주인공이 카페 여사장을 유산시키려고 성교할 때 까르네의 복면을 쓴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그때만큼은 그가 지옥 같은 세상에 대항하는 까르네처럼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백으로 오르가슴 9초 때문에 아이는 60년을 고생해야 한다고, 그래서 이 무고한 생명을 구제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태어나는 것이 고통이므로, 더럽고 잔인한 세상에 태어나봤자 고생만 할 게 뻔하므로 아예 유산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정적인 의미에 대항한 셈이므로 까르네처럼 복면 쓴 장면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딸을 상상하자마자 다음 장면에 복면 안 쓴 얼굴이 등장한다. 딸을 상상했다는 것은 부정적 의미인 근친상간을 의도했다는 것이므로 긍정적 의미의 까르네에서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때 힘 주며 올라가는 팔은 발기된 성기를 상징하고, 내려찍는 도끼질은 그가 사정했음을, 참아왔던 근친상간을 간접 실현했음을, 그래서 부성애가 타락하고 소멸되었음을, 까르네가 루시퍼에게 참수형 당했던 것처럼 악이 완전히 승리했음을 뜻한다. 근친상간을 막아왔던 게 부성애였고 그것이 지옥 같은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근친상간으로 타락하고 변질되었으니 이제 완전한 악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4. 기타

신문과 라디오가 종종 등장한다. 주인공에게 폭행 당한 이슬람 노동자도 라디오를 듣고 있었고, 주인공이 혼자 길을 걸을 때 한쪽 구석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인간이 본래 고독한 존재임을, 그래서 소통할 창구가 신문과 라디오밖에 없음을 뜻한다. 요즘 시대로 따지면 SNS를 하고 유튜브를 보는 것과 같다.

이슬람 노동자를 폭행한 주인공은 이슬람 푸주한에게 가게를 빼앗긴다. 그 이슬람 푸주한은 아들이 있다. 딸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과 대비된다. 그의 딸은 벙어리지만 이슬람 푸주한의 아들은 소스 이름도 척척 외며 말을 잘한다. 아빠 가게에 와서 일을 도와주는 모습으로 미루어 부자지간이 돈독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부녀지간은 냉랭하고 서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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